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올포원 (7)
[또 다른 후계자, 하르모니아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또 다른 후계자, 하르모니아가 공황 상태에 잠겼습니다.]
[또 다른 후계자, 하르모니아가 불안 상태에 잠겼습니다.]
……
[공양 의식을 위한 집중이 흐트러집니다!]
[번제 의식을 위한 수양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
‘칠흑왕의 후계자’라는 신분으로 같이 묶여서일까.
하르모니아는 연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고, 큰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칠흑왕을 깨우기 위한 의식(儀式)이 흐트러지는 게 연우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긴.
세상에 어느 누가 감히 칠흑왕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칠흑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은 많아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칠흑왕이 모든 존재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98층의 모든 신들이 플레이어, 차연우를 보면서 기함을 터뜨립니다!]
그 오만하다는 신들도.
[98층의 모든 악마들이 행여 불똥이 튈까 봐 플레이어, 차연우에게서 모든 관심을 거둡니다!]
개인주의자인 악마들도.
[모든 죽음의 신들이 침묵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정숙합니다.]
심지어 연우를 ‘군주’로서 믿고 따른다던 이들까지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케르눈노스가 당신에게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왕’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자세라며 크게 꾸짖습니다!]
소속 없이 돌아다니는 비마질다라와 케르눈노스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게 고작일 뿐.
하지만.
연우는 그런 메시지를 보내고도 여전히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공간 너머 사방에서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시선을, 단순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위대한 존재의 시선을 받고도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더 웃긴 것은.
[칠흑왕이 고요한 눈으로 자신의 분신을 바라봅니다.]
칠흑왕의 반응이었다.
[칠흑왕이 실소를 흘립니다.]
[칠흑왕이 혀를 찹니다.]
[칠흑왕은 이번 ‘꿈’이 아주 재미나다는 생각을 합니다.]
칠흑왕은 지금 이 상황을 아주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즐긴다는 표현이 옳았다.
신들이라면 인간에게 이런 모욕을 당했을 때,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면서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태반일 테지만.
그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런 일들을 두고 재미난 놀이라며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는 신이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는 벌레 무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그네들끼리 서열을 나누고 차별을 하는 것을 우습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칠흑왕에게 있어 ‘후계자’와 ‘분신’은 언제나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 따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반응이 귀엽다 볼 수도 있었다.
『……아들아.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는 내 아들이면서도.』
크로노스는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참 막 나가는구나.』
지구에 있었을 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 탑에 들어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성격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그런 막내아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나 치열한 투쟁을 거듭해야만 했던 연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일 테지. 조금이라도 무뎌지는 모습이 보이면 금세 잡아먹힐 순간들투성이었으니까.
거기다 칠흑왕이라는 거대한 굴레가 점차 ‘꿈’에서 깨어나며 연우를 강제로 속박하려는 이때에는. 정신을 더더욱 바짝 차려야만 했다.
찰그락, 찰그락-
연우는 자신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검은 쇠사슬을 다시 매만져 보다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허공 저 너머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존재에게 정언(定言)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번 성공하니 이후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다 정언을 흩뜨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가 전부 칠흑왕에게 전달되었으니까.
[플레이어 차연우가 본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난 여태껏 당신이 점지한 대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해 왔다. 이 탑의 하계를 전부 당신의 색으로 칠했고, 당신이 시킨 대로 천마의 혈육도 무사히 제거했지.]
그냥 공허 속 아무 곳에다 말을 해도 메시지가 전해진다니.
대체 칠흑왕은 얼마나 큰 걸까.
[플레이어 차연우가 본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올포원의 신위도 곧 완전히 내게로 귀속될 테니, 이제는 내가 탑을 꼭대기까지 오른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겠지.]
[플레이어 차연우가 본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아무리 하르모니아가 중간에서 다른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결국 당신을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하지 못하겠지.]
연우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인과 용을 다스리며, 올림포스의 왕이기도 한 존재. 그리고 죽음과 투쟁을 상징하며 이제는 시간과 관련된 ‘굴레’까지 조작하여 탑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칠흑왕은 탑을 자신의 성역으로 지정하여 모두 흡수하고, 완전히 ‘꿈’에서 깨어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연우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플레이어 차연우가 본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그러니까 거래를 할 자격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하는데.]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그가 요구할 용건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이야말로 여태껏 그가 이런 힘겨운 투쟁을 거듭하며 탑을 올랐던 이유였으니까.
칠흑왕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플레이어 차연우가 본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당신이 그동안 날 부리기 위해서 억류해 두었던 정우의 영혼, 돌려줘. 그런다면 짖으라면 짖는 개가 될 테니까.]
된다면 된다, 안 된다면 안 된다고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던 칠흑왕의 메시지는 한참 동안이나 떠오르질 않았다.
『……아들아.』
크로노스는 그런 막내아들을 너무나 안타깝게 바라봐야 했다.
수많은 형제들을 두고도, 그들의 도움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제 삶만 힘겹게 살아야 했던 이 가녀린 아이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 걸까.
이런 건 아버지로서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것이기에.
크로노스는 이 자리에 없는 레아가 더더욱 그립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시선으로 보아도, 연우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채로 칠흑왕의 답변을 기다리기만 했고.
[탈각이 아주 느리게 진행 중입니다. 39, 40…… 42%…….]
[‘홍실’ 상태였던 영혼의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상태: 영과(盈果).]
여전히 탈각이 느리게 진행되는 와중.
무겁던 긴 침묵이 깨졌다.
[칠흑왕이 ‘거래’를 운운하는 자신의 분신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칠흑왕이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습니다.]
[칠흑왕은 원래 자신은 이런 요구 따위를 절대 듣지 않노라며 자신의 분신에게 말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에게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합니다.]
“……!”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그도 거래를 운운하는 것이 칠흑왕에게는 당치도 않는 헛소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이건 알량한 허세일 뿐. 자신쯤은 칠흑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렇지 않게 치우고 남을 인형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 예부터 지금까지, 칠흑왕을 추종하는 무리는 아주 많았고, 그는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존재를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동생의 영혼을 돌려주고 돌려주지 않고는 결국 그의 아량에 달린 것일 뿐.
만약에 거부를 한다면…….
‘아니. 생각하지 말자.’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는 여기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다른 반격을 꾀할 때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털썩.
연우는 아무런 미련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98층의 모든 신들이 숨을 삼킨 채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98층의 모든 악마들이 깊은 탄식을 흘립니다.]
충성과 굴종의 맹세.
동생을 돌려준다면. 정우를 되살려 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철그럭-
연우는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이 더더욱 억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원래 시스템의 화신이라는 ‘올포원’을 옥죄는 구속구와 같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칠흑왕과의 연결 고리로 변하고 있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칠흑왕이 다른 기원(祈願)이라면 들어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순간, 연우는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불신에 젖은 눈빛.
『뭐?』
크로노스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칠흑왕의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칠흑왕은 ‘꿈’을 꾸어 왔던 내내 자신의 분신만큼 충성스럽던 존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칠흑왕은 자신의 분신만큼 재미난 꿈을 꾸게 해 준 존재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칠흑왕은 응당 자신의 분신이 원하는 기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주 합당한 것이며,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 드러날 옥좌의 좌측을 내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칠흑왕은 하지만 그 소원만큼은 들어줄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연우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괴성을 질렀다. 분노 때문일까. 77층을 비롯한 하계 전체가 우르르 떨렸다. ‘알’을 형성하고 있는 어둠, 전부가.
[칠흑왕은 그 영혼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진귀한 보옥이라고 밝힙니다.]
뭐?
보옥?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칠흑왕은 더 이상 가르쳐 줄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에게 어서 다른 기원을 말할 것을 종용합니다.]
바드득!
연우는 이를 잔뜩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칠흑왕에게 있어 동생의 영혼은 어떤 쓰임새가 있는 걸까?
사자 소환으로도 부를 수가 없고, 칠흑왕이 있다는 문 앞까지 가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동생의 영혼은 분명히 어떤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연우는 칠흑왕이 시키는 것을, 원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동생의 영혼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칠흑왕은 거부를 하였고.
“주지 않겠다면.”
연우는 이제 녀석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당신과 싸울 수밖에.”
화아아-
스퀴테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계를 잠식한 칠흑이 크게 출렁거렸다.
이 칠흑의 기원(起源)이 비록 칠흑왕에 있다고 하여도, 당장 연우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성질도 그가 원하는 대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칠흑왕은 자신의 분신이 보이는 저항심에 기꺼워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에게 내어 주었던 칠흑옥을 회수하고자 합니다.]
그때, 스퀴테가 거칠게 떨렸다. 완성된 스퀴테의 중심이 되는 핵을 빼앗아 차근차근히 힘을 회수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칠흑옥’의 근본 성질이 변화했습니다!]
[시스템에 등록된 ‘칠흑옥’의 소유가 완전히 플레이어 차연우에게로 귀속됩니다!]
그때, 음검이 발동하면서 시스템에 등록된 칠흑옥의 소유가 연에게로 완전히 변경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고.
[새롭게 설치된 운영 체제가 작동합니다!]
[감염되었던 비교 기능이 정상화 되었습니다.]
[약화되었던 연산 기능이 정상화 되었습니다.]
[정지되었던 판단 기능이 정상화 되었습니다.]
……
[중앙 정보 처리 장치의 정상화로 인해 정보 수집 및 해석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습니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시스템이 전면 재가동합니다.]
[올포원의 신위가 드러납니다!]
연우는 비바스바트에게서 갈취했던 올포원의 신위를 이용, 시스템을 전면 재개하면서 점차 자신을 옥죄려 드는 칠흑왕의 간섭을 전부 탑 외로 배제하고자 했다.
[79층으로 잠식을 시도하던 칠흑의 활성이 강제 중단되었습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가진 작은 재주에 작게 탄성을 흘립니다.]
[칠흑왕이 더더욱 탐욕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분신을 바라봅니다.]
[칠흑왕이 이번 ‘꿈’을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 * *
연우와 칠흑왕이 한창 소란스럽게 부딪치던 그때.
뚜벅.
뚜벅.
“…….”
천마는 아무 말 없이 창공 도서관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 멈췄다. 다른 곳들처럼 수많은 책자들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유독 천마의 눈에 밟히는 칸이 있었다.
-손재원(비바스바트)
천마는 칸의 가장 앞쪽에 있는 책자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깊은 침묵이 깔린 도서관 안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내게 아버지는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