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신화 붕괴 (6)
“‘비탄에 찬 눈물’의 B7 부품은?”
“여기.”
“음. 사이즈가 조금 안 맞는 거 같은데? 여기 좀 깎아 봐.”
“저기요! ‘파열 제동기’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계세요?”
“그거 여기 있는데?”
“그걸 거기다 두면 어떡해요! 지금 엔진과 결합 요소를 연구해야 하는데!”
칠흑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헤노바와 아나스타샤를 중심으로 한 명장들의 작업은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라고 해 봤자 불과 12시간밖에 되질 않으니 어떻게 뭔가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수 있어도.
그전부터 연우가 헤노바와 함께 준비해 둔 부품들이 적잖은 데다가, 시간의 흐름도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보니 명장들이 체감하고 있는 시간은 벌써 며칠이 지나 있는 것과 똑같았다.
그동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피곤해하면서도, 잠들 새도 없이 계속 망치질을 해 댔으니. 하나 그들은 어째서 ‘명장’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라도 하듯, 내놓는 결과물마다 높은 완성도를 선보였다.
[불후의 명작, ‘시간의 지침’이 탄생하였습니다!]
[불후의 명작, ‘푸른색을 담은 옥구슬’이 탄생하였습니다!]
……
[명장들 간의 협업 체계로 인해 능률이 300%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불후의 명작이 연달아 탄생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입니다.]
[보정 효과로 명장들의 체력 회복 속도가 40%씩 빨라집니다.]
[정신력 소모 속도가 60%씩 감소합니다.]
……
[현재 탄생하는 작품들은 모두 세트 아티팩트입니다!]
[하나로 조합될 시, 강한 공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모든 신과 악마들이 신물로 특별히 탐낼 만한 물건입니다. 제물로 바칠 시, 해당 대상의 신력이 증폭되며 제작자들에게 아주 큰 축복을 내릴 것입니다.]
아나스타샤가 전체적인 공정을 지휘하고, 헤노바가 세세한 부분들을 도맡으면서 작업 속도와 퀄리티까지 전부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따아아앙!
헤노바가 곰방대를 질끈 깨물면서 망치를 내려쳤을 때.
[마지막 불후의 명작, ‘옥쇄원동파생기(玉碎原動派生機)’가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아아!
헤노바는 한껏 들이켰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덕분에 폐 속 깊숙하게 들어왔던 담배 연기가 주변에 자욱하게 퍼졌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모루 위에서 징징 울고 있는 원반에 고정되어 있었다.
“헤노바, 그것은……?”
“오! 드디어 완성한 겐가?”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이 부족했을 텐데. 역시 자네로군!”
주변에 있던 명장들은 헤노바가 완성한 것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하나같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만큼 지금 탄생한 물건은 여태 완성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스퀴테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품이었으니까.
하지만.
헤노바에게는 그런 칭찬들이 전부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옥쇄원동파생기]
종류: 보조
등급: 측정 불가
설명: 특정한 물건을 보조하고, 구동하기 위해 만든 장치. 막대한 신력을 감당하고 제어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술력이 접합되어 있어 외부에 공개될 경우, 수많은 신과 악마들이 대신물로 탐낼 만한 물건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구도는 그리 좋지 못한 듯하다.
“고작 일회용품을 두고 뭔 말들이 이렇게 많아! 다들 남은 잔업이나 마무리해!”
옥쇄원동파쇄기. 옥쇄, ‘옥을 부순다’는 말에 나와 있듯이, 스퀴테의 코어가 되어 줄 칠흑옥의 힘을 잔뜩 끌어낼 제어 장치였다.
이것을 구상하고 직접 제작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심력을 소모했는지를 감안한다면, 정말이지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현자의 돌을 만들었을 때는 시간적 여유라도 충분했지, 이건 그렇지도 않잖은가.
하지만 단언컨대, 이 물건은 현자의 돌보다도 훨씬 값어치가 있었다.
피조물들로서는 그 존재 여부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는 칠흑왕의 힘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장치다. 당연히 그만한 수고와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 헤노바와 명장들이 앞으로 평생 살면서 머리를 다시 맞댄다고 한들, 이보다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구도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 이 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구도를 신경 쓰면 칠흑옥의 힘을 제대로 뽑을 수가 없는 데다가, 오히려 스퀴테의 완성도만 떨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내구도를 포기하더라도 성능을 최고 효율로 뽑아내자는 게 명장들의 합의 사항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비록, 일회성에 불과하더라도, 헤노바는 자신 있었다. 이것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탑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문제는 이것의 주인이 될 놈이 영 무신경하다는 성격이지만.
“빌어먹을 놈. 예나 지금이나 실컷 부려먹기만 하지, 얼굴은 내비치지도 않고. 에잉.”
헤노바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곰방대를 손에 쥐었다. 뭔가 못마땅한 눈치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온통 다른 곳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곰방대 속에서 타들어 가는 담뱃잎만큼이나.
헤노바의 속도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0:59:47_88]
[0:59:47_87]
……
* * *
콰아아앙!
거친 폭발과 함께, 페렌츠 백작과 흡혈군주는 거칠게 튕겨나 지상에 겨우 착지했다. 그들은 온통 상처로 도배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쉽지…… 않군.”
쿨럭!
페렌츠 백작의 입술을 따라 피가 울컥 쏟아졌다.
“당신……!”
“아직은 괜찮다오. 아직은. 당신이야말로 어떠오? 방금 전부터 흡령마(吸靈魔)가 계속 흔들리는 것 같았소만.”
페렌츠 백작은 걱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흡혈군주를 잘 타이르면서, 그녀를 따라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검은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흡혈군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고개를 완강하게 털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페렌츠 백작은 그것이 아내가 부리는 객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올포원은 빛의 세계를 침범하려는 무수히 많은 신격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고, 도리어 본체를 내부에다 직접 강림시키면서 근원의 싹을 제거하고자 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근원의 싹은 연우였다.
지금은 칠흑의 세례를 받은 자신들이 어찌어찌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올포원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이미 신도들 중 상당수가 중상을 입어 리타이어된 상태. 사망자들도 적잖았다. 물론, 그런 이들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디스 플루토가 되어 다시 나타난다지만 그래도 올포원을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흡혈군주가 자랑하던 흡령마도 반 이상이 ‘찢겨’ 나간 상태. 빛에 있어 어둠은 천적이지만, 반대로 어둠에 있어서도 빛은 상성이 맞질 않는다. 연우의 신도들이 치명상을 입는 것도, 올포원의 그러한 빛을 이용한 권능 때문이었다. 사실상 체급이 맞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혈군주를 비롯한 이들은 올포원에 저항하고자 했다. 한 방. 어떻게든 딱 한 방이라도 먹이고픈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들 모두 올포원에 의해 강제로 억류되거나, 피했다 하더라도 한없이 도망만 쳐야 했던 삶들이 아니던가. 그 울분을 토해 내고 싶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렇기에 페렌츠 백작은 그런 아내의 오기를 만류하지 않았다.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건, 사실상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나 역시 아직 너끈하게 몇 날은 더 새울 수 있을 것 같구려.”
페렌츠 백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웃었다.
“우리 딸도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다시 한번 더 가 봅시다.”
저 멀리, 이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올포원의 본체가 있었다. 그 앞을 라나가 가로막고, 하늘에서는 거대한 몸집을 지닌 괴수가 주먹을 거칠게 내려치고 있었다.
『망자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죽음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리도 처절하게 싸우는가? 그대들은 자유의 항쟁이라 부르는 이 모든 시도들이, 실상은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인형으로 전락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콰르르릉-
그러다 갑자기 올포원의 일갈과 함께 터져 나온 빛무리가 괴수를 수도 없이 난도질했다. 몸집을 따라 균열이 거미줄처럼 잔뜩 퍼져 나가더니,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웬 중년인 하나를 이쪽으로 토해 냈다.
「아파용! 너무 아프답니당! 연약한 제가 감당하기엔 여기가 너무 난이도가 헬이라구용! 정말이지, 이런 무식한 곳에 약해 빠진 저를 던져 넣은 ### 님은 무슨 생각인 건지!」
토끼 귀를 단 스킨헤드의 흑인에게 연약이라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듯 보였지만.
라플라스는 여기저기가 쑤시는지 울상을 지으면서 민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페렌츠 백작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어느새 옆에 선 그에게 물었다.
“괜찮소?”
「그래 보이나용?」
“그렇지는 않은 것 같소.”
「그럼 이상한 거 묻지 말아용. 아파서 제대로 말할 겨를도 없으니까.」
“하지만 즐거워 보이오.”
「어째서?」
“웃고 있지 않소?”
라플라스는 그제야 손으로 제 입가를 매만져,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맞아용. 있는 거라고는 시궁창 같은 악취와 심심함밖에 없는 마해보단 여기가 나아도 훠어어얼씬 낫죵. 이 라플라스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답니당.」
“이미 죽었잖소?”
「그러니. 더 좋은 것 아니겠어 용? 홍홍홍.」
그렇게 웃는 사이에.
쿵.
쿵.
세상을 울리는 근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올포원은 라나도 크게 밀어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세상의 법칙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빛의 세계를 물들이려던 어둠을 이리저리 휘저어 대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손발에 사슬을 채우는가? 그러면서도 어찌 스스로 항쟁을 한다고 표현하는가? 결국 위치만 바뀌었을 뿐인, 헛된 되풀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올포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마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빛의 세계 곳곳에서 울리면서 그들의 귀에, 아니,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노라. 하지만 칠흑은 그것을 거슬러, 그대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자유를 되찾게 해 준다는 감언이설로 회유하여 오히려 노예로 삼고자 한다. 오히려 기약된 끝이 없는 영속(永屬, 영구한 속박)일 뿐인 것이다. 또한, 나에게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느냐? 그 역시 잘못되었도다.』
페렌츠 백작은 어쩐지 올포원의 목소리가 울분으로 가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 주지 못하고, 원망받기만 하는 사명을 되풀이하는 존재의 넋두리.
『위쪽은 그대들과 같은 피조물들을 그저 사육할 짐승으로만 여기는 신과 악마들이 사는 터전일 뿐이다. 그들을 막지 않고서야, 그들이 활개를 치게 내버려 두고서야, 피조물들은 언제고 영락을 거듭하기만 할 터. 절지천통(絶地天通)이 있지 않고서 결국 이 땅에 살아가야 할 피조물들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다.』
올포원은 어느새 그들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것을 두고, 페렌츠 백작은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 했다.
당신의 사명만 옳다 여기고, 자신들의 소망은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는 올포원의 편협한 생각에 대해 힐난하고 싶었지만.
『아니. 전제가 잘못되었어.』
페렌츠 백작 등이 나설 겨를 따윈 없었다. 그보다 앞서서 다른 이가 먼저 맞받아쳤기 때문이었다.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로.
휘휘휘!
페렌츠 백작 등의 앞으로. 올포원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차정우의 사념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올포원을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거지, 비바스바트?』
[0:45:66_92]
[0:45:66_91]
……
* * *
[0:39:78_87]
[0:39:78_86]
……
연우는 속속 나타나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이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날개를 완성했을 때, 내 존재를 감지한 거로군.”
『처음엔 저희도 긴가민가하였습니다만…… 왕께서 천마를 상대하시매, 그때 보이신 여러 이적들을 보고 그제야 저희들도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헬은 우아한 자태로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원래 시간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 하지만 어쩐지 내숭을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마를 피해 달아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엮인 사회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칠흑의 흔적을 읽은 이들도 적잖았을 테지.
그래도 아직까지 여러 사회들이 교류를 크게 가지지 않는 이 시대에, 이렇게 빨리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뜻은 하나.
‘역시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소속과 상관없이, 그들만의 결사(結社)로 묶여 있었어. 당연히 그 중심은 칠흑왕일 테고.’
아마 이들도 단순히 연우가 칠흑의 후예라는 이유만으로 충성을 결의한 것을 아닐 것이다. 천마와의 다투는 과정을 지켜봤으니, 충분히 믿어 볼 만하다고 판단했겠지. 연우로서는 살고자 발버둥 친 것이, 뜻하지 않게 새로운 기회로 찾아온 셈이었다.
연우는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이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간혹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개중에는 원래 시간대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아즈라엘도 있었다.
그들 각자가 주는 인상은 다 달랐지만.
느낌만큼은 똑같았다.
찰칵.
찰칵.
저들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신앙은 모두 자신에게로 연결되고, 신위는 톱니바퀴처럼 자신에게로 맞닿아 있었다. 연우라는 존재가 있기에, 저들의 존재도 성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올 걸 예언으로 알았다고 했지?’
계시록에 적혀 있었단 뜻이다.
‘칠흑왕은 내가 방문하리란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칠흑왕이 머나먼 꿈에서 넘어온 자신의 후예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세상에 빚어지는 모든 현상과 사실들이 칠흑왕의 ‘꿈’이라는 말처럼.
이 역시 칠흑왕이 꾸는 꿈 중 일부이기 때문에 알았던 걸까.
연우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완성되면서 자신에게로 쏠린, 세상 이면에 잠들어 있는 존재의 시선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칠흑왕은 자신이 처음 이 신화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단 것을.
후예가 어서 서둘러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칠흑왕이 잠든 곳이, 어디지?”
그래서 연우는 일부러 ‘그분’이니 ‘아버지’니 하는 존칭을 쓰지 않았다. 그런 존칭을 입에 올렸다간, 더더욱 강제로 그곳에 속박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칠흑왕이 흥미롭게 자신의 후예를 관찰합니다.]
헬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다 손을 흔들었다.
『길을 열겠나이다.』
그러자 연우와 죽음의 신, 악마들 앞으로 새롭게 포탈이 열렸다.
그 너머로 드넓은 우주가 드러났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우주 한복판이었지만,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칠흑왕이 잠든 장소에 다가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했던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반대로, 연우의 얼굴은 굳고 말았다.
그곳은 연우에게 너무 익숙한 장소였으니까.
태양계.
그중에서도 세 번째 행성인 푸른 별, 지구가 눈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