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82화 (682/862)

7화. 올포원 (3)

“그리고 내가 없어진다면 10층의 랭킹도 오라버니에게로 갈 테고. 그렇다면 더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현재 연우가 하계에서 유일하게 1위를 못한 층계가 있었다.

10층.

백색 세계에서 문을 따라 길을 찾는 시련을 갖고 있던 그곳은 에도라가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혜안〉을 이용한 결과였다.

에도라는 그것을 연우에게로 헌납해서 하계의 모든 순위를 1위로 통일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통합 랭킹을 홀로 쥐고 있는 마당에 아주 사소한 차이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정도라도 판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뿐만이 아니다.

에도라가 연우의 그림자 속으로 귀속될 수 있다면, 양도를 이루는 모든 데이터도 연우에게 고스란히 넘기는 게 가능해진다.

양도의 기초 구성이 되는 혜안을 시작으로, 그동안 에도라가 정리해 뒀던 모든 것들을 연우가 얻을 수 있다면 태극혜 반고검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연우가 직접 펼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에도라가 권속으로 있게 된다면 강제로 틀을 맞출 수는 있을 테니까.

“어차피 죽어도 오라버니 옆에서 사자 소환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거니까. 그리 나쁠 것도 없잖아.”

에도라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판트를 바라봤고.

“헛소리 마라.”

판트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짧게 일축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나더러 직접 동생을 희생시키라고? 너 어디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았냐?”

“냉정하게 판단해. 오빠는 내 혈육이기에 앞서 일족의 왕이야.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서는……!”

“아니. 나는 일족의 왕이기에 앞서서 네 핏줄이다. 가족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일족을 경영해? 대의를 위한 희생이니 뭐니 하는 같잖은 소리 할 거면, 이 일 끝날 때까지 영감님한테 부탁해서 너부터 감금해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

“하여간 평상시에 혼자서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꼭 이럴 때만 나사가 빠져 갖고는.”

판트는 에도라를 아예 대놓고 무시해 버렸다.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에도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라고 해서 어찌 죽고 싶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장 연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은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저 안으로 새겨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될 텐데…….’

에도라의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

“요는 양도에 대한 정보를, 저 이상한 ‘알’ 안쪽으로 새겨 넣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건가?”

뒤에서부터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남매에게 들렸다.

언젠가는 좋아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목소리.

판트와 에도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녹턴이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 * *

[시간의 태엽이 한없이 느리게 감깁니다!]

외부 시간이 느려지고, 사고 세계는 빨라졌다.

올포원이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연우는 크로노스와 새로운 공략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너 설마 며늘아기를 잡아먹겠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연우의 머릿속을 울렸다.

‘아버지.’

『왜?』

‘드디어 노망나셨습니까?’

『이 새끼가 아버지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멀쩡하시다면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잖습니까.’

물론, 연우라고 해서 에도라의 권속화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림자에 귀속된다는 건, 그 영혼이 가진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는 의미.

즉, 양도와 음검을 합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떠올리자마자 즉각 폐기했다.

‘더 이상 희생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희생되었던 아버지와 동생을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또 다른 아픔을 겪기는 싫었다. 당시에는 힘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지금도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긴. 너는 좀 이상한 데서 멘탈이 유리였지.』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보통 이만한 힘에 취하고 나면, 신이는 악마는 누구나 점차 감정을 상실한 괴물이 되기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주신들이 그러했고, 크로노스 역시 신왕 시절에 그러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결의 따윈 모두 잊은 채, 권력만을 탐하는 기계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마음가짐의 차이라 하더라도.

크로노스는 그런 아들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네 음험한 성격에 저 치를 상대할 방법을 전혀 생각지 않았을 리는 없고. 뭐냐, 방법은?』

음험한 성격이라니. 연우는 대체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박혀 있는 것일까 싶었지만, 굳이 딴죽을 걸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버집니다.’

『나?』

‘예.’

『내 신화를 믿는다는 거군.』

크로노스는 단숨에 연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지구에서 만 년에 가까운 세월을 무수히 전생(轉生)하면서 수많은 영웅들의 업적을 터득해 왔다.

그러니만큼 기초가 탄탄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양도를 익힌다면 그만한 적격자도 없는 셈이었다.

자신이 익힐 수 없다면 아버지에게 대신 배우게 하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연우는 합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다면 자신의 음검과 아버지의 양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태극혜 반고검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공이라는 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인 것 같더라만.』

다만, 크로노스는 조금 난감한 기색을 뗬다. 그라고 해서 외뿔부족의 비전인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익힌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무공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외뿔부족이 괜히 한때 지고종(至高種)으로 분류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로서는 무공을 개조하다 못해 이제는 창안하고 있는 연우가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난 거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최고 반열이라 할 수 있는 걸 이런 단시간에 배우라 한다는 건…… 힘들지 않을까?』

네 스승도 결국 완성하지 못한 걸 대체 나더러 어떻게 단시간에 익히라는 거냐. 거기다 체질이나 특성도 다르지 않으냐. 크로노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아뇨. 됩니다.’

연우는 단호했다.

『음? 허! 평상시에는 버릇없던 네가 이 아비를 사실은 얼마나 속으로 흠모하고 존경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그처럼 쉬웠으면 진즉에 이 아비도 무공을 배웠을……!』

‘아버지의 신화를 다시 쌓은 사람이 저라는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너, 설마?』

‘양도를 배울 수 있는 자격은 이미 만들어 두었습니다.’

『……!』

크로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다 무슨 짓을 해 버린 건지!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연우는 영혼을 새로 정립하면서 음령을 갖출 정도로 이미 음검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가졌다. 그렇다면 이때의 방식을 이용해 스퀴테를 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단 뜻이었다.

이걸 두고 이제 자신을 양령(陽靈)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양도(陽刀)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곧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나에게 며늘아기 일족의 특성을 부여했다고 해도, 그걸 발현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일 텐데?』

양도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도, 정작 펼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일 테니까.

‘양도를 전부 다 펼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일 합(一合)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일 합? 음! 하긴 그 정도면 해 볼 만할지도…….』

양도를 연속으로 펼쳐 내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펼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수많은 전생을 통해 쌓은 깨달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 어떻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냐?』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음?』

연우의 말에 크로노스는 도저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계속 패배자로 남을 거면 그냥 그렇게 남아. 하지만 스승님의 제자로 남고자 한다면, 일어서.

녹턴은 빙왕, 트와이스와 함께 무기력한 은거 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서신을 받고 말았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

대체 누가 놓고 간 건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만약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을 쉽게 벨 수 있었을 거란 섬뜩한 생각을 하면서도.

녹턴은 그걸 보고 누가 남긴 메시지인지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연우였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 자신은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에 불과할진대.

소중한 스승을 앗아 간 놈팡이일 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하지만.

녹턴은 굳이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빙왕과 트와이스는 곧 죽을 사람처럼 굴던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겨야 할 일이기에 옆에서 응원했다.

녹턴은 검을 쥐었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77층에서 올포원 레이드가 시작되었다는 빙왕의 말을 듣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우리…….”

“음, 그래. 아무래도 누울 자리를 찾아온 것 같구나.”

녹턴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던 빙왕과 트와이스는 이쪽으로 쏟아지는 외뿔부족의 살벌한 시선에 한없이 쭈뼛거려야만 했다.

그들 역시 아무리 하이 랭커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서운 건 무서웠으니까.

특히 새로운 왕이라던 판트는 당장에라도 그들을 찢어 죽이겠다는 투였다.

“네놈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온 거지? 그새 뒤지고 싶어져서 모가지라도 내밀러 왔나?”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녹턴은 살기를 느끼면서도, 고요한 눈빛으로 에도라를 보고 있었다.

“나 역시 한때는 스승님으로부터 태극혜 반고검을 익히도록 훈련을 받았으니, 대략적인 구결이나 운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혜안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니 양도가 아직 정립되질 못했었지. 반면에 그 심득(心得)은 너만 갖고 있는 것이고. 안 그러나?”

판트가 도중에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둘 사이에 뛰어들었다.

“파문된 주제에 어디 함부로 그딴 말을 들먹이는 거냐! 다시 한 번 더 스승 운운을 하면 주둥이부터 찢……!”

“오빠.”

“그래. 에도라야. 심장이 막 벌렁벌렁하지? 어서 저놈을 내가 치워 줄…….”

“좀 닥쳐.”

“……응?”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좀 닥치라고.”

“…….”

판트는 에도라의 살벌한 말에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싸늘하게 굳은 에도라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에도라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녹턴을 잔뜩 노려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그 심득, 나에게 일러다오.”

“그 뒤에는요?”

“말했잖나. 저 안에다 새기겠다고”

“그게 가능할……!”

“가능하다. 검흔(劍痕) 안쪽에다 의념을 새겨 넣을 거니까. 저치 정도 되는 이라면 금세 그걸 알아볼 수 있을 테지.”

“…….”

“어차피 나는 음령도, 태양지체도 아니니 심득을 얻는다고 해도 쓰지도 못해. 그러니 맡겨 봐도 손해는 안 볼 텐데?”

〈신안(神眼)〉

에도라는 영매가 되면서 터득한 눈을 활짝 열어 녹턴을 면밀히 살폈다. 거짓 여부를 따질 때마다 답변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심득을 전달할 수 있나?」

-참.

「정말 사사로운 이용은 안 될까?」

-참.

「혹시 다른 꿍꿍이는 없는 걸까?」

-없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그럼 여긴 왜 온 거지?」

-알 수 없음.

녹턴은 분명히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도움이 된다면 써먹어야만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단, 만약에라도 오라버니에게 허튼짓을 하신다면……!”

“어차피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데, 그런 짓을 했다가 정말 죽으려고?”

녹턴은 이미 자신의 주변을 에워싼 대장로와 부족원들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에도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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