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올포원 (12)
메시아.
미래조차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만을 안고 사는 이들을, 언젠가는 구원해 준다는 존재.
여기서 구원(救援)이 대체 무엇인지.
그때까지도 난 전혀 알지 못했다.
* * *
“그게 대체 무슨 정신 나간 말이야! 씰을 공물로 삼는다니! 대체 어느 신이 자기 신도를 제물로 삼는다는 거야!”
씰을 공물로 삼겠다는 말은 손재원에게 있어 충격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 ‘신’이란 존재는 신비를 관장하고 이적을 실현하기에 앞서,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그 비원(悲願)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하는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굳이 인류의 원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예수나,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미륵불과 같은 메시아(Messiah)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신앙과 신심을 받는다면 그만한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법이었다.
손재원이 한국에서 아주 짧게나마 얼굴 없는 히어로로 활동했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무료함을 느꼈던 삶에 있어 새로운 자극이 된 것도 있었지만.
사회적 책임을 안고 살아야 할 존재들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만한 죗값을 받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고 다니는 형태를 봤을 때는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보다 더한 놈들이 있었던 것이다.
손재원은 공물로 바쳐질 거라던 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이들 가족과 함께 살던 지난 한 달 동안 그녀가 얼마나 웃음이 많은지, 성격이 밝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낯선 생김새를 가진 손재원을 유독 경계하던 겔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이가 그녀였으니까.
무엇보다.
씰은 이제야 갓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부모와 형제들의 관심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아이.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과 뛰어놀며 살아야 하는 나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겔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제 어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추위에 떠는 아기 새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씰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성의 귀족들이…… 그렇게 정해 버렸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재원은 이를 바득 갈았다.
결국 이 세상도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 *
‘차라리 여기 있는 귀족이란 놈을 날려 버릴까……?’
손재원은 아주 잠깐 그런 고민에 잠겼다.
지금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는 민채영이 자살을 했을 때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감정에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성의 귀족을 처치할까 말까 하는 고민을 오래전부터 하긴 했었다. 귀족이란 것들이 겔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얼마나
짐승처럼 부려 먹는지를 지켜봤으니까. 말이 농노였지, 노예보다 더한 처지였다.
사유 재산. 단순히 그렇게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손재원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고, 제멋대로 도와 주고 난 뒤에 이들에게 어떤 해악이 닥칠지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건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해.’
그래서 손재원은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나서기로.
“네가…… 간다고? 씰 대신에?”
“그래. 그동안 귀족들이 있는데도 날 계속 숨겨 주고, 없는 처지에 식량도 나눠 주고 그랬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도울게.”
“하지만 너는 우리 손님. 손님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게 교리(敎理)다.”
교리. 이들이 모시는 신이 가르쳐 준 말씀이라…… 신 같지도 않은 같잖은 놈이 그래도 그럴듯한 행세는 한 모양이었다.
애당초 손재원은 겔 가족에게 도망치자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다가, 우습게도 딸을 앗아 갈 예정이라던 신에 대한 신앙심도 아주 투철했다.
살아온 환경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겠지. 그렇기에 손재원은 가타부타 다른 설득을 하지 않고, 자신이 대신 공물이 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겔은 거부했지만, 결국 계속된 손재원의 설득 끝에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원……. 너밖에 없다.”
손재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어 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미소가 잘 지어지지 않았다.
* * *
공물이 바쳐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신이 내려올 것이라던 성역(聖域)의 주변부를 따라,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제사 의식이 다양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애니멀리즘에 기반한 무당의 굿이 벌어지는 내내, 귀족쯤 되어 보이는 작자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한쪽 구석에서 그것을 지켜봤다.
그러다 해가 가라앉을 때 즈음, 그들은 전부 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인파들로 북적대던 제단에는 손재원만이 남아 있었다. 달아나지 못하게끔 형틀에 묶여 있는 상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쿵.
쿵.
‘저게 그 신이란 건가?’
숲 안쪽에서부터 대지가 들썩이면서 집채만 한 크기의 괴물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수 미터나 되는 덩치를 자랑하는 그것은 전신을 갑각으로 뒤덮은 채로, 이쪽을 보면서 쉴 새 없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냥 괴물이잖아?’
보통 이런 시대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대상을 두고 신이라 포장하기도 한다지만, 그래도 저건 그냥 단순히 ‘경외감’을 주게끔 만들기엔 많이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손재원은 괴물을 빤히 살피다, 녀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쪽 뒷다리가 계속 들썩인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듯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편해 보였다.
‘이거 잘만 하면…… 쉽게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손재원의 눈이 깊게 가라앉을 때쯤.
녀석은 제단 앞에 도착하고서는 손재원을 탐색하기라도 하듯이 커다란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이게…… 이번 공물…… 부서진 격을 보충해 줄…… 재료…… 하지만 신앙이 없나……. 이런 건……. 처음인데…….』
‘말을 한다고?’
손재원은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겉보기엔 그냥 먹이나 갈구할 것 같은 괴물이 의사를 표현할 정도라니. 더군다나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칙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겉으로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부족하더라도 먹어야…… 천마 놈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천마?’
아무래도 녀석을 다치게 만든 범인인 것 같은데……. 하지만 손재원은 뒷말을 더 이상 듣지 못했다. 별안간 녀석이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
그 순간, 손재원은 여태 손에 쥐고 있던 장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제단 주변에다 묻어 뒀던 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면서 불기둥이 괴물을 뒤덮었다.
크아아아!
손재원이 씰을 대신해서 공물이 되겠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씰과 형제자매들은 모두 고맙다면서 자신들이 무엇을 도와줄 게 없냐고 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여기에 손재원은 몇 가지를 부탁하였다. 비록 구하기가 쉬운 재료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하지 못할 것들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손재원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남은 건 오로지 시간이었으니, 이곳에서 보았던 특이한 물리 현상들을 바탕으로 화약의 위력을 향상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비밀리에 마련해 둔 장치는 아주 많았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죽창을 꽂아 놓은 함정이 드러나고, 하늘에서는 굵직한 통나무가 떨어졌다.
여러 트랩들이 복잡하게 작동하면서 괴물을 연거푸 때렸다. 이런 함정들을 여럿 설치하면서 다행이었던 점은 성역이라고 해도 괴물이 사는 터전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손재원은 형틀을 풀면서 재빨리 제단에서 물러났다. 광란을 부리는 괴물을 잡으려면 녀석을 다른 트랩이 설치된 장소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 있었다. 어차피 말만 그럴듯하게 신이라 불릴 뿐인 존재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하물며 다른 데서 이미 크게 다치고 돌아온 중상자임에야, 사냥이 실패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크아아, 크아!
녀석은 고통스러웠던지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다행히 트랩 중 몇 가지가 녀석이 숨겨 두었던 상처를 강제로 들쑤시면서 다량의 출혈이 일어났다. 쿵쿵,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그러다 괴물이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을 돌리다, 손재원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뭐지?’
이쪽으로 미칠 듯이 달려올 줄 알았던 것과 다르게, 괴물은 갑자기 대가리를 위로 크게 치켜들었다.
손재원은 녀석이 갑자기 미쳤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든 나머지 재빨리 괴물의 시야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뛰었다.
그 순간, 괴물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것을 잔뜩 토해 냈다.
화아악!
으레 울릴 줄 알았던 굉음 따윈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사라진 건지도 몰랐다. 다만, 손재원이 느낄 수 있는 건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대기와 도저히 아무것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섬광뿐.
그는 재빨리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바닥을 뒹굴었고, 열풍이 머리 위를 전부 스쳤다 싶을 때쯤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은.
‘무슨……!’
완전히 초토화되고만 성역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창하던 숲은 쑥대밭이 되어 온통 검은 그을음으로 가득했다. 바위도 나무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숨결이 어디까지 이어진 것인지, 시야가 닿는 구역은 전부 깡그리 밀려 겔이 있는 마을까지 닿은 게 아닐까 우려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감히…… 나에게 위해를……! 인간 따위가…… 용서치 않겠다……!』
손재원은 다시 뛰어야만 했다. 괴물이 다시 아가리를 뒤로 젖히면서 방금 전과 똑같은, 아니, 훨씬 강렬한 숨결을 토해 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곳곳에 남은 불씨들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재원은 뛰고 또 뛰어야만 했다. 괴물은 최소한으로 움직이면서 숨결을 잇달아 뱉어 내어 그를 잡으려 했고, 그럴 때마다 손재원은 임기응변으로 공격을 피하면서 반격을 시도했다.
다행히 트랩의 일부는 숨결에도 멀쩡했고, 손재원은 그런 곳으로 녀석을 조금씩 유인했다.
『죽여 주마……!』
다만, 문제가 있다면, 금세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던 예상과 다르게,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피해가 누적될수록 녀석은 더 크게 광란을 부리면서 악착같이 손재원을 쫓아왔다. 덕분에 먼저 지친 건 그였다.
‘이러면 나가린데?’
결국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에, 괴물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새카만 매연과 하얀 김을 풀풀 휘날리는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손재원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이제 좀 나오시죠, 아버지?”
손재원은 허공을 응시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나오시면 엄마한테 다 일러 바칠 거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황금빛으로 물든 빛의 궤적이 떨어져 괴물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오오-
그동안 여러 트랩에도 불구하고 뚫지 못했던 갑각은 갈기갈기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괴물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무언가에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의 위에는 아버지가 팔짱을 낀 채로 히죽거리면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느려 터져서는. 어떻게 이런 잔챙이한테 얻어터지고 다니냐?”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만한 괴물을 가볍게 누르고 있다니. 그 여유로운 모습이 멋진 나머지, 손재원은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인상을 팍 구겼다.
“아버지야말로 제정신이십니까? 아들을 이런 궁벽한 데다 밀어넣고, 괴물에게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 걸 그냥 지켜봐요?”
“재미있잖아.”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지만 천마는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초월은커녕 탈각도 제대로 못 해서 빌빌대던 놈한테 이딴 꼴을 당하고 있으니 재밌지, 재미없겠니?”
『천마, 천마……!』
그때, 괴물이 꿈틀대면서 아버지를 떨쳐 내려 발버둥쳤다.
“시끄러, 새꺄.”
쾅!
천마는 아주 가볍게 발을 굴리는 것으로 괴물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그 커다란 대갈통이 통째로 으깨져 버린 것이다.
“내가 네 친구냐? 감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끼어들어?”
“…….”
그 광경을 보면서 손재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말았다. 일단 아버지를 부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신 탓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의 속을 썩인 일은 없는지 지난날을 강제로 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파스스-
죽은 괴물이 마치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졌다. 조각들은 회오리를 치다가, 아버지가 오른손에 들고 계시던 노란 막대기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Hārītī
환한 빛무리와 함께 막대기 위에 글씨가 새겨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 황홀해서.
위엄으로 가득해서.
경외, 그 자체여서.
손재원은 아버지가 저 볼품없이 죽어 나자빠진 괴물-스스로를 ‘신’이라고 자칭했던 놈보다 훨씬 ‘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신’,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그때.
아버지가 장난스러운 투로 웃으면서 이쪽을 돌아봤다. 마치 아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신? 야. 쪽팔리게 신이 뭐냐. 이 아버지는 그것보다 훨씬 높은 존재란다.”
속마음을…… 읽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손재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악이란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 * *
[칠흑왕이 지루한 이야기를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냐는 투로 자신의 분신을 봅니다.]
[비바스바트 신화의 소화가 잠시 중단됩니다.]
연우는 비바스바트-손재원의 신화를 읽어 내리는 것을 도중에 끊어야만 했다.
아직 초반부인데도 불구하고.
찰나의 순간 동안 본 것인데도, 칠흑왕은 연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치 그 정도로 자신을 막을 수 있겠냐는 듯.
[칠흑왕은 자신의 분신이 어떻게 본신을 거스를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합니다.]
[‘밤(녹스)’이 내려옵니다!]
비바스바트에 대한 회상은 거기서 끝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