18화. 신화 붕괴 (2)
연우는 바짝 긴장했다.
천마는 신들조차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 홀로 존재하며, 모든 것을 관측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빛’이라는 매질이 있어야만 하니.
기어 다니는 혼돈이 말한 것처럼 어둠으로 빛을 가린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쫓기는 입장에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천마의 시선이 유달리 수상한 곳을 발견합니다.]
[빛이 닿지 않는 지역입니다.]
[천마의 시선이 결계 주변을 꼼꼼하게 살핍니다.]
연우는 부디 천마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주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검을 꽉 쥐었다.
혹시 자그마한 기파라도 흘러나갈까 싶어 일부러 신력을 끌어올리지 않고 있었지만.
긴장감으로 인해 손에 땀이 가득 찰 정도였다.
[천마의 시선이 닿습니다!]
그렇게 같은 내용의 메시지만 떠올라 있기를 한참.
[천마의 시선이 잔뜩 의문을 표시합니다.]
[천마의 시선이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마의 시선이 떠납니다!]
황금색 빛줄기는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결계 주변만을 계속 살피다가, 결국 아무 이상도 찾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곧바로 움직일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가 혹시 다른 낌새를 보일까 싶어 경고했다.
물론, 연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마는 시니컬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아주 용의주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미심쩍은 곳을 두고, 아무런 조처도 없이 그냥 이렇게 쉽게 떠날 리가 없었다.
[천마의 시선이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봅니다.]
[천마의 시선이 떠났습니다!]
떠나는 척하면서 혹시 다른 움직임이 있지는 않나 다시 한번 살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황금색 빛줄기가 완전히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제자리에 머물렀고, 더 이상 아무 이변이 없을 즈음에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극도의 긴장감은 정신력은 물론 체력까지 막대하게 앗아 가는 법이었다. 입고 있던 옷도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이 설치한 결계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밤’의 법칙을 일부 적용한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를 가질 수 있다니. 역시 지식의 세계는 한계가 없이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래서 고민되었다.
이놈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할지.
『당장 급한 불은 껐어도, 아직 전부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런 연우의 의중을 단번에 눈치채고,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녀석은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쓸모 있는 자신을 그냥 버릴 수 있겠냐고. 천마의 추격이 집요하게 따라붙을 텐데,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필요하지 않겠냐
이미 한 차례 쓸모를 보인 것으로, 자신과 함께한다면 역전을 꾀할 수 있을 거라고 회유하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다. 어째서 그동안 거인족과 용종이 녀석의 꾐에 넘어가 몰락하고 말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이다만.』
연우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기어 다니는 혼돈을 이대로 두었을 때에 가질 이점과 그로 인해 자신이 감수해야 할 단점을 저울질해 보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다 무게추를 더 올리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음에 그대가 떠올렸던 방법 말이다.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것을 잘만 활용한다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도 같이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순간, 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그대에게 깃들면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그대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는 쉽게 추론할 수 있지.』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깟 일쯤이야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떤 목적으로 타인의 신화에 빙의를 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돌발 변수에 의해 그 신화 속에 억류된 상태라……. 그런 거라면 미래의 나를 해치운 작자가 이 시간대에 나타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지. 안 그래?』
“…….”
『다만, 단순히 한 존재를 이루는 신화라고 하기엔 사실성이나 개연성이 너무 방대하게 풀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존재의 신화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영 이상할 일은 아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더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대와 비슷한 위기를 겪은 예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비슷한 예가 더 있다고?
그렇다는 건 그중에 해결책도 있다는 뜻일까?
연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의 설명을 더 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보이려는 패가 무엇인지 좀 더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화, 한 개인이 쌓아 올린 업(業)이 승화되어 존재를 이루는 근간이 되지. 신위, 계급, 권능…… 그 모든 것들이 거기서 비롯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뼈대로만 봤을 때의 이야기.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본질적으로 신화는 ‘스토리텔링’이다.』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연우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존재가 쌓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세계에다 말하는 것이지. 그래야 신도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더 강하게 인식되어서 신앙이 보일 테니까. 법칙에 대한 구속력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역으로 뒤집으면, 신화를 생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골자만 잘 지키기만 해도 된다는 뜻이 된다.』
순간, 연우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야기의 큰 흐름만 어긋나지 않게 방향을 잡아 주면 된단 뜻인가?”
『그래. 결말만 확실하게 잡아 주면 되는 것이다.』
연우는 얼핏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천마가 날뛰어서 문제라면, 천마가 그대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더 큰 골칫거리를 던져 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기어 다니는 혼돈이 거론한 것일 뿐, 사실 연우도 방금 전까지 고려하던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에 생각만 했을 뿐, 섬 불리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밀어붙이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방법이면 나도 충분히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자부하는데 말이지.』
연우는 어쩐지 기어 다니는 혼돈을 볼 수 있다면, 녀석이 키득거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를 같이 깨우자. 이 신화의 결말은 그 뒤에 맞추는 것이다.』
* * *
“……천마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창공 도서관으로 되돌아갔을지도.”
“제길!”
우라노스는 메타트론의 대답에 신경질적으로 근처에 있던 돌부리를 걷어찼다.
화가 끓어올랐다. 누군가 이토록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 수백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한 공신들도 한숨만 내쉴 뿐 어쩔 줄 몰라 했다.
천마는 그들과 싸우다 말고, 분신만 남긴 채로 뒤로 내빼 종적을 완전히 감춰 버렸다.
“그래도 일단 말라흐뿐만 아니라, 우리 쪽 놈들에게도 같이 뒤져 보라고 일러뒀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세나.”
바알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달래려 했지만, 일그러진 우라노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도 이런 말이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천마는 아주 끈질기다. 그리고 집요하다. 포기를 모르는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그를 탄생시켰을 지는 모르지만, 그와 적으로 마주친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공포가 없었다.
호시탐탐 노려오는 천마의 송곳니는 항상 공포를 부르니. 실제로 그와 갈등을 겪었던 신과 악마들 중에는 노이로제 때문에 먼저 횡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천마의 그런 집요함이 연우에게로 쏠렸다고 한다. 당연히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을 포함한 ‘낮’의 병력들이 전 우주로 흩어졌다지만.
이토록 넓은 세계에서 특정한 존재를 찾기란 쉽지 않겠지.
하물며 존재감마저 갈무리해 버렸다면 더더욱 어려워질 테고.
‘분명 방금 전까지 있던 항의도 지금은 더 이상 없고…….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외곽으로라도 빠졌나?’
왜 사전에 별다른 말도 없이 무단으로 영역을 침범하느냐며 무더기로 날아오던 다른 사회들의 항의도 지금은 잠잠해진 상태.
이걸 희소식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천마에게 뒷덜미가 붙잡힌 거라고 봐야 하는 걸까.
“미치겠군. 당이 너무 당기는데.”
바알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이 답답해도 너무 답답했다. 집에다 두고 온 쿠키나 사탕이 미치도록 당겼다.
아니, 이럴 때 궐련을 딱 하나 물면 괜찮으려나. 원래 다과에 취미를 붙였던 것도 금연을 위해서였던 것이니. 데바에 가서 브라흐마에게 하나 달라고 하면 될 것 같긴 한데, 또 그러기엔 너무 귀찮고 짜증 났다.
아니, 어쩌면.
‘우라노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멀리 봐서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해야 하나? ‘알’의 후보가 사라졌다고 봐야 할…….’
바알은 그런 생각에 미쳤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분명히 ‘알’의 유력한 후보가 될지 모르는 인물이 사라지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알은 그런 가정이나 생각을 염두에도 두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단순히 칠흑왕이 두렵다 하여 친우의 혈육이 다치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야, 애당초 그들이 배신하고 돌아섰던 칠흑왕과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니.
‘알’의 존재가 두렵긴 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아이가 감당해야만 할 일.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대에 충실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를 찾아봐야겠지.
그리고 어쩌면.
‘설사 ‘알’로 점찍혔다고 해도,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진전을 동시에 잇는다면…… 어떻게든 방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바알의 두 눈이 깊어졌다.
‘어쨌거나 그 우둔한 미치광이를 가장 먼저 정면에서 들이받았던 게 그네들이었으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르 인페르날의 보고를 재차 확인하려는데.
『수좌님, 수좌님! 크로노스를 찾았습니다!』
페어링을 통해 메시지가 다급하게 날아들었다. 서열 39위의 말파스였다.
바알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거기가 어디냐?』
『베다의 관할하에 있는 ‘자야’라는 행성입니다. 한데, 그것이……!』
『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바알은 혹시 천마가 먼저 연우를 발견했나 싶어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그, 그게 아닙니다.』
『그럼?』
『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뭐?』
바알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연우를 찾아낸 것과 시비를 거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파스도 당황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야의 수호신인 비야사를 찾아가서는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 습니다.』
『……?!』
『비야사를 구하러 온 지원군들도 같이 두들겨 패서는 튀어 버리고…… 그 때문에 데바가 발칵 뒤집혀서 크로노스를 당장 잡아야 한다며 뒤를 쫓고 있습니다.』
『…….』
바알은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천마에게 쫓기고 있는 상태잖아? 그런데 왜 올림포스의 영역도 아니고, 다른 사회의 영역까지 가서 깽판을 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의 혼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수하들로부터도 급보가 다급하게 빗발쳤던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영역인 ‘발할라’에서 발리가 크로노스와 다투다가 실신해서, 현재 추격대가 크로노스를 쫓는 중……!』
『멤파스에서 민이 다친 것을 두고, 크로노스를……!』
『딜문에서 올림포스에게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묻고, 전면전을 선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제스크넬리에서도 크로노스를 추격……!』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바알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
“…….”
자신과 똑같이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는 메타트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쪽도 비슷한 보고를 열심히 받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