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권
1화. 탈각(脫殼) (1)
쿠릉, 쿠르르-
콰르르릉!
올포원과 신들의 대립이 극한에 달하면서 77층이 한창 요동치던 그때.
츠츠츠-
통칭 하계라 불리는 아래쪽 층계에도 이상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저, 저게 뭐지?”
“아악! 이게 뭐야!”
“그림자가 전부 위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77층까지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한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올포원 레이드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한 신호탄이긴 하였으나, 사실 별다른 영향은 크게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올포원 레이드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탑 내 질서가 크게 바뀌리란 건 다들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랭커들이야 줄을 어디로 서야 할지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기느라 정신이 없을지도 몰랐지만.
절대다수를 이루는 나머지는 그저 ‘상위권이 크게 바뀌겠구나’하는 인식밖에 주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 77층은 천계만큼이나 멀리 존재하는 세계였고, 상위권이 바뀐다고 한들 결국 그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티야가 기존 8대 클랜을 모조리 부수고 단독 체재를 성립할 때도, 결국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잘한 불편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탑의 세계에서 분쟁이란 항시 있는 일이었고, 거기서 파생되는 일들에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1층부터 76층에 이르기까지. 층계 공략에 집중하고 있던 공략자들, 자기 단련에 집중하던 구도자들, 모시는 신이 별도로 내린 계시를 수행 중이던 성직자들, 새로운 아르티야를 꿈꾸며 야망을 태우던 군주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저마다 하던 일들을 모두 멈추고 기겁하고 말았다.
그들이 딛고 있던 땅을 따라 잔뜩 드리웠던 그림자가 본체로부터 뜯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주는 광경이었다.
제아무리 이적을 남발하는 마법과 주술을 옆에다 두고 산다지만, 그래도 그림자가 항상 주인을 따라다닌다는 ‘상식’은 깨지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림자들이 일제히 본체로부터 분리되려 하고 있으니……!
특히 그림자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저마다 본체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등 기괴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적용되던 막대한 인력을 거스르지 못했다. 뜯긴 그림자들은 공간을 타고 맹렬한 속도로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빨려’ 들어갔다.
플레이어들의 그림자는 물론, 스테이지를 이루고 있던 구성 요소들의 그림자도 전부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높다랗게 선 절벽의 그림자, 거목의 그림자, 바위, 풀, 벌레, 심지어 자잘한 모래 알갱이의 그림자까지, 빠짐없이 전부 하늘 쪽으로 단단히 뭉쳤다.
그야말로 경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기현상.
“…….”
“…….”
“…….”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르거나, 경악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입을 쩍 벌린 채, 그저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알고 있던 상식을 위배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의 법칙을 연구하고 조율하던 마법사와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역으로 거스르는 광경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심장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이상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러다.
츠, 츠츠츠-
각 하늘에 구체 모양으로 단단히 맺혔던 그림자 집합체가 점차 하늘을 따라 퍼져 나갔다. 빛으로부터 스테이지를 차단했다. 낮이었던 곳은 칠흑색으로 물들고, 밤이었던 곳은 달무리와 별빛이 전부 잠겼다.
그리고. 해와 달이 각자 보이지 않는 짐승에게걸스럽게 뜯어 먹히듯 조금씩 사라지다, 완전히 어둠에 가려졌다.
식(蝕)이 찾아온 것이다.
그 순간, 플레이어들은 기이한 감정이 어느새 가슴팍을 지나 등골에까지 번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느닷없는 오한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것이 숙였던 대가리를 치켜들었을 때, 모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스테이지.
그림자, 아니, 칠흑으로 잠식된 스테이지는 모든 생명체라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말았다.
1층부터 76층에 이르기까지. 하계의 모든 부분이 어둠에 잠식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칠흑왕이 스테이지를 굽어다 봅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머리 위로.
알 수 없는 내용을 담은 메시지가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 * *
[흩어졌던 어뷰저, ###의 정신과 육체가 재구성됩니다!]
연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왔나!”
“허허! 드디어 왔군! 생각보다 너무 늦어져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바깥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명장들이 안도에 찬 한숨을 내면서 연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예상보다 연우의 복귀가 늦어지자 노심초사하다가 이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쉰 것이다.
“고얀 놈.”
유달리 헤노바만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노려볼 뿐.
“죄송합니다.”
연우는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생각지도 못한 여러 일들을 겪어야 했다지만, 어쨌거나 늦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한시가 급한 이때, 예정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양치기 소년이 된 자신과는 다르게, 다른 명장들은 이미 제 할 일들을 모두 끝내 놓은 상태였단 점이었다.
곳곳에서 강력한 기질을 담은 아티팩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세상에 내놓는다면 하나같이 경탄을 부를 만한 신품(神品)들. 신물로 지정될 것은 물론, 시스템도 S급이나 EX급 등으로 판정 내릴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일개 ‘부품’일 뿐.
연우가 찾는 건 이것들이 아니었다.
“그보다…….”
“위쪽을 봐라.”
헤노바는 연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곰방대의 담뱃잎을 털어내면서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우의 시선이 저절로 위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휘휘휘!
부서진 검의 조각들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연우는 단박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각 난 크로노스의 신화들이 당신에게 자신들을 봐 줄 것을 요청합니다!]
부서진 비그리드의 조각들. 크로노스의 신화가 한 차례 붕괴하면서 비그리드도 똑같이 해체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비그리드는 ‘죽은’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막대한 신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질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분명 기질은 똑같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난폭하거나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향을 뗬다면, 지금은 한껏 정제되어 도도하고 힘차게 흐르는 큰 강을 보는 듯했다.
크로노스의 신화가 재정립되고, 시간과 죽음의 태엽이 모두 복구되면서 신력도 온전히 제 형상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연우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따라, 감응(感應)을 시도하면서 언령(言靈)을 부여했다.
“갖춰져라.”
크로노스가 자기 소생의 신화를 완성하고도 아직까지 비그리드가 복구되지 않았던 것은 마지막 한 조각이 부족해서였으니. 그 조각은 재정립된 크로노스라는 개념을 표현해 줄 만한 새 정의(定義)였고, 연우는 여기다 언령을 이용해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새 정의를 규정시키고자 했다.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정의가 규정되었습니다.]
[비그리드가 숨겨진 진명을 드러냅니다!]
화아아!
비그리드의 조각들이 재빠르게 합쳐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조각들은 별다른 혼란 없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는 순서가 전혀 달랐다. 완성된 형태도 달랐다.
[진명, ‘하르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떤 것은 대낫의 형태인 하르페가 되었고.
[진명, ‘게 불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진명, ‘듀렌달’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창의 형태인 게 불그가 되기도 했으며, 어떤 것은 장검인 듀렌달이, 칼리번이, 발뭉이, 미스틸테인이 되었다.
수도 없이 만들어진 많은 검들이 연우를 주변으로 뱅그르르 돌면서 춤을 춰 댔다.
[하르페의 신화, ‘페르세우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게 볼그의 신화, ‘쿠 훌린’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듀렌달의 신화, ‘롤랑’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조각 난 크로노스의 신화들이 일제히 당신을 응시합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비그리드가 품고 있던 진명의 본체였으며, 크로노스가 지구에서 전생을 거듭 겪으면서 쌓은 업의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이 전부 온전한 자아를 갖추었다. 비록 형상은 검이었지만, 그 위로 크로노스가 전생(前生)들에서 취했던 모습들이 일제히 환영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똑같이 자신의 막내아들이자, 유일한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모아 속삭였다.
어서 자신들이 쌓은 업을 계승하라고.
진정한 신왕으로 굴기하라며.
그리하여 그 영광을 세계만방에 위진시키라고!
“여기 있다.”
여기에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헤노바가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옥쇄원동파생기. 연우는 그것을 받으면서 품속에 있던 칠흑옥을 꺼내 그 속에다 끼웠다. 딸칵.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그런 소리가 났다.
“합쳐져라.”
지이이잉!
[옥쇄 현상이 발현됩니다!]
[칠흑옥이 신력을 방출하여 조각 난 크로노스의 신화들과 연결되었습니다!]
[결합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검들이 다시 조각 나 흩어지더니 칠흑옥을 중심으로 합쳐졌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혼란 따윈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명장들이 만든 신품들도 섞여 있었으니. 독립성을 갖춘 각각의 신화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유기적인 형상을 갖출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하여.
조각과 부품들은 한데 맞물리면서 성역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검의 형상을 갖추었고.
[진명, ‘스퀴테’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그리드가 새롭게 완성되었습니다.]
[보유된 업이 강화되었습니다.]
[보유된 업이 강화되었습니다.]
……
[모든 업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거대 신화를 구성합니다.]
[‘비그리드’의 이름이 ‘스퀴테’로 영구 변경되었습니다.]
[스퀴테의 신화, ‘크로노스’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크로노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이곳으로, 오라.”
마지막 언령과 함께 그것은 곧 기다렸다는 듯이 손잡이를 이쪽으로 향하면서 연우의 손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연우가 사용하기엔 너무나 큰 크기였지만, 어느새 손아귀에 잡혔을 때는 작은 크기로 작아져 있었다.
합일(合一)!
화아악!
크로노스가 전성기 시절에 자랑하던 힘이 연우의 체내 곳곳으로 쏟아졌다. 인지 영역이 확장되고, 세계관이 강화되었다. 연우는 자신이되, 자신이 아닌 새로운 힘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시간의 태엽이 당신을 시계추로 지정하였습니다!]
[시침이 돌아갑니다.]
[분침이 돌아갑니다.]
[초침이 돌아갑니다.]
……
[죽음의 태엽이 함께 작동하며 신위를 보강합니다!]
[신왕(神王)의 격(格)을 온전히 갖춥니다!]
시간의 태엽과 죽음의 태엽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동을 완성하였을 때.
크로노스는 온전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번쩍!
연우의 눈가 위로, 합일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칠흑색 안광이 치솟았다.
『아들아.』
연우의 머릿속에 울리는 크로노스의 목소리에는 강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마치 수백 명에 달하는 크로노스의 여러 자아들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네.”
『네놈이 내 신화 속에서 친 깽판에 대해서는 이따 이야기하자꾸나.』
크로노스는 조급함을 느꼈다. 이 영역 너머, 77층에서 탈각을 강제로 시도하는 차정우의 신력을 감지했던 것이다. 어떻게 올포원을 홀로 감당하겠다는 건지. 부활을 이뤘어도, 그것을 즐길 새도 없이 그는 여전히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은 네 동생부터 구하러 가자.』
연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손에 쥔 비그리드, 아니, 스퀴테를 휘둘러 77층으로 향하는 공허를 활짝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