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올포원 (4)
에도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녹턴의 얼굴이 시시각각 기묘하게 변했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
녹턴 역시 한때 무왕 아래에서 태극혜 반고검을 수련해 왔고, 비록 파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검을 단련하는 것을 절대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무왕과 상대할 때에 탈각과 초월까지 보이려 하지 않았던가. 비록 무왕이 그것을 강제로 끊어 버리긴 했다지만, 그래도 지금도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놓아 버렸던 검을 다시 쥐었고, 에도라로부터 새로운 심득을 얻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녹턴은 심득을 연우에게 전달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만큼 에도라의 심득은 그에게 있어 신천지(新天地)였고, 별세계(別世界)였다.
그동안 무의 끝자락을 어느 정도 봐 왔다고 자부했음에도 도저히 생각지 못한 새로운 우주를 본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얼마나 협소하고 왜소한지를.
그동안 얼마나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녹턴은 언제부턴가 눈을 감고 가만히 뭔가를 되뇌었다. 정리하고 또 정리하면서, 기존에 자신이 터득한 심득과 비교하여 세계관을 마구잡이로 확장시켰다.
에도라가 설명을 끝낸 뒤에도 한참 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다가.
번쩍!
눈을 뜬 순간, 눈동자 위로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살짝 말려 올라간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삭막하기만 하던 이전과 다르게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양도란 것은 세계를 작동시키는 틀에 맞춰서 나를 재해석하고, 거기에 맞게끔 하나의 부품이 되는 과정인 거로군……. 그래서 세계의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필요로 하는 거고. 그렇게 이해했는데 맞나?”
의념을 외부로 방출해서 강제로 세계의 틀을 조작하려는 음검과는 아주 대조될 수밖에 없겠어. 녹턴은 그런 뒷말을 붙였다.
에도라가 여기에 뭐라고 답하려 했지만, 녹턴은 손을 뻗어 그런 에도라의 말을 막았다.
“아니. 이 뒤는 안 듣도록 하지. 그래서는 지금 겨우 정리한 것이 흐트러질 것 같으니까.”
녹턴은 음검의 무론(武論)을 중심으로 양도를 해석하여 연우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다. 그래야 그가 훨씬 수용하기 편할 테니까.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군.”
그리고 녹턴은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그를 노려보던 판트며 부족원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들을 따라 흐르던 공기가 이질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대장로는 그 속에 살의가 없다는 것을 읽고, 어서 물러나라며 손짓을 했다. 부족원들은 하나같이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도, 지시대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녹턴을 위한 공터를 만들어 주었다.
“인생을 제멋대로 살기 바쁜 나나 막내 사제에게는 양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녹턴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검이 햇살에 부딪혀 찬란하게 빛났다. 분명히 몇 년이 넘도록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때가 타고 날이 잔뜩 빠져 있는데도, 어쩐지 새것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무량(無量)…….”
판트는 그것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무량검. 언젠가 무왕이 떠난다고 의사를 밝힌 녹턴에게 파문을 선언하면서 작별 선물로 주었던 검.
판트는 무왕이 그것을 만들기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면서 얼마나 많은 장인들을 채근했는지, 그리고 그 틀을 잡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녹턴은 그런 무량검을 세게 쥐고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아무런 예비 동작도, 징후도 없는 걸음에 불과했지만.
무심하게 무량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긋는 순간, 세상이 떠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음?”
대다수의 부족원들은 뭔가를 본 것 같은데,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데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
여전히 신안을 열고 있던 에도라는 눈을 크게 떴으며.
“…….”
판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대장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망할 나유 녀석이 돌아와 검을 나눈다면, 그것을 받아 낼 수 있는 건 저 아이밖에 없을지도…….”
뜻은 연우에게로 전해졌으되.
무(武)는 녹턴에게로 향하였구나.
대장로는 곳곳에 남아 있는 무왕의 흔적들을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검(心劍).
검을 쥔 무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닿고 싶어 한다는 경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 * *
『그 생각해 뒀다는 게 대체 언제 오는……!』
크로노스는 올포원과 팽팽하게 부딪치다 말고, 갑자기 이곳으로 강하게 엄습하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말았다.
공간과 공간의 단면을 자르듯이 훅 들어오는 일격이 너무나 섬뜩 할 정도로 날카로워서, 저 선상 위에 놓였다간 제아무리 신격이라고 해도 영혼이 그대로 단절되고 말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있는 곳이 빛과 칠흑이 호시탐탐 서로를 잡아먹으려 얽혀 드는 성역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공격은 절대 경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왕의 격을 복구해서 전성기 시절로 부활했다고도 할 수 있을 크로노스조차도 놀랄 만한 공격인 셈이었다.
이런 건…… 무왕이 초월을 이루기 전에 보였던 일검과 아주 비슷한 것 같은데.
하지만 이상하게 그곳에 살의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늦게 연결된 아들의 의식이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이 바로 연우가 준비해 뒀던 것임을!
『이게 무슨……?』
반면에 전혀 아는 바가 없던 올포원으로서는 경악에 찬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것은 그 자신이 이루었던 기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무왕의 업이 얹어져 있었다.
그게 사뭇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촤아아악!
연우와 올포원이 부딪치려다 말고, 도중에 서로 방향을 꺾어 지나간 자리 위로 한 줄기 선이 길쭉하게 그어졌다.
빛과 어둠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정중앙에 틀어박힌 거대한 검흔(劍痕).
하늘에서부터 대지에 이르기까지, 아주 길쭉하게 남은 검흔은 공간 자체에 깊게 박힌 나머지 빛과 어둠이 어떻게든 지워 보려 하는데도 절대 꿈쩍 않았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현상이었다.
세계의 법칙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렬한 의념이 세상에다 강하게 남긴 흔적.
거기서 풍기는 수많은 의념들에.
『허……!』
올포원은 무왕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아 탄식을 흘렸고.
『호오.』
크로노스는 탄성을 내뱉었으며.
“……왔군.”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자에게 맡기길 잘했어. 이렇게 나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녹턴은 생전에 무왕도 인정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검을 다루는 솜씨는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세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무학에 대한 깊이가 남달랐다는 뜻이었다.
연우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녹턴을 통해 양도를 전수받고자 했다. 그라면 음검과 양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재해석하여 보다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자신에게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무왕을 사라지게 만든 주범이니만큼 다시 가까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 머릿속이 냉정해지고 나서는 무왕의 뜻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가짜’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정신적 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진짜’인 그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완전한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그것이 스승님의 유언이었으니까.’
다행히 녹턴은 연우의 자극에 맞춰서 다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검을 쥐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손은 검을 그동안 놓고 있었을지도 몰라도,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버지.’
『왜 그러냐.』
‘이 정도는 보실 수 있으시겠죠?’
『흥. 너는 이 아비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구나. 당연히.』
크로노스가 차갑게 웃었다.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지.』
크로노스가 아무리 무공의 무자도 모른다고 해도, 오랜 세월 동안 영웅의 신화를 쌓은 만큼 기본적인 개념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녹턴이 남긴 검흔은…… 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의념을 읽을 줄 아는 경지의 고수라면, 누구나 세계관이 확 트일 수밖에 없는 높은 길이 제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양도에 대한 심득일 뿐만 아니라, 녹턴의 모든 것이 담긴 정수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깊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그것을 제 식대로 빠르게 해석할 수 있었고.
화아아!
이를 바탕으로 양도에 필요한 기초적인 모든 과정을 빠르게 끝 마칠 수 있었다.
휘휘휘휘!
물론, 그건 완벽한 양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녹턴이 정보를 전달한다고 해도 이는 왜곡될 수밖에 없고, 크로노스도 자신의 시점에서 어느 정도 왜곡해서 듣게 될 테니까.
애당초 연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양도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한 번. ‘일 합’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스퀴테는 여태껏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빚어낼 수 있었다.
[스퀴테가 알 수 없는 힘을 구현합니다!]
스퀴테를 중심으로, 강풍이 시계 방향을 그리면서 빠르게 회전했다. 크로노스가 여태 줄줄이 내뱉던 사념을 세계의 틀에 맞춰서 바꾸게 되자, 저절로 법칙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회전하기 시작한 강풍은 하늘로 오르기에 양(陽)이 되었고.
연우가 여태껏 구현하고 있던 음검은 역방향을 그리면서 회전 하여 천천히 아래로 침잠해 음(陰)의 성질을 떴다.
반대로 도는 기류와 기류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속도에 박차를 가했으니.
『호오. 발산하는 의념이 커지면 커질수록, 몇 곱절로 증폭하는 힘이라……!』
그 모양새는 마치 음양이 서로 꼬리를 물면서 회전하는 태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그와 동화하여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경고! 시스템이 재단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렉 현상이 발생합니다.]
[경고! 막대한 정보를 연산하는 것이 더뎌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다운될 우려가 있습니다.]
……
[경고! 알 수 없는 힘이 전반적인 시스템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 치고 있습니다!]
[제어 장치가 정지되었습니다!]
그 중심에서 연우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태극혜 반고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올포원이 내뱉던 어기전성도 힘의 막대한 기류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콰콰콰!
[77층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기능들이 마비됩니다.]
[스테이지가 붕괴됩니다.]
빛과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계가 허물어졌다. 흰색 물감과 검은색 물감을 섞으면 회색으로 변하듯, 스테이지 전체가 이리저리 굴절되면서 잿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시스템이 교란되었다. 그러다 비교, 연산, 판단과 같은 정보 처리 기능이 전부 정지되면서 올포원의 빠른 움직임도 덩달아 정지되었다.
치직, 치지직!
노이즈가 잔뜩 꼈다. 배광으로 잔뜩 뒤덮인 올포원의 형상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여전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간간이 부서지는 배광 아래로 드러나는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말 도 안 돼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연우는 막대한 힘의 역류에 금 방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처럼 휘청거렸지만, 반대로 오히려 역방향으로 회전하는 두 힘의 회전축에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버틸 수 있었다.
이것이 태극혜 반고검이구나.
세계의 이치를 바꾸려 하는 반대되는 두 힘이 맞물려 돌아가기에 태극(太極)이고.
의념이 섞였기에 혜(慧)이며.
그 형태가 마치 우주 창생의 기초 재료가 되었다던 거인이 태어난 알을 연상케 하여 반고(盤古)라.
그리고 그것을 펼쳐 내는 형태가 바로 검(劍)이니.
연우는 언젠가 스승님이 이루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힘의 완성을 눈앞에 둔 채로.
음양이 맞물리는 지점을 따라, 스퀴테를 거세게 내리쳤다.
동시에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에 쌓여 있던 막대한 양의 마력도 그곳으로 쑥 하고 빠져나갔다.
따다다당!
철컹, 철컹-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존재를 강제로 속박하는 모든 사실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소리. 그리고 실제로 플레이어 올포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데이터들이, 시스템과 연결된 모든 기능들이 강제로 단절되고 말았다.
[시스템 에러!]
[시스템 에러!]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당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던 디스크 조각들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훼손되었습니다.]
[원본 데이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양도를 완전히 구현해 내지 못했기에 비록 단 일격에 지나지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올포원’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요소들이 순식간에 부서지면서, 시스템으로부터 받고 있던 가호와 축복, 그리고 효과들이 모조리 취소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올포원이 아닌, 비바스바트라는 인물뿐.
배광도 마치 바람에 훅 꺼진 촛불처럼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한 눈이 보였고.
연우는 마력을 한순간에 탕진한 현기증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순보〉를 밟아 단숨에 비바스바트의 앞까지 다다랐다. 너무나 빨랐기에 순보는 마치 최종형이라는 〈축지〉를 방불케 했다.
올포원, 아니, 비바스바트는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의 왼손이 그의 목을 낚아채고 말았다.
“드디어 잡았군.”
연우의 입꼬리가 시니컬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