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71화 (671/862)

21화. 신화 붕괴 (5)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의 본영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현재 ‘니플헤임’을 둘러싼 ‘환상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신의 입장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인지에 혼란을 주는 공간입니다. 안개 속에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미아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허락을 맡은 뒤, 다시 입장하시길 권고합니다.]

연우가 아가레스를 따라 도착한 장소는 온통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시각부터 촉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을 흐트러지게 만드는 안개.

거기다 정신계에도 간섭을 하는 건지, 웬만한 신이나 악마들도 여기에 휘말려서는 제정신을 온전히 되찾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스턴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혼란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신통(神通)이 발동합니다.]

[분산된 감각이 하나로 집중됩니다. 혼란된 감각이 다시 교정됩니다.]

[천안통이 길을 비춥니다.]

[천이통이 길을 밝힙니다.]

곧 연달아 들리는 메시지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던 세상이 다시 보정되면서 어느 순간 안개가 확 흩어지고 없었다.

“비교적 이곳에 익숙한 나도 올 때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인데, 이걸 금방 극복할 줄이야.”

아가레스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니플헤임은 그 명칭의 본래 의미가 ‘안개의 세계’일 정도로 안개와 친숙한 사회였다.

우주 창생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나긴 역사를 자랑했고.

그 때문에 니플헤임은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수많은 사회들이 스러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혼란한 시대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꾸준히 세력을 유지해 왔고,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명성을 자랑하니 어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자부심은 철저한 폐쇄성을 낳았다.

굳이 외부와 따로 교류를 가지지 않아도 자신들은 강하고, 단합력이 뛰어나며, 선진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니플헤임은 외벽에다 두꺼운 안개를 둘러치고, 어느 누구의 방문도 일절 거절했다.

이따금 인연이 있는 이들의 방문을 종종 허락할 때만 안개를 풀어 줄 뿐. 하지만 그마저도 허락을 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해서 방문자가 극히 드문 편이었다.

‘탑에서는 오히려 외부 활동이 비교적 잦은 것처럼 보였는데…… 천계에 갇히면서 저들의 성향도 바뀌었던 걸까?’

연우로서는 니플헤임의 개방적인 호의만을 기억했기 때문에 원래 그들이 보였다던 특성이 조금 의외였지만.

이렇게 안개를 직접 마주치고 나니, 그동안 상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저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안개에는 ‘거부한다’거나, ‘밀어낸다’, ‘혼란해진다’는 등의 의념이 잔뜩 섞여 있었다. 그리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저주한다’와 ‘죽인다’ 등의 의념이 또렷해지는 것이, 저들의 폐쇄적인 성향을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니플헤임의 결계조차 천안통과 천이통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이미 안개의 특성인 ‘인지 부조화(認知不調和)’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어서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아가레스로서는 연우가 신기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우를 흥미롭게 보는 존재가 한 명 더 있었다.

『오호호! 또 어떤 멍청이들이 만용을 부리나 싶었는데, 이거 잘생긴 오라비들이 둘이나 나타났네? 소녀는 너무 불끈불끈해져서 미칠 지경이야.』

츠츠츠!

위쪽에서 목소리가 울리더니, 안개가 조금씩 해체되면서 한 사람이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하이힐이 땅바닥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우아한 각선미가 언뜻 드러나고, 곧이어 눈이 이대로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니……?’

연우는 그녀를 본 순간 골이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 어느 한 군데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풍기는 기품이나 느낌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했다.

그러다 연우는 눈살을 가볍게 좁히고 말았다.

‘아니, 에도라? 아냐. 세샤가 크면 비슷할 것 같은…… 이게 뭐지?’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 위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빠르게 겹쳤다가 사라졌다.

그 때문에 저절로 마음이 편해지고 상대에 대한 호의가 샘솟았지만, 오히려 연우는 거기에서 적지 않은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쩐지 그런 작용들이 전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천안통이 눈을 트이게 합니다.]

[천이통이 귀를 트이게 합니다.]

[상대의 가려진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러자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면서 여인의 얼굴이 더 이상 겹쳐지는 이미지 없이 깨끗하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여인의 입꼬리가 씰룩 말려 올라갔다.

“‘인지 부조화’는 눈썰미가 좋아서 그렇다 치더라도, ‘호상 환각 (好相幻覺)’까지 제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오딘의 그 시건방진 까마귀 놈들도 겨우 알아본 것인데 말이지. 이 오라버니, 너무 마음에 든다.”

여인은 천천히 다가와 손끝으로 연우의 쇄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뭇 남정네들의 심장을 떨리게 할 만큼 아리따운 교태였지만, 연우는 어쩐지 불쾌감이 치솟아 그 손길을 거세게 내쳤다.

하지만 여인은 연우의 그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든 듯 붉은 혀로 입술 주변을 훑었다.

“거기다 튕기기까지 하네? 지적인 데다 차갑고. 정말 마음에 들어. 정말.”

연우는 대꾸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아 이것을 어떻게 해 보라는 식으로 아가레스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누군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연우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불쾌하니 그딴 말투 좀 집어치워라, 로키.”

아가레스도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좁히면서 여인, 니플헤임의 수장인 로키를 노려보았다.

로키.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 니플헤임을 대표한다는 세 남매의 ‘아버지’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로키를 대표하는 신화 중에 ‘성별을 마음대로 전환하여 희롱과 장난을 마구 일삼는다’는 내용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짜증 나.’

이런 비정상적인 취미를 갖고 있다면 가까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후후! 성별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봤을 땐 너도 충분히 저런 놈들과 같은 종류로 보인다만?』

기어 다니는 혼돈이 던진 말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아가레스가 경고를 해서 그런지, 로키는 더 이상 연우에게 치근덕대지 않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고마운 마음을 가질까 싶었는데.

“그놈은 내가 먼저 맡아 놓았다. 내 것에다 함부로 손댈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뭐?

“어머! 어쩌죠? 저는 임자 있는 몸을 빼앗는 걸 더 즐기는데.”

“뒈지고 싶나?”

“오! 이거 그거죠?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사람의 치정극! 저 이런 거 꼭 해 보고 싶었답니다!”

“…….”

살기를 한껏 풀풀 날리는 아가레스와 좋아서 환호하는 로키를 보면서.

연우는 슬그머니 뒤로 몇 발자 국 물러서야만 했다.

『흐흐. 미친 것들투성이로군.』

연우는 진지하게 어쩌면 자신이 마굴로 들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야만 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시시덕댔지만.

* * *

“원래대로라면 따로 허락받지 않은 방문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저희들의 원칙이지만…… 그래도 잘생긴 오라버니가 두 명이나 오셨으니까 특별히 소녀가 힘을 써 보았어요.”

또각또각. 로키가 호호 웃으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니플헤임을 둘러싼 안개가 조금씩 걷혀 나갔다.

그러자 드러나는 광경.

그건 전부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풍경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섬처럼 부유하고 있는 땅을 따라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는 곳. 각각의 구획마다 사철의 예쁜 풍경이 꾸며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저절로 녹게 만들었다.

보통 악마가 사는 곳을 두고 마경(魔境)이라고 표현한다지만, 이곳은 언뜻 알려진 그런 곳들과는 이미지가 전혀 달랐다.

오히려 강제로 마음을 녹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나 그것이 오히려 연우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다가와서 거북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강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간간이 보이는 짐승들은 풀을 뜯거나 하늘을 날면서 마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르 인페르날의 악마들이 대개 인간의 형태를 띤다면, 니플헤임의 악마들은 짐승의 형태를 보이는 것 같았다.

로키가 니플헤임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댔지만, 연우는 전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니플헤임을 관찰하는 것 에만 집중할 뿐. 그리고 그건 니플헤임의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던지, 하나같이 간만에 찾아온 방문객인 연우를 탐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참 도도해도 너무 도도하다니까. 오라버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면 소녀가 오히려 오기가 생긴……!”

그러다 로키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뭐라고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별안간 저만치 떨어진 능선에서부터 거대한 늑대가 빠르게 달려왔던 것이다. 뜀박질을 할 때마다 땅이 쿵, 쿵, 하고 울릴 정도였다. 펜리르였다.

녀석은 로키의 앞을 휙 하고 지나치더니 갑자기 연우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킁킁거리면서 연우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얘는 아빠가, 아니, 엄마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니? 그것참.”

로키는 자신에게 일절 관심도 내비치지 않는 펜리르가 어이없다는 투로 투덜거리면서도, 신기하다는 듯이 펜리르와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자식들 중에서도 타인에 대해 가장 경계심이 많은 녀석이 난생처음 보는 이에게 호기심을 가지니 신기할 수밖에.

특히 펜리르가 니플헤임의 악마들 중에서도, 아니, 전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특별한 ‘감각’을 지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사람에게 뭔가가 있다는 걸까?’

아무래도 아가레스가 범상치 않은 손님을 데리고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로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애당초 장난기가 많은 그로서는 언제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아가레스가 이렇게 챙기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기에 더더욱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로키를 더 재미나게 만든 점은 펜리르의 외형만 보고도 겁을 먹는 신과 악마들이 즐비한 데 반해, 연우가 아주 편하게 그를 상대하고 있단 점이었다.

그러다 펜리르가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연우의 뒷덜미를 덥석 물었다.

순간, 녀석이 하는 꼴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바라보던 아가레스는 펜리르가 연우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기를 끌어 올렸지만.

오히려 연우가 손을 뻗어 그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펜리르는 자신의 등에다 연우를 태우고 있었다.

어쩐지 연우는 펜리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데리고 갈 데가 있는 거냐?”

으르르, 왕!

연우가 던진 질문에 펜리르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어딘진 모르겠지만, 가 보자.”

연우는 펜리르의 목덜미를 가볍게 손으로 쓰다듬었다. 펜리르는 기분이 좋다는 듯 꼬리를 가볍게 흔들더니, 자신이 왔던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냅다 뛰었다.

한순간 눈앞에서 연우를 잃어버린 로키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특히 아가레스는 분개한 듯 주먹을 꽉 쥐며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이 개새끼가!”

그러거나 말거나.

펜리르는 연우를 태운 채로 한껏 내달리고 있었다. 봄에서부터 겨울까지, 사막부터 빙산까지. 갖가지 구획들이 빠르게 연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다다른 곳은 높게 깎아지른 벼랑의 끄트머리였다.

왕! 왕왕!

아우우!

펜리르는 거대한 머리를 치켜들면서 뭐라고 자꾸 짖어 대더니, 크게 하울링까지 내뱉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

절벽 아래로 탁 트인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연우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아! 위대한 왕의 후예께서…… 예언의 계시대로, 바로 이 자리에 드디어 임하셨도다!』

평원의 한가운데에서.

헬이 양옆에 화롯불을 활활 피운 제단 위에서 크게 기도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오시리스가 강림합니다!]

[네르갈이 강림합니다!]

[태산부군이 강림합니다!]

[크시티-가르바가 강림합니다!]

……

[아이쉬마-다이바가 강림합니다!]

……

제단 앞쪽으로 속속들이 여러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강림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들을 이끄는 왕에 대한 경배이자, 충성 맹세였다.

이곳에서 맞닥뜨릴 거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연우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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