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81화 (681/862)

6화. 올포원 (2)

“…….”

탑 외 지역의 지상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드높은 상공 위.

하르모니아는 자신의 발아래에 깔린 둥근 ‘알’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 마치 조각을 한 것처럼 아름다웠고, 그것이 마치 인세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여 오히려 기괴함을 자아냈다.

‘알’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하여 여의봉을 먹어 치우고, 저 깊디깊은 공허에 묶여 심연에서 잠들어 있는 칠흑왕을 깨우는 것만 지상 과제였던 그녀로서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는 기뻐 보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알’의 표면을 따라 불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를, 아니, 이제 서서히 칠흑으로 변하는 검은 아지랑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오효효효. 평상시에는 커다란 곰 인형을 끌어안고 방긋방긋 웃으시더니. 그런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그렇게 차가운 표정만 짓고 계신가요?”

바로 그때, 뒤에서 괴상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르모니아가 이 일을 계획할 때 쉴 틈 없이 들어서 이제는 익숙해지다시피 한 웃음소리.

고개를 돌린 곳에, 이블케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서 있었다. 그의 시선도 온통 ‘알’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나온 거지?”

하르모니아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관리자는 탑에 귀속된 존재. 시스템에 종속되어 그 의지를 대변 한다. 일종의 처리 장치나 다름없는 것이다.

당연히 탑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서는 데이터가 완전히 삭제되거나, 보존되더라도 기억 장치가 없어 활동이 불가능할 테니까. 그렇기에 관리자는 항상 탑에서만 생활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깥에 나와 활동을 한다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관리직을 놓았거든요. 오효효!”

이블케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다시 기분 좋게 웃었다.

“원래 리더는 시기를 잘 읽고 몸소 낮은 곳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소통을 나눠야 하는 법이지요.”

하르모니아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굳이 묻지 않았다. 최초 관리자이면서, 탑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존재. 그의 정체나 기원을 캐내는 것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수상쩍은 점이 아주 많았지만, 하르모니아가 그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이블케는 세상 누구보다 탑, 그 자체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관리국은 엉망이지요. 사실 그냥 책상 위에 사표만 던져두고 나왔거든요.”

“…….”

가뜩이나 연우와 천계의 77층 침공으로 정신이 없을 텐데. 관리국의 수장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지 불에 보듯 뻔했다.

이블케는 아주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저것도 전부 계산하에 벌인 일일 것이다.

“오효효!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저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까지 내칠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랍니다. 외장 메모리에 관련된 힌트도 같이 남겨 두었으니, 그걸 푸신 분들은 따로 백업을 해 두시겠지요.”

쉽게 말해 추종자들 중에서도 실력 좋은 이들만 가려 뽑겠단 뜻이었다.

사실상 관리국은 결판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도 그만큼 제대로 작동하질 않을 테니 망가질 테고. 화신인 올포원도 신앙을 갈취당하면서 기능이 마비되었고, 연우도 해킹을 이리저리 시도했으니 사실상 마비 상태라고 봐야겠지.

‘신들이 더 난리를 치겠네.’

하르모니아는 어쩐지 천계에서 벌어지고 있을 모습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관리국은 먹통이며, 하계는 칠흑으로 잠식되고 있다. 올포원과 연우는 서로 부딪치고 있고, 그러면서도 천계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탑에 의해 가라앉아 있던 칠흑왕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 게다가 탑이 서서히 녀석에게 먹히는 꼬락서니를 보면서도 도망치지 못한다?

당연히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죽음’을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만 여겼던 존재들이. 하계의 벌레들만이 가지고 있다며 여겼던 것들이, 정작 그것이 그들의 문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는지.

그리고 그런 공포와 두려움은 칠흑왕의 기지개를 더 원활하게 만들 좋은 자극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다 곧 ‘꿈’과 함께 저물고 말 테고.

이 세계 전체가 칠흑왕의 꿈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다만,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더 많은 주신들을 ‘알’ 속에 다 던져 놓지 못한 것이랄까요. 차연우 님의…… 오, 이렇게 이름이 제대로 나오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여하튼 차연우 님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요.”

외눈 안경 너머로 이블케의 눈이 반짝였다. 튜토리얼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우가 벌여 왔던 여러 놀라운 일들이 있는 만큼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기대에 잔뜩 찬 눈빛이었다.

어차피 그로서는 저 빌어먹을 탑만 없앨 수 있다면. 하르모니아가 승기를 쟁취하는 것도, 연우가 반전을 벌이는 것도 다 좋았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허투루 날릴 수는 없겠지요.”

이블케는 잠시 고개를 들어 이곳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98층을 보았다.

하계와 달리 저곳은 아직까지 그림자가 차오르질 않아 여전히 시린 배광을 뿜어 대고 있었지만. 그것도 언제 꺼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저곳에서 제우스가 그와의 거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겠지.

“…….”

하르모니아는 더 이상 이블케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공통적으로 원하는 목적은 거의 이뤘으니, 이제부터는 각자가 개인플레이를 해야 할 때였다. 이블케가 다른 어떤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 한들, 그녀가 신경 쓸 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브라함…….’

그녀는 더 이상 보지 못할 누군가의 이름을 생각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번쩍!

순간, 그녀가 검은 빛무리에 젖어든다 싶더니, 폴리모프가 해제되면서 탑 외 지역을 전부 뒤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용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롸롸롸!

탑 외 지역이 들썩일 만큼 엄청난 포효를 터뜨리면서, 하르모니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부화 의식을 시작할 차례였다.

* * *

[알 수 없는 힘이 시스템에 대한 통제 권한을 획득하고자 시도 합니다!]

잘게 부서지고.

[제어 장치에 일부 침투하였습니다.]

[비교 기능이 감염되었습니다.]

[연산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

[판단 기능이 정지하였습니다.]

파훼되고.

[명령어가 무력화되었습니다!]

……

[중앙 정보 처리 장치의 무력화로 인해 정보 수집 및 해석에 막대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일시적인 네트워크 지연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수복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시스템 기능의 마비로 인해, 권능 ‘불사(不死)’가 불발됩니다!]

『으음……!』

올포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래서는 난감하다는 투.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신음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검뢰에 의해 왼쪽 팔이 잘려 나갔다. 아무리 올포원이라 하더라도, 통각을 전부 차단한 게 아닌 이상에야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

그러나 녀석은 그보다 더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분명히 자동적으로 이뤄져야 할 시그니처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권능, ‘불사’를 대신해 하위 스킬, ‘재생’이 발동되고자 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스킬, ‘재생’의 발동을 일부 저지합니다. 독소가 잔뜩 쏟아집니다.]

[스킬, ‘무채독’이 발동 중입니다!]

[‘죽음’이 이식되고 있습니다.]

올포원의 잘린 왼팔에는 배광이 더 이상 덮이질 못하고, 대신에 검은 그림자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안쪽으로의 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잘 되지 않을 거야. 괜히 당신의 그 엿 같은 시그니처 스킬들을 막으려고 온갖 고생을 한 게 아니니까.”

『……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였군.』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연우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올포원 레이드를 결심하고 난 뒤부터.

그리고 크로노스가 녀석에 의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무왕이 녀석을 뛰어넘으라며 유언을 남기고 난 뒤부터.

연우는 음검을 완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만 올포원 잡을 수 있을지를 수도 없이 연구했다.

다행히 녀석에 대한 데이터는 꽤나 많이 갖고 있었다.

동생이 회중시계에서 벌인 시뮬레이션에서 보았던 정보들이며, 아버지가 겪었던 경험들, 그리고 연우가 직접 창공 도서관에서 녀석과 겨루면서 체득한 것들까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략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음검을 이용해 시스템 해킹을 시도하여 번번이 권능 발동을 방해하고.

정보 공개를 통해 신앙을 갈취하며.

스퀴테를 완성해서 영체에 강제로 손상을 입혔다.

무채독을 이용해서 ‘죽음’을 강제로 이식시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신앙을 아무리 갈취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올포원이 그동안 탑에다 남긴 족적이 큰 데다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신화도 엄청나기 때문에 신체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다운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사가 불발되고 ‘죽음’이 호시탐탐 녀석의 목숨을 먹어 치우려 들 테니, 그것만 해도 뼈아픈 타격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강해.’

연우는 겉으로 여유롭게 웃은 것과 다르게 살짝 조바심이 났다.

분명히 여러 수를 사용해 이제 올포원과 대등한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있었다. 올포원이라는 신위도 한껏 크게 흔들어 놓았다.

여태껏 기나긴 탑의 역사 동안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룬 셈이었지만,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팽팽한 대치.

압도적인 승기가 아닌 것이다.

‘과연 천마의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쉽지가 않아.’

올포원은 신위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강했다. 제천류로 짐작되는 무예 실력도 대단했고, 간간이 발휘되는 천마군림보는 아주 위협적이었다. 괜히 그동안 랭킹 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올포원을 완전히 꺾어 탑을 부숴야겠다는 기존의 계획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문제는.

[시나리오 퀘스트(칠흑왕의 야욕 I)가 원활하게 진행 중입니다!]

[칠흑왕이 분신이 벌이는 대리전에 흡족해합니다.]

[천마가 가만히 대리전을 살핍니다.]

칠흑왕과 천마도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호시탐탐 자신을 부추겨서 ‘꿈’에서 깨어나려는 칠흑왕과 자신의 아들이 죽을 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는 천마.

둘 모두 그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거기다 하르모니아나 이블케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결국.

이 팽팽한 대치를 깨고 판을 이쪽으로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가 필요한 셈이었다.

‘역시…… 태극혜 반고검이 필요해.’

무왕도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음검이 있어야만 올포원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고, 태극혜 반고검이 완성되어야만 시스템도 완전히 부술 수 있을 것이라고.

〈양도(陽刀)〉의 유무가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양도를 익히지 못해.’

외뿔부족이 태양지체라는 특성을 타고나 음검을 익히지 못한 것처럼.

연우도 음령이라는 새로운 특성을 구축하면서 양도는 배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일종의 딜레마인 셈이었다.

‘차라리 탈각이라도 빨리 이뤄진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탈각이 이뤄지고 있는 중입니다. 24, 25…… 26%…….]

갈취하고 있는 신앙이 너무 많아서일까. 탈각의 속도가 너무 느렸다. 거기에 따라 7차 각성도 현저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

이렇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건…….’

연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젠장! 내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게 이렇게나 짜증이 날 줄이야……!”

판트는 칠흑으로 물드는 탑을 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무력한 자신의 꼴이 그저 한탄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더구나 그는 내심 찝찝한 부분이 있었다.

연우가 아직 태극혜 반고검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

무왕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없어서는 올포원과 시스템을 완전히 부수지 못할 텐데……!

그러던 그때. 그동안 말없이 옆에서 탑을 보고만 있던 여동생, 에도라가 나지막하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도와줄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

“뭔데?”

“내가 오라버니의 권속이 될 수 있게 도와줘.”

“그게 무슨 헛소리야!”

판트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고 말았다.

연우의 권속이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그 뜻은 단 하나였다.

죽어서 연우의 그림자에 귀의하겠다.

“냉정하게 생각해. 양도를 익히지 못한…… 아니, 익힐 수가 없는 오라버니가 양도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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