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올포원 (10)
비바스바트(Vivasvat).
혹은 찬희(燦熙).
찬란하게 반짝이고, 아름답게 기쁘다.
그것은 외조부께서 언젠가 남기셨다던 법명이었다.
* * *
‘왜 이렇게 깜깜하지? 아직 재원이가 안 들어왔나?’
서은영은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오다가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아들이나 남편 중 한 명이 먼저 집에 와서 불을 다 켜 놓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오늘은 동창회가 있어서 늦을 거라고 미리 말을 해 두기도 했었고.
서은영은 이따가 두 사람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싶어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전등을 켰다.
“깜짝이야! 재원아, 너 여기 있었었니?”
서은영은 뒤늦게 식탁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그래서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지만, 아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손재원은 그날 이후로 사흘이나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방에 틀어박힌 채. 커튼을 치고 조명도 전부 꺼 둔 채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끼니라도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걱정과 염려도 있었지만, 손재원은 아파서 입맛이 없다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떻게 손쓸 도리 없이 아들의 방문 앞을 걱정스럽게 서성거릴 무렵.
손재원은 손을 떨고 있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어.’
이번은 어디까지나 민채영이 슬픈 일을 겪었었기에 충동적으로 나선 것일 뿐.
애당초 손재원은 그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많지 않은 성격이었다. 아니,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런 냉소적인 시선은 자신에게도 똑같았다.
살아 있는 것에 무감각한 사람.
그저 시작되었기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
공감은 물론, 감정이라는 것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던 몸이었는데…….
하지만 손재원은 분명히 어젯밤에 다른 감각을 느꼈다.
그가 여태껏 배웠던 죄책감 같은 건 거의 없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상대를 처치하고 난 뒤에 생긴 쾌감뿐.
아니, 그건 환희나 성취감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
어린 시절부터.
손재원은 늘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아래로 보이곤 했다.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었고, 때로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도 훤히 읽힐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이러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런 좌절감은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한 따분함과 지루함으로 변하고 말았다.
‘영재’니 ‘천재’니 하면서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것도 전부 같잖게만 보일 뿐.
모든 것이 자신의 아래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위험도 컸지만, 그렇게 엇나갈 수 있었을 손재원을 바로잡아 준 건 바로 가족들이었다.
현명한 어머니와 명석한 아버지 덕분에 그래도 최소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사를 따분하게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그 뒤로는 무엇을 하든지 시큰둥한 반응이 전부였다.
어떤 것에 손을 대더라도 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애당초 그는 노력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었고.
만사에 저절로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손재원은 ‘중간만 가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너무 척척 잘 해 보이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저절로 쏠리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야 잘난 척하기도 좋고 우쭐해 하기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반복되면 지겨워지기 마련이었다. 기대에 찬 사람들의 시선은 그것대로 귀찮았기 때문에, 그는 그동안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체득하고 있었다.
성적이 언제나 어중간한 위치를 유지했던 것도.
친구가 없어도 별다른 소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런 식으로 눈에 띄지 않고자 했던 노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성취감이 손끝을 찌르르 타고 흘렀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나’로 인한 커다란 흔적을 남길 수도 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다른 한편으로는 여태껏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던 가르침과 상충되었기 때문에 속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다시 방의 전등을 켜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손재원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 * *
〈의문의 변사체 또다시 발견!〉
〈경찰,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인가?〉
〈사망자는 과거 살인 전과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잇따른 변사체의 발견.〉
〈살인마가 벌이는 신종 유희극인가, 아니면 정의를 찾는 영웅의 활극인가?〉
* * *
[칠흑왕이 이 ‘꿈’에 대해 아주 큰 만족감을 표시합니다.]
천마는 아들의 ‘전기(傳記)’를 훑다 말고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또 이딴 식이네. ‘이번엔’ 잠꼬대가 좀 길다? 어?”
칠흑왕에게 있어 이 우주는 전부 ‘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부분을 역으로 뒤집어서 말한다면, 우주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칠흑왕의 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 셈이었다.
즉, 칠흑왕이 원한다면, 비바스바트-손재원과 관련된 일대기를 꿈처럼 감상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칠흑왕은 그렇게 천마를 조롱하고 있었다.
친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죄책감을 안고 있을 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 것이다.
천마는 이것이 칠흑왕이 자신을 동요시켜 빈틈을 들쑤시려는 의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도 억지로 누르고자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껏 설계해 두고 있던 판이 전부 어질러질 테니까.
[칠흑왕이 자신의 원수에게 아들도 버린 비정한 아버지라면서 실소를 터뜨립니다.]
바드득!
천마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인(忍), 인, 인…….’
그 자신은 초월에 초월을 거듭해 ‘황’이 되면서 칠흑왕의 꿈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일반적인 신격과 악마들은 거의 반쯤 걸치다시피 한 상태였다.
‘밤’의 존재들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꿈’을 부수고, 온 우주를 다시 혼돈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것이고.
반면에 ‘낮’의 존재들은 칠흑왕을 계속 재우면서 ‘밤’을 막는 파수꾼 역할을 해 왔다.
[칠흑왕이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는 원수에게 냉소를 흘립니다.]
[칠흑왕이 ‘매번’ 빚어지는 행사가 이제는 기껍다고 말합니다.]
“좀 더 처맞아 봐야 정신 차리지?”
[칠흑왕이 이제는 이골이 조금 난 것 같노라고 웃습니다.]
“지랄하네. 멍청하게 있다가 지 쫄다구들한테 뒤통수나 맞던 새끼가.”
[칠흑왕은 당시의 일이 격했노라고 회상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유일한 원수이자 라이벌이었던 존재에게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자신을 구속한 구속구가 점차 헐거워지는 것이 느껴지며.]
[자신을 강제로 재우고 있는 수마(睡魔)가 점차 옅어지고 있고.]
[자신을 묻은 공허가 점차 ‘꿈’에 동화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노라고.]
[또한, 여태껏 구속구의 첫 번째 자물쇠를 자처했던 너의 아들이 이미 죽었으며, 두 번째 자물쇠를 풀어 줄 ‘열쇠’를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만큼은 천마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칠흑왕의 이번 메시지는 ‘지난’ 회차들과 다르게 단순한 공갈이나 협박이 아닌, 진짜 여유에서 나오는 조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법칙에 얽매여 있는 일반적인 존재들은 인지조차 못 하고 있지만, 사실 칠흑왕이 ‘꿈’에서 깨어나려는 시도를 했던 건 이번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마다 천마와 ‘낮’이 녀석을 번번이 저지해 오면서 우주 창생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지만.
천마는 이제 그마저도 거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꿈’에 제재를 가할 때마다, 영력이 계속 극도로 소모되면서 창공 도서관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낮’의 존재들은 갖고 있던 신력과 격을 상실하며 거의 법칙에 녹아들다시피 한 상태였고.
그나마 메타트론과 바알이 남아서 제 일을 잘해 주고 있다지만, 그것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의봉을 내던져서 탑을 세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헐거워지는 칠흑왕의 구속구를 더 단단히 하는 한편, 그 안에다 신과 악마들을 가둬 두면서 무게를 한껏 더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부수적인 효과도 아주 많았다.
천마가 소싯적에 ‘황’이 되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절지천통, 즉, 신의 지배로부터 인간들을 강제로 떼어 놓아 그들을 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목적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었고.
각 우주와 차원, 행성에서 탄생한 영웅들을 ‘초대’하도록 만들면서 혹시 추가로 탄생할 수 있을지 모르는 신격의 후보군들도 미리 배제해 둘 수 있었다.
연우가 진즉에 짐작했던 대로 탑은 일종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었다.
하지만.
탑의 기능에는 연우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점도 있었다.
‘칠흑왕, 저 빌어먹을 종자를 통수 칠 수 있는 인재의 양성.’
‘낮’은 이제 수명이 거의 다하였고, 머지않아 완전히 스러지고 만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일어나 칠흑왕을 다시 잠재울 수 있는 존재를 만드는 것이, 결국 천마가 그리던 의도였으니.
비바스바트-손재원이 그런 아버지의 사명을 뒤늦게 알게 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뒤였다.
비록 이후 부자지간에 자잘한 충돌이 있고 난 뒤, 천마는 돌아서고 비바스바트-손재원도 결국 기존의 뜻을 꺾고 올포원이 되어 아버지의 뜻과 다르게 77층을 가로막아 서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천마의 사적인 감정과 다르게, 탑의 목적을 봤을 때 가장 그의 의도에 들어맞은 것이 바로 연우였다.
하나 칠흑왕도 그러한 천마의 의도를 눈치채고, 여러 번의 공략 끝에 천마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으니.
이 뒤가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만 할 일이었다.
연우가 어떻게 나서느냐에 따라, 기로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 * *
‘……뭐지, 방금 그건?’
연우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백일몽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포원…… 비바스바트의 신화 중 일부였나?’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가 보았던 것이 비바스바트의 어린 시절을 다룬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왜 갑자기 여기서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올포원’이라는 신위를 발동시키면서, ‘소화’가 이뤄지고 있던 녀석의 신화가 돌발적으로 튀어 올라 의식 세계에 비친 것일지도.
그 속에 담긴 내용들도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수천 년을 살았다던 녀석이 어떻게 자신과 비슷한 시간대의 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분명히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천마는 지구가 아직 생명체가 잉태되기도 전인 시절에 비바스바트-손재원이 태어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겨 댔으니까.
‘황이란 원래 시공을 초월한 존재들이니. 천마도 먼 과거의 이상 변화를 깨닫고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비바스바트-손재원의 신화를 빠르게 훑다 보면, 여태껏 그가 모르고 있었던 모든 이면의 비밀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천마와 칠흑왕의 관계.
탑이 생성된 진짜 목적.
부자지간이 틀어지게 된 이유.
비바스바트-손재원의 목적.
‘낮’의 존재와 ‘밤’의 충돌까지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어떻게든 구속하려 드는 칠흑왕에게 대항할 방법까지. 그 힌트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을 둘러싼 모든 비밀을 파헤쳐 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비바스바트의 신화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연우는 어쩐지 녀석이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바스바트의 신화를 빠르게 소화합니다!]
[신위, ‘올포원’이 화려하게 빛을 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