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신화 붕괴 (3)
쿠쿠쿠쿠……!
하늘이 울렸다.
땅거죽이 수십 킬로미터나 높게 치솟으면서 흩어진 분진이 방금 전까지 푸르렀던 행성의 표면을 자욱하게 뒤덮고, 그 아래로 검은 벼락이 쉴 새 없이 빗발치면서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렇게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간 대기는 빠져나갈 구석도 없이 갇힌 채로 온실 효과를 일으키며 행성을 더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갈라진 지표면 사이로 유황불이 치솟았다.
대멸종을 겪는 행성의 입장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은 딱 한 글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재앙.
『이런 빌어먹을!』
『크로노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이냐!』
『정녕 올림포스는 우리 아스가르드를 적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냐!』
『절대 용서치 않겠다!』
브룬힐다 계(界). 이곳은 ‘아스가르드’가 각별히 생각하는 요충지였다. 데바, 올림포스, 멤파스의 영역들과 맞물리는 장소이기도 해서 평상시에도 상당한 병력을 배치시키며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었지만.
그런 그들의 수고도, 한 사람의 등장 앞에서는 전부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하하! 역시 ‘밤’을 버리고 그대에게 갈아탄 것은 아무래도 옳은 선택이었던 모양이로군! 이런 생각지도 못한 정신 나간 광경을 연달아 보게 될 줄이야!』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의 눈을 빌려 무너지는 브룬힐다 계를 보는 내내 파안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를 같이 찾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 이후.
연우는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 답변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움직였다. 올림포스가 아닌 다른 신의 사회가 다스리는 영역.
보통 신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었으니. 별다른 양해나 협조 요청도 없이 무단침입한 무뢰한은 즉결 처분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우가, 아니, 연우가 빙의한 육체의 신분을 눈치챈 신들은 연우더러 당장 물러나라고 경고를 했지만.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이곳을 뒤집어엎으려는데 다들 알아서 도망쳤으면 좋겠군.
-……?
-추후에 변상은 이 몸의 주인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걱정 말고. 원래 아들이 저지른 허물은 아버지가 덮어 주는 법이라고 하잖아?
연우는 오히려 태연하게 그들에게 앞으로 사고를 칠 것이니 다치기 싫으면 알아서 떠나라는 무책임한 말을 던졌다.
당연히 영역의 주인들은 단단히 뿔이 날 수밖에 없었고.
연우는 ‘난 이미 경고했으니 감당은 너희들의 것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떠들어 대면서 신력을 마구잡이로 풀어헤쳤다.
하늘 날개를 펼치고, 검뢰를 마구잡이로 떨어뜨리는 판국에 어디 웬만한 행성이 버틸 수나 있을까.
권능만 따진다면 신왕 급에 다다른 연우였기에, 웬만한 행성쯤은 눈 감고 신력을 개방해도 금세 망가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전력을 다하는 데야 하급 신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렇게 초토화시키고 난 뒤, 연우는 여러 행성을 전전하면서 문제란 문제를 죄다 일으키고 다녔다.
기어 다니는 혼돈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를 같이 찾아 깨우자고 한 것이 자신이라고는 하나, 그 방법을 먼저 떠올린 것은 연우였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답은 주지 않고서 괜히 죄 없는 다른 사회들만 들쑤시고 다녀서야, 천마에게 ‘나 여기 있소!’하고 광고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서 문득 혹시 새로운 자살 방식인가 싶었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은 머지않아 금세 연우의 노림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혼란은 더 큰 혼란으로 덮어 버리는 게 제격인 법이지. 파하하!』
녀석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연우의 인상은 짜증으로 가득해졌지만.
“나도 굳이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1:45:33_20]
[1:45:33_19]
……
카운트가 떨어질 때마다, 연우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연우가 목표로 하는 것은 칠흑왕이 묻힌 장소였다.
그것이 오히려 우라노스와 ‘낮’이 아득한 세월 동안 지키고자 했던 것을 망가뜨릴 우려가 있었지만, 당장 천마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크로노스 신화를 종결지어야 하는 그의 입장으로서는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물론, 칠흑왕이 공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허는 아주 넓다.
‘낮’의 우주에도, ‘밤’의 우주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 겉에서만 떠돌고 있는 곳. 좌표 개념도 없는 그곳에서 칠흑왕이 잠들어 있는 특정 위치를 탐색한다는 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기어 다니는 혼돈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연우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대지모신을 공허에다 처박을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판국에 제한 시간을 무시하고 장소를 물색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빙의를 한 상태에서 심연으로 출입을 시도할 수도 없어. 시간 차가 어떻게 날지도 모르고.’
이 시간대라면 하르모니아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을 지키는 또 다른 칠흑왕의 후예가 아예 없으리란 법도 없었으니까.
설사 문지기가 없다고 해도, ‘문’을 직접 여는 건 별개의 영역이었다.
‘조부님을 몰래 찾아간다 하여도 가르쳐 주실 리는 만무할 테고.’
제아무리 우라노스가 자식과 후 예들을 아끼는 성격이라 하여도,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 짓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존법을 모색하려 한다 해도, 그런 이에게 가서 지난 숙명을 배반하는 짓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 치도곤만 당할 테지.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칠흑왕이 묻혀 있는 장소를 아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설사 모른다 하여도 단서 쯤은 알고 있을 존재들이 있었다.
‘죽음의 신과 악마들.’
이쪽 우주에서도 유달리 칠흑왕을 추종하던 무리들.
그들은 연우가 칠흑왕의 형틀을 하나둘씩 얻을 때부터 속속 나타나서 깊은 관심을 보이곤 했었다.
각자가 소속된 진영과 사회가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때로는 연우에게 시련을 내어 주기도, 권능을 공유해 주기도 하다가 이제는 그를 자신들의 영도자(領導者)로 인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칠흑왕을 추종하는 다른 무리인 타계의 신에 대해서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으니.
그들과 따로 접촉해 본다면 어떤 수가 나올 게 분명했다.
‘문제는 역시나 이 넓은 우주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위치를 몰래 찾아 접근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연우는 생각을 아예 뒤집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찾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이 한데 모일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될 테지.’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예 판을 깨 버려서 내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자신이 원하는 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깽판을 놓아서 상대도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강자들을 맞았을 때 연우가 늘 취하던 전략이었으니.
상대의 사고와 판단을 그르치게 만들고, 이쪽에서 가진 패를 가리기 위한 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연우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천마와 ‘낮’뿐만 아니라, 다른 신의 사회도 강제로 끌어와 판을 아예 엎어 버리고자 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웃으면서 내뱉은 말마따나, 혼란을 더 큰 혼란으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럼, ‘아버지’를 깨울 생각은 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의 그런 의중을 전부 파악하고, 비릿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하지만 연우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해 주지 않았다.
『또 다른 뭔가를 꾸미기라도 하고 있나?』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설사 네가 ‘아버지’를 깨우는 척만 할 생각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나설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아니, 오히려 그 과정에서 벌어질 기만이며 책략 등이 더 재미나려나?』
“…….”
연우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든 생각은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어쩐지 다른 ‘밤’의 존재들과 달리, 칠흑왕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충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떨 때는 저런 식으로, 불경하다 싶을 정도의 생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쪽 우주의 신과 악마들이 각자 생각도 성격도 다 다르듯이, 타계의 신들도 모두 하나같이 칠흑왕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건 아닐 테지. 연우는 더 이상 녀석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간 죽는다. 그런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온다.”
그 순간.
콰르르릉!
[천마가 강림합니다!]
황금색 빛줄기가 먼지구름으로 뒤덮인 행성 표면을 뚫고 내려앉았다.
『천마?』
『천마라고?』
『이게 대체 무슨……!』
연우를 에워싸면서 본영으로부터 지원 병력을 기다리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전혀 예기치도 못한 존재의 격에 하나같이 경악을 내뱉고 말았다.
가뜩이나 연우가 저지른 짓만 해도 골치 아픈데, 모든 신들에 있어 주적이나 다름없는 천마가 왜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이들의 충격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빛줄기가 가라앉은 자리로 천마가 나타났다.
그는 짜증이 단단히 난 얼굴을 한 채,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으르렁거렸다. 여태 얼마나 뛰어다닌 건지, 옷이며 얼굴에 숯검댕이 가득했다.
“이 새끼가. 나를 자꾸 똥개 훈련 시켜?”
천마는 연우가 깽판을 치고 사라지는 족족 계속 한발 늦게 나타나 모진 고생을 해야만 했다.
원래 빛이 닿는 곳이면 언제든 연우를 발견하고 나타날 수 있어야 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저지르고 다니는 건지 이따금 계속 인식에서 벗어나는 데다가, 어떻게 발견해서 직접 잡으러 움직이려 하면 그때는 이미 내빼고 난 뒤였다. 그래서 즉각 뒤쫓으려 해도, 소식을 듣고 찾아온 지원군들이 죄다 자신이 사고를 친 것으로 오해를 하고 말았으니…….
덕분에 천마는 생각지도 못하게 여러 신의 사회들과 연신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들을 때려눕히면서 연우를 쫓으니, 속도가 제대로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마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몇 번이나 거듭 반복한 뒤에야 겨우 연우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답지 않게 며칠은 씻지 않은 것처럼 꼬질꼬질해지고 만 것도, 전부 연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지금도 상황은 그리 썩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헤임달이 강림합니다!]
[티르가 강림합니다!]
[토르가 강림합니다!]
……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먼지로 어둑한 하늘이 흔들린다 싶더니, 거대한 성채가 나타난 것이다.
발할라(Valhalla).
토르를 비롯한 아스가르드의 상급 신들이 머문다는 궁전.
『올림포스 주신의 막내아들이 사고를 친다기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싶었는데…… 과연. 천마, 당신도 있었던 거였나?』
발할라에서 오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천마의 얼굴도 더 크게 일그러졌다.
저들은 우주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숱한 피해들이,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우라노스의 막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천마가 일으킨 소요라고 납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지만, 가뜩이나 연우로 인해 필요 없는 싸움을 숱하게 했던 천마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소리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천마에게 전면전을 선언합니다!]
[오딘의 권능, ‘세 까마귀의 관찰’이 발동합니다!]
[토르의 권능, ‘하늘을 찢는 번개’가 작렬합니다!]
[헤임달의 권능, ‘무지개의 일곱 칼바람’이 작렬합니다!]
……
발할라가 보유하고 있다는 정예병, 에인헤라르가 일제히 천마에게로 쇄도했다.
“젠장!”
천마가 짜증 섞인 투로 다시 황금색 빛줄기를 터뜨리려는데.
『천마.』
별안간 연우가 그에게 어기전성을 보내 왔다.
『왜 이 새끼야!』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천마는 ‘무슨 개수작을 또 부리려는 거냐!’라고 소리를 치려다 말고, 발할라 주변으로 갑자기 열리는 숱한 공허들에 소리 없는 경악을 내뱉고 말았다.
[신의 사회, ‘데바’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의 사회, ‘천교’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의 사회, ‘멤파스’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여태껏 연우가 지나쳤던 영역들이 죄다 연결되면서, 그 많은 신의 사회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쿠쿠쿠쿠!
강하게 짓눌린 수많은 영압 때문에 행성의 붕괴 속도는 더 빨라졌다.
[대다수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치욕을 준 천마에게 강한 적의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비를 걸었던 연우보다, 뒤늦게 나타나 배후로 짐작되는 천마에게 더 큰 살의를 표출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천마가 날고 긴다고 해도, 이 많은 숫자들의 신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천마가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지른 연우를 찾으려 했을 때, 이미 그는 ‘밤’의 지식을 이용한 결계로 종적을 감추고 난 뒤였다.
“으아아아아! 이 개새끼가아아!”
천마의 비명 아닌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곧 이어지는 폭음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콰르르릉, 콰릉, 콰르르-
우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