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신화 붕괴 (8)
칭호가 ‘후예’가 아닌, ‘분신’으로 점지되었다고?
연우는 쉴 새 없이 울리는 목소리에서 본능적으로 엄청난 위화 감을 느꼈다. 어쩐지 저것이 여태껏 고민을 반복하던 자신에 대한 ‘쓰임새’를 완전히 결정지은 듯한 뉘앙스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각기 떠들어 대는 목소리라 ‘한’ 존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마치 주인격이 깊게 잠들어 있는 것과 별개로, 제멋대로 활동하는 부산물 중 일부가 인격처럼 분리되어 활동하는 듯한 모습.
‘마성!’
그제야 연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바로 마성의 원본(元本)이라 할 수 있는 칠흑왕의 껍데기 중 하나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칠흑왕, 자체는 잠들어 있을지언정, 저것은 본체를 대신하여 그 의사를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잠꼬대. 저것은 칠흑왕이 잠결에 내뱉는 헛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시여!』
그때,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잔뜩 흥분한 채로 소리를 질렀다. 녀석의 목소리는 연우밖에 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의 목소리가 칠흑왕에 다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당신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을 따르던 자식들 중에서도 아무도 해내지 못한 것을, 나만이! 오로지 나만이 해냈습니다! 그러니 나를 당신의 곁에…… 옆에 있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눈을 뜨실 그때에 옆자리를……!』
깨어나라……
기어 다니는 혼돈이 ‘아버지’에게 쏟아내던 열렬한 구애는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새로운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연우를 둘러싸던 어둠이 모조리 부서져 내렸다. 내핵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연우는 어느새 격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백일몽이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존재감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웅, 우웅, 우우웅!
하지만 그의 손과 내핵 쪽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사슬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저쪽에서 별다른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치 꼭두각시 인형에 매달린 실처럼 느껴져 불쾌했다.
그러나 연우는 그런 점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격진(震)으로 인해 바다가 엄청난 높이로 출렁이고 있었다. 내핵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사념과 신력이 원시 지구를 뒤흔들어 놓았다.
[‘약속된 땅’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해수면을 가르면서, 육지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지구에 지반이 생기기도 전인 시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설마, 저것은……?』
『저것이 ‘그분’께서 깨어나시는 날에 떠오른다던, 그것인가.』
『모든 법칙과 신위가 무용(無用)으로 돌아간다던, 약속된 그날에나 나타나게 된다던 무위(無爲)의 옥좌(玉座)를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연우와 다르게, 칠흑왕의 사념을 도저히 버텨 낼 재간이 없던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상공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육지는 매우 컸다. 대륙이라 할 수 있을 만한 크기. 그것을 보는 내내, 그들의 두 눈에는 기이한 광망이 흘렀다.
무용과 무위의 옥좌.
언젠가 ‘그분’께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이 우주가 종말을고 할 때, ‘그분’께서 일어나 앉게 되신다던 옥좌가 바로 저것이었다.
후예께서 직접 찾아오시매, 드디어 눈을 뜨시려는 걸까.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그토록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니. 저건 육지가 아니야. 저건……!’
그러나 기대와 환희에 젖은 그들과 달리, 연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육지가 올라올수록 쇠사슬도 같이 딸려 가고 있었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 그렇기에 연우는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어쩌면 자신은 터무니없는 것을 자극한 건지도 모른다. 연우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바로 그때.
『키키킥. 그래. 그런 것이란 말이지. 진즉에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 넘어가고는 있었지만…… ‘아버지’, 당신은 결국 우리를 이런 용도로만 생각하셨던 겁니까? 나를 어여뻐하셨던 것도, 어쩌면 이렇게 이 ‘알’을 당신에게 언젠가 가져다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기어 다니는 혼돈이 미친놈처럼 혼잣말을 계속 되뇌면서 키득대고 있었다.
『좋습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구신다면. ‘아버지’께서 가정에 소홀하게 구신다면, 저 역시 비뚤어진 아이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둔한 아버지시여?』
그러다 무언가를 빠르게 판단 내린 기어 다니는 혼돈이 연우에게 말을 걸었다.
『눈치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연우는 어쩐지 기어 다니는 혼돈의 말투가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똑같은 어조였지만, 그 속에 깔린 감정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토록 좇던 존재에 대한 배반감과 회한이 녀석의 심정에 어떤 변화를 준 걸까.
‘그럼 역시.’
『그래. 저건 ‘살점’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우둔한 아버지를 이루던, 티끌만 한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세포이 기도 하지. 천마가 저것을 이런 곳에다 둘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이러니 여태 찾질 못했던 것이겠지.』
육지가, 아니, 대륙이 바다 위를 지나, 어느새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우르르!
동시에 지구도 더 요란스럽게 떨렸다.
아니, 지구를 중심으로 한 우주 전체가 울리고 있었다.
[공간이 함몰됩니다!]
[좌표가 삭제됩니다!]
……
[신화가 붕괴됩니다!]
[본 신화로 재생이 불가능한 존재가 나타나고자 합니다. 붕괴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경고! 어서 탈출하십시오!]
[경고! 어서 재생을 멈추십시오!]
[‘약속된 땅’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르’뤼에. 우리는 저것을 그렇게 부른다.』
떠오른 육지가 가진 영압이 엄청나 공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이리저리 왜곡되었다. 그러다 좌표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을 때, 육지를 중심으로 어둠이 먹물처럼 번져 나와 지구를 점차 물들이고자 했다.
[‘밤(녹스)’이 피어납니다!]
아. 버. 지.
아. 버. 지.
아. 버. 지.
당. 신. 을. 기. 다. 렸. 나.
우. 직. 한. 세. 월. 을.
우우우우!
점차 커져 가는 여러 목소리가 ‘밤’으로부터 구슬프게 이어졌다. 수백 개에 달하는 촉수가 다발로 튀어나와 육지를 붙잡기 위해 아른거렸다.
혼란이 샘솟았다. 무질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 세계의 법칙을 어그러뜨렸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음산한 감각이 울리면서 공포가 조금씩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우주가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죽음의 신과 악마들도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빚어지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데바’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올림포스’의 본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낮(에로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이상 현상을 감지하지 못할 신들이 아니었고.
그들은 천마와 다투던 것을 멈추고 앞다퉈 우주가 붕괴되기 시작한 지점을 쫓아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문에 지구를 짓누르는 압력이 더 강해져 이제는 행성이 붕괴될 우려까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구는 이미 임계점을 한참 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격진을 일으키는 것 외에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허……!”
특히 연우를 찾고자 발에 땀띠가 나도록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던 우라노스는, 이제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보고 허탈함에 젖고 말았다.
“우라노스, 아무래도 자네의 그 괴팍함은 대를 이어 가면서 제곱으로 늘어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바알은 쿠키를 한입 베어 물면서 옆에서 깐족거렸다. 어찌 보면 태연하다고 할 수 있는 태도였지만, 쿠키를 쥐고 있는 손은 요란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반쯤 해탈해 있었다. 메타트론만이 멍하니 하늘을 응시할 뿐.
“바알.”
“왜?”
“닥쳐.”
“…….”
그렇게 자잘한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쿠르릉!
[천마가 강림합니다!]
마지막으로 황금색 빛줄기와 함께 나타난 천마는 감상평을 딱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런…… 니미, 썅……!”
저것을 눌러 담느라고 내가 얼마나 뺑이를 쳤는데, 저걸 저렇게 꺼내 놔? 천마는 울컥하는 마음에 연우를 홱 하고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연우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어느새 눈치껏 연우 주변으로 모여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보니 천마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낮’의 세 수장들까지 어느새 연우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천마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진 캔처럼 더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영감! 영감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새끼 계속 내버려 둘 거야? 영감이 지키려던 걸 이렇게 깽판 놨는데도 계속 감싸고 돌 거냐고!”
“어쩌겠나. 새끼, 새끼 해도, 결국 이 새끼는.”
우라노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 새끼인 것을.”
“우라질!”
“자네도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다면서? 앞으로 계속 기르다 보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걸세.”
“됐고. 이것만 끝나 봐, 진짜. 다 뒈졌어!”
천마는 여의봉을 고쳐 쥐면서 시선을 육지 쪽으로 되돌렸다. 험 악한 말투와 다르게 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핵에다 단단히 짱박아 뒀던 ‘살점’이 자극을 받아 튀어나온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밤’이 확장되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밤’이 지구를 전부 먹어치우고, 종말이 내려앉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칠흑왕이 깨어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후우우……!”
천마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의봉을 세게 움켜쥐면서 어깨에 얹어 투창 자세를 갖췄다.
목표는 르’뤼에.
기회는 딱 한 번. 그 안에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칠흑왕을 다시 잠재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제야 좀 겨우 몸이 돌아오나 싶었는데. 또 한참 동안 반병신 신세로 지내야겠네.’
천마는 혀를 가볍게 차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화아아!
눈가를 따라 화안금정이 활짝 열렸다.
* * *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을 바라봅니다. 어서 저 ‘살점’을 취하라고 속삭입니다.]
르’뤼에에서는 지표면을 따라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하나둘씩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념이 똘똘 뭉쳐진 괴상한 생명체들. 충분히 세월을 먹고 자란다면, 언젠가 타계의 신으로 진화가 가능할 망량(觀極)과 요괴(妖怪)들이었다.
그것들이 대거 쏟아졌다. 밟고 지나는 자리마다, 스치는 공간마다 ‘밤’의 영역이 퍼져 나가면서 혼란을 더 크게 키웠다.
그리고 그럴수록. 르’뤼에로 연결된 쇠사슬이 팽팽해졌다. 칠흑왕이 이리 오라며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살점’들을 취해 네 것으로 삼으라고. 그리하여 자신이 잉태될 그릇이자 알이 되라고.
『저걸 취한다면, 그대는 진짜 우둔한 아버지의 분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운이 좋다면 제대로 된 자아 따윈 없는 아버지,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밤’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네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키득거렸다.
『물론, 그것을 두고 과연 ‘너’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논외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가지고 싶다면 가져라.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연우는 말없이 쇠사슬을 매만졌다. 여기서 이것을 잡아당긴다면, 그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하는 말마따나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죽음과 꿈,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진짜 칠흑왕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크로노스의 신화라는 한계를 넘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았나? 신화는 하나의 주제를 가진 이야기라고. 그 주제란 당연히 주체가 살아온 업(業)이고. 그래서 그 업의 마무리만 잘 된다면, 이야기도 통일성을 갖춰서 신화도 무사할 거라고 하였었지.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어느새 연우의 고민을 읽고, 새로운 호기심과 지식욕을 위해 속삭였다.
『그 업이, 기존의 업을 훨씬 뛰어넘는다면? 이야기의 새로운 끝이, 기존의 끝을 수용하면서도 훨씬 크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그 역시 새로운 신화의 완성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연우가 원했던 것은 칠흑왕을 깨워 천마를 붙잡아 두는 것으로 크로노스의 신화를 완성시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달성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새로운 선택지가 더해지고 있었다.
칠흑왕의 분신이 되는 것. 그 일부에 귀속되어, 새로운 마성(魔性)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화신(Avatar)이 된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칠흑왕이 원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존재가 삭제될 수 있고, 어떤 용도로 쓰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만.
연우에게는 그런 것을 감수할 만한 이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칠흑왕에게 귀속된 정우의 영혼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지금껏 오로지 그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고 달려왔기에, 연우로서는 섣불리 칠흑왕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였다.
어쩌면.
칠흑왕도. 이런 것을 계산에 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04:15_12]
[0:04:15_11]
……
『그대의 선택은, 무엇이냐?』
아주 잠깐, 연우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자신을 둘러싼 여러 시선들을 보았고.
“커져라, 여의.”
그사이, 천마가 있는 힘껏 여의 봉을 르’뤼에 쪽으로 던졌다. 여의봉은 순식간에 거대한 빛줄기가 되어 르’뤼에를 관통하고, 지구의 내핵에 다다랐다.
번쩍. 거기서 펴져 나온 빛무리가 ‘밤’을 비롯한 주변에 있던 모든 신의 사회들을 집어삼켰다. 그 안에는 연우도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아주 잠깐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빳빳하게 일어선 여의봉이 ‘탑’을 닮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크로노스의 신화가 모두 붕괴되었습니다!]
[재생이 중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