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신화 붕괴 (9)
『차정우.』
올포원은 호기롭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차정우의 사념체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비록 빛무리에 둘러싸여 있어 이쪽에서는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지만, 차정우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가녀린 아이야, 비키거라. 이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노라.』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속에는 애틋한 동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천리안〉을 지닌 올포원은 제자리에서 탑 내에서 모든 일들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동안 차정우가 얼마나 고된 길을 걸었고,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꿈을 되풀이하면서 큰 상처를 입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올포원은 되도록 차정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순리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성격상, 차정우의 사념체는 그런 순리를 거부하고자 하는 망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발악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제재를 가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저 사념체는 덧없이 사라지고 말 테니까.
하물며 이렇게 억지로 영체를 구현하고 있는 데야, 그만큼 한정된 사념을 계속 소모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엿 같은 소리를 잘도 하십니다, 비바스바트?』
하지만 차정우는 그런 올포원의 시선이 같잖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를 동경한 적이 있고, 그의 힘을 갈망하여 비밀을 풀어 내고자 한 적도 있었다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겉으로만 보이는 녀석의 허상에 끌린 것일 뿐, 사실상 다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올포원은 그에게 있어 적이었다.
자식을 구하고자 탑에 뛰어들었던 아버지에게 고난을 주고.
동생을 되찾고자 애쓰던 형에게 시련을 주었던 적.
그저 바라는 것이라고는 평화밖에 없었던 그들의 가족을 한데 모이지 못하게 만들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원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흡혈군주처럼 그로 인해 숱하게 많은 이들이 친지와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로 헛된 시간만을 되풀이해야 했으니.
녀석이 제아무리 어떤 원대한 이상을 지니고 있다 한들, 얼마나 대단한 사명을 간직하고 있다 한들, 절대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물론, 차정우는 자신이 올포원을 이기지 못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되던 꿈속에서는 진지하게 탈각을 궁리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어떤 시도를 하여도, 결국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결과 속에서 그것을 탈출할 방법으로 신격을 얻고자 하는 시도가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한 번은 무척 짜증이 난 나머지 올포원과 전쟁을 치른 적도 있었지만, 역시나 참패였다.
그러니 지금 나선다 한들, 심지어 원래의 몸 상태도 아니고서야 올포원에게 지고 말 테지.
하지만.
『그러니 그 엿 같은 짓거리, 이제 좀 그만합시다. 꼴사나우니까. 미리내!』
『날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다.』
차정우는 맞서기로 결심했고, 그의 외침에 따라 네메시스가 즉각 반응하면서 하늘 위에서 언뜻 나타났다가 공허 속으로 다시 묻혀 사라졌다.
화아아아-
‘꿈’이 번져 나갔다. 칠색으로 반짝이는 오로라가 올포원을 둘러싼 세상을 뒤덮으면서 팔각형으로 이뤄진 입자들을 하나둘씩 갖춰 나갔다.
차정우와 네메시스가 생전에 자주 구현하던 심상 결계, 〈환몽 세계(幻夢世界)〉.
차정우가 인지하고 있는 세계 속에 상대를 함몰시켜 빠르게 처치하는, 만통 특성에 특화된 결전기(決戰技)였지만.
『허튼짓이라는 것, 잘 알고 있을 텐데?』
올포원은 고작 이것으로 자신의 발을 어찌 묶을 수 있겠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발을 내디딜 때 환몽 세계의 성립이 정지되고, 두 번째 발을 내디딜 때 결계 표면을 따라 균 열이 가기 시작했다. 쩌걱, 쩌거걱. 올포원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77층에서 이런 짓거리는 되도 않는 힘의 남용일 뿐이었다.
『잘 알지. 그래도 이게 있어야, 아주 잠깐이나마 나도 제대로 발을 내디딜 수 있어서 말이지.』
하지만 차정우는 입가에 머금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설마?』
올포원은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던 걸음을 뚝 멈췄다.
『당신. 탈각과 초월을 아주 싫어하지? 순리에 어긋난다 뭐다 하면서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지만, 결국에 분수에 맞게 살라는 거잖아? 무지렁이는 그냥 무지렁이끼리 살라는 건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난 새끼가 그딴 말을 해 봤자, 헛구역질만 나거든?』
휘휘휘!
순간, 반투명했던 차정우의 사념체가 진짜 육체라도 얻은 것처럼 또렷해졌다.
찰나에 불과해도. 환몽 세계를 빌려 생전의 경지를 단숨에 복구한 셈이니까. 당장 탈각을 시도해도 모자라지 않을, 높은 경지를 개척한 성숙된 영혼.
『그러니까 그 싫은 거, 면상 앞에서 대놓고 해 줄게. 당신 앞에서 이렇게 막 나가는 새끼는 없었을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정우를 중심으로 막강한 돌풍이 불었다. 그리고 등 뒤를 따라 찬란한 배광이 쏟아지면서 환몽 세계와 함께 뒤섞여 올포원의 빛을 밀어 냈으니!
탈각.
차정우는 사념체라는 불완전한 상태를 벗어나,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자 하고 있었다.
이 순간, 격은 갖추었다.
신화가 될 업은 이미 넘쳤다. 무수히 많은 꿈을 반복하면서 겪은 생애들이 있었고, 이룬 업적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겹겹이 싸이고 또 싸여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이 되고 말았으니. 그 양만 따져도, 어떤 존재들이 오더라도 절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꿈속에서는 실패만 되풀이했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올포원에게 홀로 대적하겠다는 다짐은 그의 정체성이 되어 신위를 오롯이 세웠고, 신성은 이미 연우의 권속이 되면서 획득한 지 오래였다.
신격, 신화, 신위, 신성, 신령.
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다섯 조건들이 정립되는 순간. 차정우는 사념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온전한 육체를 갖출 수 있었다.
[삭제되었던 플레이어 ‘차정우’의 데이터가 복원되었습니다!]
[탈각으로 인해 ‘차정우’의 자격이 ‘반신(半神)’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시간의 태엽이 가호합니다.]
[죽음의 태엽이 축복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반신 차정우를 응원합니다.]
[초월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싸움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콰아아앙!
* * *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
원래는 ‘크로노스’라는 존재를 구성하던 신화가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무용과 무위가 그 빈 자리를 전부 채운 게 아닌가 싶던 그곳에서.
[‘시간의 태엽’이 정지하였습니다.]
[‘시간의 태엽’이 정지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계속 출력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마저도 전부 사라져야 했지만, 메시지가 계속 출력된다는 것은 시스템 체계가 계속 작동 중이란 뜻이었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
[오류를 감지하여 원인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결과값이 잘못 출력되었습니다.]
[결과값을 정정합니다.]
[크로노스의 신화가 ‘모두’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타이머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확인된 잔여 제한 시간은 2분 6초 4입니다.]
[크로노스의 신화 중 극히 일부가 생존하여 복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복구를 이루기에 기존 데이터의 훼손 정도가 심각합니다. 복구를 시도할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
[알 수 없는 힘이 콘솔 시스템에 해킹을 시도합니다. 데이터 복구가 시도됩니다.]
[중단된 크로노스의 신화가 재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째깍.
째깍.
어디선가 초침이 느릿하게나마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시간의 태엽’이 아주 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감기고 있습니다!]
화아아!
무너졌던 세상이 다시 꿈틀거렸다. 부서졌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 가면서 모양을 갖춰 나갔다.
마치 연우가 과거에 음령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신화를 낱낱이 해체하고 재조립하였듯이.
이번에는 크로노스의 신화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었다.
망가진 부분은 기존의 것들을 가져와 서로 잇고, 훼손된 부분은 덧칠하며, 엇나간 부분은 잘라 모자란 부분에 채워 넣었다.
연우는 반쯤 기능이 멈춰 있던 크로노스의 신화를 복구하다 못해 오히려 더 나은 형태로 강화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시계의 태엽이 조금씩 복구되고 있는 중입니다.]
[파손된 13번 톱니바퀴가 교체되었습니다.]
[훼손된 21번 톱니바퀴의 톱니가 수리되었습니다.]
……
[1,921번 톱니바퀴의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초침이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초침이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집니다.]
[제한 시간이 상승하였습니다.]
[타이머에 반영됩니다.]
[00:03:41_32]
[00:03:41_33]
……
무너진 신화를 복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아 올린 것 들을 전부 되돌아보면서 수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가이아의 저주는 오랫동안 숱한 신들에게 있어 공포로 다가왔다. 신화의 균형을 망가뜨리고서야 어느 누구도 거기서 온전할 수 없으니까.
‘낮’의 수장인 우라노스도, 신왕이었던 크로노스도 결국 가이아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황’에 다다랐던 무왕도 그렇지 않았던가.
하지만 연우는 하데스의 도움이라 하여도 가이아의 저주에서 무사히 벗어나는 데 성공해 항체를 얻었고, 음령을 이루면서 신화를 재정립하여 체질까지 바꿔 버리는 기염을 토해 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쥔 메스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고, 회복까지 끝마친 그에게 있어 크로노스의 환부를 찾아 정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셈이었다.
오히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어서 작업 속도는 훨씬 빨랐다. 당시에는 의식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 않은가.
하물며.
‘칠흑왕을 깨워, 분신이라는 칭호를 얻는다’는 막대한 신화까지 쌓은 데야.
불가능한 것은 절대 없었다.
[분침이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위도 온전한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시침이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훼손의 정도가 심각해서 크로노스도 결코 손을 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부분까지 모두 수리가 완료되었을 때.
[신위가 작동 중입니다.]
[완전한 신위입니다. 태엽이 그동안 상실했던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태엽을 강제로 작동시킵니다. 연료가 주입됩니다.]
[초침이 돌아갑니다.]
[분침이 돌아갑니다.]
[시침이 돌아갑니다.]
[시간의 태엽이 온전하게 작동합니다!]
[‘작은 굴레’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과부하가 무시됩니다.]
……
[죽음의 태엽과 시간의 태엽이 맞닿아 최대 출력이 이뤄집니다!]
영원토록 정지한 상태로만 있을 줄 알았던 두 개의 태엽이 다시 맞물렸다.
오랜만에 만난 두 신위는 마치 반갑다는 듯이 크게 공명(共鳴)했다.
[신화의 주인, ‘크로노스’가 복구되었습니다.]
[부활이 이뤄집니다!]
[‘크로노스’에 새로운 신화가 한 줄 더 추가됩니다. 자기 소생(自己蘇生)]
[어뷰저, ###이 눈을 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