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92화 (692/862)

17화. 올포원 (13)

전혀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연우는 눈을 크게 뜨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펼쳐 낸 그림자로 가득한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어둠 한복판이 크게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활짝 열리는 것은.

『아들아, 저거……?』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보았던 ‘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탑의 정중앙에 타계와의 웜홀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히든 스테이지, ‘마해(魔海)’가 아주 크게 출렁입니다!]

[‘마해’가 거친 해일을 일으켜 탑의 각 층계로 역류를 시도합니다.]

[‘마해’가 탑을 침식하고자 합니다.]

[타계의 신들이 ‘마해’의 인도를 따라 침입을 시도합니다!]

아. 버. 지.

아. 버. 지. 께. 서.

부. 르. 시.

아. 둔. 한. 냄. 새.

칠흑왕이 몸집을 조금씩 일으키는 것에 따라, 여태껏 탑의 언저리만을 감돌고 있던 마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해는 원래 혼세팔신 중 한 명인 극권의 군주가 탑에 호기심을 갖고 들어오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그 기운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던 곳.

‘밤’이 칠흑왕을 기리고, 그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단순히 의지를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반응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웜홀에서부터 수많은 촉수들이 튀어나왔다. 무수히 많은 활자들로 뒤섞여 일정한 형체도 가지지 못한 자들. 사고도 획일화하지 못해 무분별하게 의념을 퍼뜨리는 태초의 망자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아둔한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면서.

그의 ‘꿈’을 어떻게든 깨워 주겠다는 일념만으로.

‘나를 시험하겠다고 한 게,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보려는 건가?’

연우는 이를 악다물었다.

당장은 자신이 유리한 입장일지도 몰랐다.

탑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올포원이라는 신위가 자신에게 있었고.

칠흑왕은 그 명성과 신격에 어울리지 않게 탑에 의해 강제로 단단히 짓눌려 있는 상태.

그렇다는 건, 자신의 의사가 칠흑왕을 따르지 않는 한, 그가 당장 깨어날 방법 따윈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연우가 가진 힘의 대부분이 칠흑왕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음과 관련된 신위에서부터 세 개의 형틀까지 전부 그가 내려 준 것이 아니던가. 이미 연우는 칠흑왕이 내건 목줄을 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연우로부터 힘을 회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칠흑왕은 굳이 당장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창공 도서관에서 천마가 지켜보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는 이 ‘꿈’을 여흥 정도로 여기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 시험을 한다는 명목으로 ‘밤’을 강제로 끌어와 연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려는 것이겠지.

이를테면, 녀석에게 있어 연우의 반응은 재미난 놀이극에 지나지 않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의 장난이 어떤 이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98층의 모든 신들이 경악합니다!]

[98층의 모든 악마들이 이곳에 갇혀 있어서는 다 죽을 뿐이라고 소리칩니다!]

당연히 신과 악마들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칠흑왕이 몸집을 일으키려는 것만으로도, 칠흑이 조금씩 천계 쪽으로 타고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하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에 칠흑왕의 권속들까지 줄지어 나타난다. 타계의 신은 그들로서도 미지(未知)와 무지(無知)의 대상인 까닭에 저절로 공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방금 전까지 올포원과 한창 전쟁을 치르고, 서로가 유일신이 되겠다면서 아웅다웅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소수의 신들이 98층에서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다수의 신들이 동요한 심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대책 마련을 시급히 논의하고자 합니다!]

[극소수의 악마들이 이 기회를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모색합니다!]

……

[소속을 두지 않는 몇몇 신과 악마들이 전향을 염두에 둡니다.]

……

[몇몇 신들이 어쩌면 이것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몇몇 악마들이 계시록에 기술된 ‘종말’은 아직 시기상으로 나올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

[비마질다라가 더 큰 전쟁이 다가올 것에 잔뜩 고무됩니다. 당신의 반응을 기대합니다.]

[케르눈노스가 탑의 새로운 변혁에 대해 궁금증을 던집니다.]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방금 전, 우리가 지니고 있던 에녹서의 일부가 바뀌었습니다. 계시(啓示)가 내려왔단 뜻이지요. 크로노스…… 신왕의 옛 신화를 훑어보았다는 게 사실인지요?]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이제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에 기원을 두고, 당신의 어머니는 어디서 출현하였는지를요. 시(時)와 공(空), 이둘 모두를 당신들은 타고난 것입니다.]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그러니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의사를 두시겠습니까? 정체성을 어디로 놓으시겠습니까? ‘밤’입니까? 아니면 ‘낮’입니까?]

[바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네가 다과회에서 먹었던 쿠키. 그거 원래 너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남겼던 레시피로 만든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다른 메시지는 오지 않아도, 바알은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당신의 대답을 기대합니다.]

‘낮’과 ‘밤’.

우주 창생 때부터 시작된 전쟁은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천마의 동료이기도 했던 메타트론과 바알이 천계에 있고, 신과 악마들을 조율하는 위치에 있는 건…… 그들이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칠흑왕의 부름에 따라, 타계의 신들이 모습을 비추려 했다. 아주 작은 놈들을 필두로, 점차 큰 놈들이 억지로 웜홀에 몸을 구겨 넣기까지 했다.

당연하지만, 그 뒤로는 외신 급이나 혼세팔신의 기척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당신에게 서둘러 대답을 해 줄 것을 채근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당신의 대답을 종용합니다!]

『아들아.』

그때, 크로노스가 연우에게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언제 말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혹 기억하냐?』

그는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하면서도, 살짝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아들을 버린 천마와는 다르다. 그가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어 비바스바트를 저대로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그걸 지지할 거야. 네 할아버지와 관련된 것도 생각 마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한순간, 연우는 조급하면서도 잔뜩 긴장되었던 것이 확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에 서 있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편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긴 것이다.

처음 탑에 올랐을 때에는 혼자였기에 바짝 긴장하고 모든 것을 날카롭게 봐야만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연우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 저도 정우 녀석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옛날로…… 어렸을 적으로 같이 돌아가야지 않겠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크로노스의 웃음을 들으면서.

[칠흑왕의 분신이 결정을 내렸습 니다!]

연우는 메타트론과 바알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혼란에 잠겨 자신을 쳐다보는 98 층의 신과 악마들에게 말했다.

[신위, ‘올포원’이 작동하였습니다.]

[주어진 명령어에 따라 시스템이 명령을 수행합니다. 모든 법칙이 새롭게 운행됩니다.]

[98층, 천계의 관에 주어졌던 모든 설정이 해제됩니다.]

[봉인이 해제됩니다!]

[금제가 해제됩니다!]

……

[단층선이 사라졌습니다.]

[절지천통(絶地天通)이 무너집니 다!]

……

[천계와 하계가 연결되었습니다.]

* * *

그때부터였다. 탑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다수의 신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단층선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소수의 신들이 칠흑에 물든 하계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밤’의 존재들을 보며 날을 단단히 세웁니다.]

[극소수의 악마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게 갈립니다.]

신과 악마들이 그토록 바라던 절지천통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장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에 오랜 세월 동안 올포원이란 벽에 가로막혔기에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가 얼떨떨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계를 잠식하고 있는 칠흑이며 타계의 신들에게 깊은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전쟁의 국면이 다른 방향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휘하의 모든 대천사와 천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선언합니다!]

[미카엘이 메타트론의 명령을 좇아 선봉에 나섰습니다.]

[라파엘이 탑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볼 수 없노라고 중얼거립니다.]

[우리엘이 정의가 닿는 빛을 보여 주겠노라고 선고합니다.]

……

메타트론의 지시에 따라, 말라흐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절대선과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결단코 먼저 선전 포고를 던지는 법이 없었던 말라흐의 움직임에 많은 신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쿠키를 한 조각 베어 물면서 말 없이 전선에 나섰습니다!]

[바싸고가 모름지기 악마라면 이런 일에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합니다.]

[마르바스가 그렇지 않아도 타계에 대해 궁금했다면서 이참에 알 수 있겠다고 웃습니다.]

……

[탈퇴하였던 ‘동마왕군’이 ‘르 인페르날’에 합류하였습니다.]

[아가레스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웃습니다.]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탑 전체에 공표됩니다.]

[메시지: 저 영혼! 차연우와 차정우의 영혼은 내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탐하지 마라! 칠흑! 너에게서 내 것을 가져가겠다!]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탑 전체에 공표됩니다.]

[메시지: 그러니까 꺼지……!]

[전쟁에 나선 대천사와 마왕들의 투표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아가레스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윽박지릅니다.]

[아마겟돈이 열렸습니다!]

르 인페르날도 동참했다.

메타트론과 바알. 천계의 중재자이자 흑막이라고도 할 수 있던 최고 권력자가 움직인 순간, 여론은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겟돈.

에녹서에서 종말에나 찾아온다는 최후의 전쟁이 터진 것이니.

[‘낮(에로스)’이 오랜 세월 속에 묻혔던 빛을 조금씩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탑이 세워지면서 이제 기억하는 존재들도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옛 신화의 재현(再現)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낮(에로스)’과 ‘밤(녹스)’이 충돌합니다!]

쿠쿠쿠쿠-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칠흑을 물리치기 위해 내리쬐어지는 빛 속에는 신과 악마들이 있어, 타계의 신들의 진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칠흑왕이 새로운 이벤트에 아주 기꺼워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또다시 어떤 유흥거리를 줄지 잔뜩 기대합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탑의 세계 속에서.

[‘낮(에로스)’이 플레이어 차연우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플레이어 차연우가 대답을 내렸습니다.]

[플레이어 차연우가 선택한 답안지는 ‘밤(녹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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