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탈각(脫殼) (2)
“재미없군.”
비마질다라는 천천히 길을 거닐며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가 지난 자리. 수많은 신들이 줄줄이 추락하여 탄내와 피비린내가 짙게 났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시야에 들지 않으려 꼭꼭 숨고 있었다.
“이 몸을.”
그것이.
“이 몸을 달아오르게 해 줄 만한 분은 어디에 계신단 말이오?”
비마질다라를 더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탑에 갇힌 이래,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 동안.
그는 스스로가 아수라왕이었단 사실도 잊은 채, 줄곧 자기 수행만 거듭해 왔다.
언젠가 이 탑의 제약에서 벗어나, 천마에게 다시 도전장을 던지기 위해서.
사실 탑에 갇힌 것을 저주라고 여기며 천마에게 원한을 불태우던 다른 신이나 악마들과 다르게, 비마질다라는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탑에 갇힌 것을 내심 좋아했다.
폐관 수련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이곳만큼 외부의 방해 없이 단련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거기다 고개만 돌려도 제법이라 할 만한 존재들이 적잖게 있으니 심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강제로 대련 상대로 지목된 이들의 생각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 자신이 알 게 뭔가.
그는 오로지 싸움을 위해 살아온 존재였으며, 거기서 희열을 느끼고,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찾는 존재였다. 그리고 고된 고행(苦行) 끝에 쟁취하는 승리를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 천마를 꺾고 말겠다는 다짐은 그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원동력이 점차 힘을 잃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신 앞에 나타날 줄 알았던 천마는 ‘잠에 들었다’는 말과 함께 일절 천계에 그 모습을 내비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가 마음껏 뛰어다닐 무대라고 생각했던 천계는 언제부턴가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협정으로 분쟁이 뚝 그치고 말았다.
그 혼자서 아무리 날뛴들 여러 신과 악마들에게 두려움은 줄 수 있을지언정, 그가 원하는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비마질다라의 울분을 터지게 만들었다.
신과 악마는 절대 양립할 수 없을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고, 천계는 그들만 한 존재들이 갇혀 있기에 너무나 좁다. 누군가의 억압에 억눌려 있다는 것도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니 비마질다라로서는 서로 박 터지게 싸우길 바랐지만, 이들은 그런 자긍심 따윈 내다 버린 채 어느새 천계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저 되도 않는 자존심만 남아 피조물들 앞에서 으쓱댈 뿐.
비마다라의 눈에는 이 모든 게 같잖게만 보일 뿐이었다.
닭장 속에 갇혀 알이나 까는 닭.
좁은 우리에 갇혀 언제 처분될지 모르는 신세로 있는 돼지와 소.
가축.
딱 그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이라도 지펴 볼 수 있을까 싶어 어느 신의 사회로 홀로 쳐들어가 본 적도 있었으나, 저항할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네들이 하는 한심한 꼴을 보고 결국 칼끝을 내려야만 했다.
도저히 상대할 가치도 없었으며, 그런 놈들에게 칼을 휘둘러서야 자신이 쌓은 무(武)에 대한 치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마질다라는 그 뒤로 칼을 꺾었다.
못난 가축들이나 모여 있는 우리에서 칼을 들어 봤자, 결국 무의미한 헛손질에 불과할 뿐이니. 그딴 헛짓거리를 할 바엔 애당초 들지 않는 게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마질다라는 아예 천계에서는 등을 돌린 채, 그쪽으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은퇴. 그 후로 흐른 세월은 신과 악마들로부터 비마 질다라의 이름이 주던 무게도 조금씩 희미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찮게 그는 하계를 보게 되었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시간을 죽일 생각으로 보는 것이었으므로 별다른 기대 따윈 없던 상태였다. 심지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머지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차였다.
그때, 연우를 보았다.
죽은 쌍둥이 동생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놈.
사실 사연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탑에 입장하는 피조물들 중에서 그럴듯한 개인사를 간직하지 않은 존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과 안위 따위도 도구로만 여길 뿐이고.
때에 따라서는 초월자들과 거래도 하고, 적당히 공갈 협박도 일삼으면서 힘을 비축해 나가는 모습이.
어느 피조물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들을 기어코 연달아 해내면서 조금씩 전전하는 광경이.
‘투쟁’을 번갈아 하면서 끝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들이 그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그래.
저것이다.
내가 잊었던, 내가 그리던 모습이 바로 저것이었다. 비마질다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연우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거기서 강한 영감을 얻은 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쥐었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연우처럼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둘러싸던 모든 것을 내버렸다. 절교라는 소속도, 악마라는 신분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나는 비마질다라. 위대한 아수라의 왕일지니. 세상 무엇이 있어 나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마질다라의 이름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던 신들은 황급히 숨었다. 그가 약해졌으리라 판단하고, 명성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악마들은 모두 죽었다. 수백에 달하는 초월자들이 단칼에 도륙 났을 때, 천계는 다시 몸을 떨어야만 했다.
비마질다라는 그동안 검을 꺾었던 게 아니었다. 손에서는 놓았을지언정, 마음속에서는 항시 검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마질다라는 무사 수행을 빙자하여 천계 곳곳을 떠돌아 다녔고, 자신이 아직 건재하노라고 만방에 직접 알렸다. 여태 잠들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그리고 허기가 졌다. 긴 잠에서 깨어난 맹수가 빈속을 달래기 위 해 초원을 누비듯이, 그는 이 들끓는 감각들을 잠재워 줄 존재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그럴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바로 여기에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뚝!
비마질다라가 걸음을 멈춘 자리.
그 앞으로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막강한 신력의 폭풍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조차 검을 쥐고 있는 손길에 힘이 바짝 들어가게 할 만큼 날카로운 기질. 아무래도 자신이 바랐던 대로, 상대는 모든 힘을 온전히 갖추다 못해 그 이상의 것까지 이룬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존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 이름은 비마질다라.”
비마질다라는 움직였다.
“그대가 이곳에 임하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노라.”
콰르르릉-
쿠쿠쿠!
연우의 대답 따윈 필요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지금 이 희열을, 이 욕구를, 이 즐거움을 풀어내는 것이었으니까.
* * *
반신(Demi-God).
초월자도, 필멸자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탈각만 이룬 이 형태는 영혼이 완전히 성숙되면서 천천히 제 형태를 갖춰 가는 일종의 과도기라 할 수 있었다. 꽃으로 치면 천천히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였다.
신과 악마들에게는 반편이라 불리기도 한다지만.
그것도 탈각을 이룬 대상이 어떤 업을 이뤘는지에 따라, 어떤 격을 갖추려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많은 업을 기록한 차정우가 이룬 업과 이룰 격은 천계 내에서도 비견할 만한 존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쿠쿠쿠쿠-
차정우는 달렸다. 영체가 또렷해진 만큼, 체내에서는 웅혼한 힘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또렷해진 감각은 생전에 이룬 것보다 훨씬 높은 경지를 개척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콰아앙!
차정우가 내려친 검이 올포원의 손날과 부딪쳤다. 폭발한 힘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무얼 노리려는지는 잘 알 것 같다만, 허튼짓일 뿐이다.』
올포원은 짐짓 굳은 목소리로 일갈을 내지르면서 차정우를 힘껏 밀어냈다. 손끝에서 폭사된 수십 줄기의 광선이 차정우를 옥죄기 위해 덮쳐들었다.
차정우는 언젠가 헤노바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드래곤 슬레이어를 위로 쳐올렸다. 땅거죽이 강제로 일어나면서 광선들을 모조리 쳐 냈다. 토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퍼지고.
『어차피 너의 초월은 반쪽짜리에 불과하지 않더냐.』
쉭!
올포원이 바로 차정우의 뒤편에서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건 텔레포트나 블링크 같은 마법과 궤를 달리했다. 그저 공간을 ‘접어’ 이동한 것에 가까운 움직임. 올포원을 상징하는 대표 스킬 중 하나, 〈축지〉였다.
『그만큼 자격이 부족할 것이니.』
화아아아!
동시에 올포원의 손바닥이 벼락처럼 차정우의 등 쪽으로 닥쳐들었다. 한순간, 그의 손이 황금색 빛무리를 내뱉으면서 수십 배로 확장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대수인(大手印)〉!
[오류 발생! 초월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오류 발생! 초월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
[더 이상 초월을 진행하기엔 자격이 부족합니다.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춘 뒤에 다시 도전하십시오.]
[초월이 정지하였습니다!]
신격이란 것은 영혼의 정화(精華)다. 하지만 차정우의 사념체는 자격은 갖추었어도, 가장 중요한 조건인 영혼은 상실한 상태였으니. 당연히 초월을 완성하는 데도 조건이 미달일 수밖에 없었다. 올포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콰아아앙!
차정우는 기민한 감각을 이용,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재빨 리 드래곤 슬레이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무차별 난사〉를 이용해서 그간 메모라이즈 해 뒀던 마법들을 모조리 개방했다.
『뭐, 어쩌라고?』
개중에는 생전에 그가 익히지 않았던 권능이나 신권 급 마법들도 수두룩했다. 회중시계 속에서 반복했던 삶 중에는 마법사나 성직자로서 지냈던 것들도 적잖게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만통 특성을 가지고 있는 한 저절로 높은 경지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히 대수인의 충격파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한 일회용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에 차정우는 몸을 최대한 뒤로 빼면서 결전기를 뽑아낼 만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도 좋거든. 아버지도, 형도, 다 같이 웃으면서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하늘 날개〉
〈빛의 파도〉
『지구에서도 못한 걸 지금 하고 있는데, 당신이 뭔데 나더러 자격이 있니 없니를 판단해? 이 꼰대 같은 영감이!』
등 뒤로 그가 오래전에 완성했던 한 쌍의 날개가 달리면서 마력과 신력을 최대로 증폭시켰고, 그는 그것을 칼끝에 극한으로 압축시켰다가 그대로 터뜨렸다.
번쩍. 올포원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자랑하는 새하얀 빛무리가 황금의 광벽(光壁)을 그대로 횡단했다.
올포원이 다시 축지를 전개해 공격을 회피하고, 차정우의 사각 지대에서 나타나 대수인을 터뜨렸다.
어지간한 신격들도 쉽사리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맹한 일격. 올포원은 이것으로 차정우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저주받은 운명의 굴레로 인해 영혼도 잃은 아이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니까. 단, 탈각을 이룬 만큼 ‘감옥’에는 가둬 놓겠지만.
하지만.
차아앙!
차정우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측면으로 틀어 다시 한번 더 대수인을 튕겨 냈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 부자한테서 손 좀 떼 주지 않으실래요?』
무언가 이상하다.
올포원은 문득 그런 느낌을 받고 말았다.
분명히 초월이 정지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차정우를 둘러싼 신력이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격도 그가 이리 쉽게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웬만한 신격들 따위는 소멸로 이끌 만한 힘이었을 텐데……?
‘설마?’
그 순간, 올포원은 불현듯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말았고.
『이제야 알았어? 영감님, 참 소식 늦으시네. 요즘 세상은 얼리어답터의 시대인데, 그렇게 시대에 뒤떨어져서야. 쯧쯧!』
차정우는 이죽거리면서 다시 한 번 더 빛의 파도를 터뜨렸다. 수십 갈래로 나눠진 빛줄기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 다른 특징을 담고 있었다. 아니, 권능을 품고 있었다.
올포원은 황금색 빛을 사방으로 둘러치면서 빛줄기들을 일일이 치워 내는 한편, 〈천리안〉을 활짝 열어 77층이 아닌 78층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들어 그를 축출하기 위해 극도로 활성화되었던 여러 고대 신과 개념신들의 연결 고리가…… 모두 차정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제히레이터의 편린이 가호합니다!]
[운트세-캄블의 조각이 축복합니다!]
[제자노스의 파편이 은총을 내립니다!]
……
『이건 무슨……?』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도 아주 드문 고대신들이, 억겁의 세월이 지나 자아조차 희미해지고 만 존재의 편린들이 마치 사도에게 힘을 부여하듯이 차정우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존재들의 축복이라니!
마치 옛날에 연우가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제 육체에 오롯이 담아냈던 것처럼.
수천 개에 달하는 신과 악마들의 권능들을 한꺼번에 수용했던 것처럼,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차정우가 그릇으로써 담아내고 있는 존재들은 일반적인 신격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더 지고한 존재들이라는 점이었으니.
당연히 올포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릴 수밖에 없었고.
『놀랐지?』
차정우는 그런 올포원을 놀리듯이 이죽거렸다.
『그럴 수밖에. 나도 그랬는데.』
드래곤 슬레이어가 다시 빛의 파도로 물들면서 여러 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떨리는 검에서는 마치 용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 많은 아저씨들이 날 돕겠다는데 어째? 내가 ‘낮’의 정당한 후계자라나, 뭐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