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70화 (670/862)

20화. 신화 붕괴 (4)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올림포스’에 전면전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올림포스’에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멤파스’가 ‘올림포스’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

“……나이가 들었나. 왜 이렇게 자꾸 헛것이 보이는 것 같은지, 원.”

“우라노스.”

“왜 그러나?”

“신이 늙는다는 말도 우습지만, 자네,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네.”

“…….”

“심심한 위로를 표하는 바이네.”

“###, 이놈을 내 당장……!”

우라노스는 애써 외면하려다 메타트론에 의해 강제로 현실을 마주하고 난 뒤,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갑자기 다른 신의 진영들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라니!

만약 연우가 눈앞에 있었다면 충동적으로 팔다리를 분질러서 ‘밤’에다 던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라노스는 어떻게든 화를 삭여야만 했다.

자신이 빚은 사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단 벌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연우를 잡아다가 치도곤을 할지언정 지금은 빠른 상황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바알이 덧붙인 말도 있었고.

“그래도 꼴에 가만히 숨어 다니지만은 않겠다고, 뭐라도 해 보겠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은 가상하군. 덕분에 천마도 많이 바빠질 테고 말이지.”

바알은 쿠키를 한입 베어 물면서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우라노스처럼 연우가 친 사고로 당이 급격하게 떨어져 피곤했던 상태였지만. 막내인 72위의 안드로말리우스가 눈치껏 쿠키를 가져오면서 컨디션이 회복된 상태였다.

“다만, 문제는 단순히 천마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다른 사회들을 끌어들인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그걸 알 수 없다는 점인데 말이야.”

옛 신분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바알은 이제 마왕이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연우가 친 사고는 부담은 되어도, 성향상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악마는 체재에 순응하지 않는 반골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연우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내리려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연우가 당장 살아 보겠답시고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역전을 꾀하기 위한 큰 그림의 한 조각인지가 궁금했다.

전자라면 후폭풍 따윈 감내하지도 못하고 금방 스러질 멍청이일 테고, 만약 후자라면…….

‘올림포스를 천계, 그 자체로 만들 수 있을 동량(棟梁). 그렇게 볼 수 있겠지.’

또각!

입에 물고 있던 쿠키가 크게 부러졌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차후 르 인페르날의 입지도 결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바알은 우라노스가 직접적으로 올림포스를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교적 ‘옛적’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 자신이나 메타트론과 다르게, 우라노스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버린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낮’의 진영을 어떻게든 보존하겠답시고, 그 중심을 크게 키우겠답시고 일구었던 올림포스를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신격에도 적지 않은 무리가 갔으니.

지금 당장은 신들의 사회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라고 통할지 몰라도, 그것이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라노스도 그런 본인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자신의 사후(死後)에 있을 질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을 정도였으니까.

‘나와 르 인페르날은 절대악을, 메타트론과 말라흐는 절대선에 각각 서서 양쪽 기둥이 되어 ‘낮’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친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가 따로 개입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굴러갈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라노스와의 약조일 뿐.

그의 후손들과 맺은 약조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후란 말이지.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는 지키려 해도, 결국 나나 메타트론이나 각자의 이권이나 패도를 추구할 수밖에 없을 테니.’

시작은 고결한 마음가짐에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몸담은 세력을 이끄는 이상, 이기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올림포스의 위치가 아주 중요해. 우라노스의 여덟 자식들이 한때 우리와 함께했던 이들의 후손이라지만…… 녀석들은 그다지 선조들에 대한 열망이나 사명이 없어. 결국 추후에 있을 올림포스의 행보는 ‘낮’과는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알은 남은 쿠키를 전부 입 안에 쓸어 넣은 뒤, 손을 가볍게 탈탈 털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이상은 바라질 수밖에 없다. 선조들의 유훈을 잊었을 올림포스는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였다.

우라노스의 차기로, 누가 왕좌에 앉느냐?

‘그래도 비교적 맏이인 오케아노스 녀석이 제 아비를 가장 많이 닮고자 노력하니, 녀석이 앉는다면 좋겠지만…… 그리 쉬울 것처럼 보이진 않고. 엎치락뒤치락, 이런저런 소란이 있다가 결국 그 꼴통 놈이 앉을 것 같단 말이지.’

바알은 망나니인 크로노스보다도 더 막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연우를 높게 치고 있었다.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씨를 타고났으면서 칠흑왕의 힘까지 풍기고, 거기다 영특한 머리까지 지니고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놈이 언젠가 올림포스의 대권을 쥘 게 분명했다.

‘그런다면 ‘알’의 운명으로부터도 어떻게든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져도 될 테고. 그럼 그때가 다시 ‘낮’이 피어나는 순간이 될 테지.’

바알은 메타트론의 생각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바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라노스는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꼈다.

“흥! 그 엉큼한 놈이 설마 그 정도 복안이 없으려고?”

“흐.”

바알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우라노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수 없게, 왜 웃어?”

“그렇게 길길이 날뛰면서도 제 손자 자랑은 빼놓지 않는다 싶어서.”

“뭐?”

“천하의 우라노스도 결국 혈육에 대한 사랑은 어쩔 수 없구만. 양자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이건가? 그렇게 냉혹하던 과거의 야드-타타그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

우라노스의 콧잔등이 잔뜩 붉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하여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 망나니 놈부터 잡으러 가자고! 여기 있으면 뭐 하나!”

우라노스가 투덜거리면서 연우가 한창 사고를 치고 있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영감이라니까.”

바알은 그런 그를 보면서 어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흘리다가, 여태 아무 말도 없던 메타트론을 돌아봤다.

메타트론은 방금 전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녹서.”

“……그건 왜?”

에녹서. 르 인페르날에서는 레메게톤이라 부르는,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계시록.

“있다. 그런 것이.”

하지만 메타트론은 바알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우라노스를 따라 사라졌다.

바알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한 놈은 신경질적이고, 다른 한 놈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이런 것들과 계속 같이 가야 하나?”

그래도 어쩌겠나. 저런 정신 파탄자들과 손을 잡은 내가 잘못이지. 바알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오른팔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같이 사라졌다.

“아가레스, 잘 지키고 있어라.”

르 인페르날의 서열 2위, 아가레스는 가타부타 별다른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알도 거기에 대해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그의 이상한 성격이야 예전부터 숱하게 겪었던 것이니.

그러다.

“…….”

아가레스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가고.

스르륵!

허공이 벗겨진다 싶더니, 결계가 해제되면서 안쪽에 숨어 있던 연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레스. 거래를 했으면 하는데.”

* * *

연우는 지그시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녀석을 찾아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낮’의 수장들에게 들키지 않고, 죽음의 신과 악마들에게 접촉을 하려면 아가레스밖엔 없어.’

연우는 이 시간대에서 죽음의 신과 악마들에게 다가갈 만한 접점이 없었다. 분명히 천마가 여러 사회들과 다투고 있을 곳에도 몇 명은 있겠지만, 그곳은 너무 위험했다.

반면에 우라노스 등이 빠진 ‘낮’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우습군. 의도적으로 바알 등을 피해서 만나고자 한 게 나라니. 참으로 우스운 애송이야.”

하지만 아가레스의 태도는 아주 차가웠다. 팔짱을 낀 채로 콧대를 살짝 올린 모습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내리까는 시선에는 경멸감도 섞여 있었다.

원래 시간대에서 녀석이 연우에게 보이는 광적인 집착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러나 연우는 오히려 그런 녀석의 모습이 더 반가웠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아가레스야말로, 오히려 이야기를 나누기에 편했으니까.

“〈흉신악살〉.”

전혀 생뚱맞은 말.

아가레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네가 나에게 주었던 권능이다.”

“…….”

“원래는 너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힘이지. 안 그런가?”

순간, 아가레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밀랍인형처럼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너도 진즉에 그걸 알아봤던 것 같고. 그러니…….”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지.”

아가레스는 연우가 제대로 말끝을 맺기도 전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하니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별 관심도 두지 않는 성격인 것 같은데. 원래 저렇게 부탁을 잘 들어주나?』

‘그럴 리가.’

기어 다니는 혼돈이 던진 질문에 연우는 눈을 가볍게 좁혔다. 아가레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사실 연우는 흉신악살을 증거로 들어 녀석의 관심을 산 다음, 거래 조건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아가레스가 항상 집착을 보이던 것은 그와 동생의 영혼이었으니. 연우는 자신의 영혼을 이루는 신화 중 일부를 떼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칫 신격에 악영향이 갈 수 있고, 역량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거래였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가레스는 거래 조건도 듣지 않고 그냥 도와주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시니컬한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연우가 단단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뭘 부탁할 건지, 말 안 하나? 그다지 여유롭진 않을 텐데?”

아가레스는 오히려 그런 연우를 도발하듯이 비웃음까지 날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그래도 남는 장사가 된 셈인데. 그냥 진행하지 그러나? 놈이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이 신화만 탈출한다면 안 볼 사이가 아닌가. 후후!』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런 둘을 보면서 웃기만 할 뿐이었지만.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차라리 연우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놈이 어떤 단서를 달고 있을 지는 몰라도, 후불이라면 여차할 때 바로 내빼면 그만이었으니까.

“할파스를 만나게 해 줬으면 하는데.”

“그놈은 왜 찾는 거지?”

38위의 할파스. 죽음과 전쟁을 상징하는 마왕.

순간, 아가레스가 영 탐탁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치 맛있는 사탕을 봐서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그게 자신이 아닌 다른 친구의 것이라는 말을 들은 어린아이 같다고 해야 할까.

연우는 아주 잠깐 이런 녀석을 계속 믿어도 될까 싶기도 했지만, 기왕 믿기로 한 것 계속 믿어 보자고 생각했다.

“안 되나?”

“내 직할의 동부군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녀석은 그게 아니라서.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는데, 이유쯤은 들어도 되지 않나?”

“죽음을 신위로 두고 있는 신이나 악마와 만날 필요가 있어서.”

“……그렇군. 그런 거였나? 나보다도 더한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큭! 그래서 미래의 내가 그런 표식을 남겨 뒀던 거였군.”

아가레스는 그것만으로도 연우의 의도를 읽었던지 피식거렸다. 광기마저 묻어나는 웃음소리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좋아. 그럼 죽음의 악마라면 아무나 괜찮겠군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럼 할파스는 피하는 게 좋을 거야. 놈은 바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근위대장과 같은 격이라서 말이지. 대신에 다른 놈을 소개시켜 주지.”

아가레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공간에 균열이 가면서 포탈이 활짝 열렸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으로 가는 포탈이 열렸습니다!]

니플헤임이라면, 헬을 소개해 주겠단 의미였다.

연우는 차라리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아가레스가 이때부터 니플헤임과 안면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로서도 성격을 알고 있는 헬이 상대하기가 훨씬 쉬웠으니까.

“아 참, 깜빡할 뻔했군. 들어가기 전에 주의해 둘 점이 있다.”

아가레스는 포탈을 타고 넘어가기 전에 연우를 돌아봤다. 입가에 물린 비릿한 웃음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곳의 수장이 꽤나 변태라서 말이지. 조심해야 할 거야.”

“……?”

연우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멍! 멍멍!

-아아! ### 님! 당신을 뵌 저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답니다!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 대며 좋아하는 펜리르와 이상하게 자신만 보면 헐떡대던 헬.

니플헤임의 수장이…… 그들의 아버지인 로키였지, 아마?

그런 녀석들이 사실 제 아버지를 닮은 거라면?

“…….”

한순간.

연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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