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탈각(脫殼) (3)
『……‘낮’이라고?』
순간, 올포원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그를 중심으로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굴던 황금색 광채도 정지했다.
그리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차정우는 바로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전에 했던 말들 중 어떤 부분이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자극했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올포원이라는 존재를 알고 난 뒤 처음으로 보게 된 심적 동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걸 그냥 놓치고만 있을 차정우가 아니었다.
『‘낮’이란 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주던데. 이 아저씨들이 아저씨는 좀 싫어하나 봐?』
올포원의 속을 박박 긁을 요량으로 이기죽거리고선, 갑자기 드래곤 슬레이어를 뒤집어 그대로 땅바닥에다 내리꽂았다.
순간, 드래곤 슬레이어를 둘러싸던 오색찬란(五色燦爛)한 빛들이, 아니, 구색(九色)으로 빛나던 빛들이 지면을 따라 한껏 번져 나갔다.
그리고.
쿠쿠쿠쿠!
앞으로 길게 쭉 뻗은 빛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땅거죽이 거칠게 뒤집히고, 빛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결계를 한껏 휘저어 놓았다.
적, 청, 백, 흑.
사방(四方), 네 방위에는 각각을 상징하는 색채의 용이.
자, 녹, 남, 회.
사우(四隅), 네 모퉁이에는 사방의 색을 섞은 용들이 찬란한 숨 결을 내뱉었다.
그 용들은 전부 네메시스-전생에 미리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던 존재가 가진 것과 비슷한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황(黃).
중심이 되는 차정우의 발밑에서 가장 큰 용이 몸집을 일으켰으니.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빛의 입자들을 극한으로 압축시켜 빛은 것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다.
광룡(光龍).
정확하게는 아홉 개의 머리를 지닌 용이었다.
〈구두룡진(九頭龍陣)〉
차정우를 수호하는 아홉 고대신들의 힘을 각각 보유한 용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숨결을 내뱉었다. 비록 빛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하나하나가 영성을 띠고 있는 존재들.
하늘 날개를 통해 채널링이 개통된 아홉 고대신들의 힘을, 빛의 파도로 빚어낸…… 반신 차정우가 ‘낮’의 적통으로 인정받으면서 처음으로 창안한 권능이었다.
콰르르릉!
차정우를 보호하듯 파리를 튼 황룡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용이 일제히 차정우의 의식에 따라 용틀임을 시작했다.
『확실히…… 그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후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셈인가. 그래. 그렇군. 허허허…… 그대들의 선택은 그런 것이었나?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바드득.
빛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올포원이 분노를 겨우 억누르면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동안, 탑이 지속되는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내가 그대들에게 했던 설득은 결국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았구나. 이건 숫제 나를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일지니.』
번- 쩍!
올포원의 전신이 다시 화려한 배광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리고 그 화려함만큼이나, 올포원은 거세게 울부짖고 있었다. 더 이상 차분했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몸은! 나는! 증오하겠노라! 그리고 저주하겠노라!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조차 없는 옛 과거에 휘둘리는 망령들을! 피조물을 벌레로 여기는 신들을! 필멸자들을 유희거리로만 여기는 악마들을! 용을! 거인을! 초월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우리 따윈 의중에도 두지 않는 너희 모두를! 그리고……!』
올포원은 고개를 위로 한껏 들었다.
『나에게 이딴 저주의 굴레를 씌운 당신을!』
비록 이곳은 그의 심상 세계인지라 푸른 하늘 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올포원이 보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너머.
77층을 넘고, 78층도 뛰어넘으며, ‘미영역(未領域)’으로 분류된 8·90층대와 98층의 천계, 그리고 99층의 무관(無關)마저 아래로 둔 꼭대기 층에 앉아 있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는 지금쯤 그곳에 홀로 앉아서 이곳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든든한 배후라 여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가장 증오하는 존재.
『아버지!』
올포원은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런 부름에도 불구하고.
…….
하늘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런 메시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소!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 두시오!』
그러나 올포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질러 댔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금이라도 토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저주받은 일들이 끝나면, 반드시 당신을 찾아가리라! 그리하여 어떻게든 결착을 낼 것이오! 당신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하여도, 이제는 내가 열 것이오!』
‘낮’의 부활은 원래 올포원이 추구하던 목표였다.
‘낮’은 질서의 진영에 있어 중축이라 할 수 있는 곳. 우주 창생을 주관한 초대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탑이 세워지고 ‘밤’과 완전히 단절되면서 그 명맥도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메타트론이나 바알이 있다지만, 그들은 ‘낮’이 남긴 찌꺼기나 다름없는 존재들. 더구나 그들은 일찌감치 올포원과 등을 졌기 때문에 올포원도 그들에게 의탁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깊게 잠든 고대신들을 설득하고자 하였고.
거기서 다시 의견 대립이 생겨 무력 충돌이 빚어지고 말았다.
올포원이 ‘낮’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들의 힘이 탐나서가 아니라, 칠흑왕을 좇아 호시탐탐 이쪽으로 넘어올 기회를 엿보는 ‘밤’의 존재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우주 창생? 천지창조? ‘낮’과 ‘밤’? 그딴 게 다 알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네들의 일은 그네들이 다 알아서 하란 말이오! 어째서 거기에 힘없는 피조물들만, 필멸자들만 휩쓸려 다쳐야 한단 말인가!
-그대들은 생각이나 해 보았던가? 그대들이 유희라고 생각했던 것에 필멸자들은 다치고, 쓰러지고, 슬퍼하며, 죽소. 그대들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들 때문에 필멸자들은 가축이나 다름없는 세월을 반복하오.
-난…… 난 그 모든 것을 막을 것이오.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이 세상에서,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들이 피조물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그것을 지키는 것만이 내 사명일 것이오.
하지만 우주 창생에 관여하여 피조물들에 대해 가장 이해심이 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고대신들도, ‘낮’도 결국 일반적인 신격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올포원은 그 사실에 절망했고.
하늘과 땅을 갈라 신들로부터 인간을 배제시키는 절지천통의 업적을 세우고도, 이제는 방관자로 돌아선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렇기에.
올포원은 더 이상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그래도 약간이나마 가슴 한편에 미련을 두기도 했다.
77층에 눌러앉아서 내려오고자 하는 신과 악마들을 방해하고, 올라가고자 하는 인간들을 통제했다. 인위적으로 절지천통을 유지하고 있던 셈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여겼다.
이해 따윈 애당초 바라지 않았다. 그저 감내하고 또 감내하다 보면, 자연스레 질서가 정착되어 초월자들의 세계는 그네들만의 세계로, 필멸자들의 세계는 필멸자들만의 세계로 귀착될 거라 여겼다.
그런다면 더 이상 미련 없이 편히 스러질 수 있으리라. 그런 작은 소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움직이리라.
올포원은 그렇게 고했다.
더 이상 이곳에 앉아 있기만 하지 않고, 층계를 오르리라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신과 악마들을 모두 삭제하고, 천마의 위를 찬탈하여, ‘밤’의 존재를 직접 물리치리라고.
그래서 당신들이 말하는 우주 창생인지 뭔지 하는 것을 마무리 지어, 남은 미래를 피조물들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사라지겠노라고 포고하였다.
『이 몸이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지옥으로 갈 텐가.』
그 말과 함께.
쿵!
올포원이 한 발을 세게 내디뎠다.
순간, 그를 둘러싸던 세상이 정지하였다. 아니, 77층을 포함한 탑이 위치한 모든 공간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단단히 속박되어 꿈쩍도 않았다.
차정우도.
구두룡진도.
공헌치를 쌓던 신들도.
관전하던 악마들도.
신위도, 법칙도.
그 무엇도 예외는 없었다.
* * *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온전한 격(格)을 드러냅니다!]
[신위가 작동하였습니다.]
[시스템이 다운되었습니다!]
[탑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기능이 정지하였습니다.]
[효과가 강제 종료됩니다.]
[축복이 강제 종료됩니다.]
[가호가 강제 종료됩니다.]
이미 외부에서는 큰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신들이 열심히 싸우다 말고, 갑자기 거짓말처럼 뚝 정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건……?』
순간, 그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 군림보다! 이 상황에 천마, 천마가 나타난 건가……?』
『아냐, 이건! 기질이 달라. 올포원! 올포원이……!』
『녀석이…… 설마 천마군림보도 밟을 수 있었다고?』
[77층에 입장한 모든 신들이 경악성을 내뱉습니다!]
[77층을 관전하던 모든 악마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천마군림보.
천마로 하여금 ‘황’의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한 최고의 권능.
영역에 노출된 모든 것들을 정지 상태로 만들며,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속력은 더 커지고 마니, 수많은 신과 악마의 사회가 속절없이 탑에 갇혔던 것도 전부 이 저주스러운 권능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포원이 이것을 흉내 낼 줄 안다고?
여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들로서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고행(苦行), 또 고행이로다.』
올포원은 여태껏 숨겨 뒀던 비장의 패를 꺼낸 이상,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수비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격적인 성향을 내비쳤다.
그의 마음가짐에 따라 빛의 세계도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면서 뜨거운 고열을 내뿜었다.
그것은 태초에 있었다던 ‘시원의 불’을 연상케 했으니.
『천마군림보에 이어서 영혼석까지……?』
『올포원! 그대는 미쳤는가!』
『모든 것을……! 이 탑마저 전부 불태울 생각이냐!』
『대체 무슨 짓을!』
[77층에 입장한 모든 신들이 올포원에게 항의합니다!]
[77층을 관전하던 모든 악마들이 공포에 질립니다!]
[이상을 눈치챈 신들이 98층으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포탈 과부하로 인해 이동에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층계 이동이 마비되었습니다!]
『태우고 태워, 사르고 또 살라 무(無)로 돌릴지니.』
그런 비명을 무시하고.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되도다.』
올포원은 그동안 누적해 두었던 시원의 불을 방출시켰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크게 일어나는 불길이 모든 것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 불살랐다. 빛과 열이 스테이지를 빼곡하게 물들였다.
그 속에서는 어떤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매질인 공기마저 모두 태워졌기에 소리도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마군림보에 묶이고 말았던 모든 존재들이 그렇게 단번에 소거 되고 말았고.
[77층에 입장한 대다수의 신들이 삭제되었습니다!]
[클라우드 시스템의 기능 정지로 인하여 데이터 복원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생존한 신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생존한 신들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정신을 차린 신들이 재차 도주를 시도합니다!]
스테이지가 붕괴하고 말았다는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는.
천마군림보는 모두 ‘일곱’ 걸음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천마군림보’가 이어집니다!]
[주의하십시오! 새로운 폭발이 이어집니다!]
……
[세 번째 ‘천마군림보’가 이어집니다!]
……
[신의 사회, ‘멤파스’가 전멸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대파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
[신의 진영이 극심한 혼란에 잠겼습니다!]
[천계가 침묵에 잠겼습니다!]
[77층을 관전하던 모든 악마들이 아연실색합니다!]
[78층에 위치한 모든 고대신이 채널링의 강제 종료로 인한 패널티를 안았습니다!]
[76층 아래에 위치한 모든 사도와 성직자들이 채널링의 강제 종료로 인한 패널티로 혼란에 잠겼습니다!]
[신의 부재로 인해 신위로 작동 중이던 모든 법칙의 기능이 추가 정지되었습니다.]
[강제 정지로 인한 시스템 다운의 여파가 커집니다.]
……
[탑의 상태가 ‘혼란’으로…….]
[탑의 상태가 ‘공포’로…….]
[탑의 상태가 ‘마비’로…….]
……
주신이나 최고신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겨우 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할 뿐. 77층에 있던 다른 신들은 모두 시원의 불에 태워지고 말았으니.
과거 루시퍼의 환란 때보다 더 큰 피해가 펼쳐지고 있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78층으로 오르고자 합니다!]
[네 번째 ‘천마군림보’가 이어집니다!]
[시스템 다운으로 인해 중앙 관리국이 제재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올포원은 자신의 성역이 초토화된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태 수천 년 동안 미뤄 뒀던 ‘등정(登頂)’을 시도하였다. 그는 지나는 층계마다 가지고 있는 시원의 불을 모두 소모하여 스테이지를 모조리 불사를 참이었다.
그러던 그때.
[시간의 태엽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은 굴레’가 강제로 정지되었습니다.]
[네 번째 ‘천마군림보’가 정지하였습니다.]
[‘시원의 불’이 정지하였습니다.]
『이건?』
올포원은 78층으로 오르려다 말고, 갑자기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이질감을 느꼈고.
[‘작은 굴레’가 되감기됩니다.]
자신이 분명 천마군림보로 쐐기를 박아 뒀던 세계가, 다시 거꾸로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시스템 해킹에 성공하여 강제 부팅을 시도합니다.]
[종료된 클라우드 시스템이 재작동합니다.]
[백 서버(Back Server)가 이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