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93화 (693/862)

18화. 알 (1)

-이 커다랗고 우람한 건 또 무엇입니까?

-탑.

-탑……?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여의봉이잖아?

메타트론은 언젠가 천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은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에 나눴던 대화. 아직 이 모든 우주가 수많은 신화들로 둘러싸여 창생의 과정이 끝나지 않았을 적에 이뤄졌던 대화였다.

그때에도 칠흑왕은 ‘꿈’에서 깨어나 꿈틀거렸고, 천마는 이전 회차와 다르지 않게 그를 다시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천마는 유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칠흑왕이 매번 깨어나려 할 때마다 강제로 재워야 했으니. 영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에 칠흑왕은 공허에 처박혔다 하더라도, 깊은 숙면을 통해 매번 체력을 회복하고 돌아왔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두 존재 간의 체력 차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메타트론과 바알도 마찬가지. 이번 ‘회차’를 기점으로 그들은 슬슬 자신들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 칠흑왕을 호종하면서 온 우주를 발아래로 둘 정도로 강대한 권능과 신력을 자랑하였으나, 이제는 찌꺼기만 남은 상태인 그들이 아니던가. 문제는 그 남은 찌꺼기마저도 계속 소모되다 보니 아주 자그마한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웬만한 초월자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할 만한 실력은 되었기에,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이라는 세력을 일굴 수 있었다지만.

사실 이제는 언제 붕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타트론은 그토록 위대했던 창성한 지혜가 어두워지고, 바알은 우주를 소멸시킬 것 같았던 어둑한 힘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천마와 ‘낮’은 모두 똑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위험하다.

이다음 ‘커다란 굴레’가 굴러가게 되고, 거기서 칠흑왕이 깨어나게 된다면…… 정말 그때는 여태껏 억지로 미루고 미뤘던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위기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다 같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에 잠겼다.

천마는 창공 도서관을 누비면서 자료를 찾고, 메타트론과 바알은 다과회를 수시로 열면서 대천사와 마왕들을 풀어 칠흑왕과 관련된 모든 흔적들을 지우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천마가 찾아와 다짜고짜 그들을 데리고 ‘지구’로 갔다.

지구가 먼 훗날에 생명체가 창궐하는 푸른 별이 되고, 천마의 원형(原型)이 되는 ‘손지호’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고향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행성이었다.

천마는 여기를 두고 ‘원시 지구’라던가.

하여간 표현 따윈 아무래도 좋을 이곳은 메타트론과 바알에게 있어 다른 의미로 강한 무게를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칠흑왕이 잠든 비역(秘域).

정확하게는 칠흑왕이 갇힌 공허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원시 지구가 이 우주에서 칠흑왕과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애증의 장소인 셈이었다.

다만, 지금은 원시 지구 위에 커다란 기둥이 아주 깊숙하게 박혀 있는 상태였다.

행성의 정중앙, 내핵을 꿰뚫고 나온 기둥은 양쪽 끝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메타트론과 바알도 전혀 감지하기 힘든 우주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저 끝이 공허에 닿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칠흑왕을 강제로 속박하고 있단 사실까지도.

이번 회차에서 천마는 칠흑왕과 갖은 사투 끝에 여의봉을 날리는 것으로 녀석을 도로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여의봉이 단순히 그의 애병이 아니라, 권속이자 분신과 마찬가지란 점이었다.

성(誠). 그와 가장 가까운 권속, 천룡이 바로 여의봉의 정체였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천마가 자랑하는 얼굴 중 ‘제천대성’의 힘도 가득 담겨 있었으니.

이로써 천마는 그나마 끝까지 지니고 있으려던 힘 중 태반을 날린 것과 같았다.

하나 이상하게도 그에게선 전혀 아쉬워하거나 하는 면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개운하다는 표정뿐.

여하튼.

메타트론과 바알은 왜 자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나 싶어 의문스러운 얼굴로 천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탑’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 건지.

-우리, 그냥 까놓고 말하자. 너네들 이제 더 이상 칠흑, 저 양반한테 개길 힘 없지?

-…….

-…….

-그나마 남아있던 ‘낮’의 존재도 이제 너희 둘밖에 안 남았지. 우라노스가 그나마 후손들을 남겼다지만, 제대로 각성할 기미인 녀석은 보이질 않고.

-……반박할 말이 없으니 무엇이라 답하기가 어렵군요.

-천마, 당신은 무슨 생각이 있어 보이는데?

메타트론은 쓴웃음을 지었고, 바알은 속이 답답했던지 따로 챙겨 온 쿠키를 입에다 털어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나마 그의 갑갑한 심정을 달래 주었다.

천마는 그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새로운 ‘낮’을 만드는 거다.

-음……?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물어 봐도 될까?

-말 그대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희는 구세대야. 신들 중에서도, 악마들 중에서도 너희들이 원래 누구였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 아마 저 빌어먹을 칠흑이 무엇인지 모르는 놈들이 태반일 테지.

-할 말이 없군요.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원래 구세대는 할 일 다 끝나면, 알아서 적절한 시기에 뒤로 빠지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천마가 피식 웃으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원래 늙은이들 특징이 뭔지 알아? 자기네들이 아니면 절대 아무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오히려 후손들이 똑똑하면 더 똑똑했지, 절대 모자랄 리가 없는데 말이야. 너네보다 더 잘할걸?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듯하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탑을 세우자. 그리고 그곳에서 ‘낮’의 후계자를 양성하는 거다.

-……!

-……!

-칠흑이 영원토록 깨어날 수 없도록. 우리를 대체할 만한 자원을, 인재를 개발해 내는 거지.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방식은 아주 간단해.

-여의봉. 저 안에는 내가 창세를 마무리하면서 가둬 두었던 여러 존재들이 있어. 천교나, 절교 같은…… 거기다 우마왕도 저 안에 있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아주 단단해.

-신진철이란 게, 그만큼 무섭거든.

-난 지금부터 온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신과 악마들이며 용종이나 거인족들까지, 초월을 이룬 격이라면 전부 가리지 않고 가둬 버릴 거다.

-그런다면 여의봉의 무게가 한껏 무거워져서 칠흑이 꿈틀대기도 힘들어질 테고.

-애당초 우리가 원했던 대로, 신적인 존재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이 우주를 피조물들에게 온전히 줄 수 있게 되겠지.

-다만, 이때 말했듯이 양성을 위해 각 우주와 차원, 행성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이 저절로 모여들 수 있게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차후에 신적인 존재들이 탄생해서 우주를 집어삼키려는 걸 막을 수 있을뿐더러, 칠흑에 대적할 인재 양성도 가능해지지.

-그리고 걔네 중에는 ‘낮을 온전히 대체할 만한 존재가 분명히 생겨날 테고.

메타트론과 바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천마가 던진 제안은 그들로서 도저히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아주 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장대한 세월을 살아왔고, 그만큼 깊은 지혜를 축적했기에 그들은 천마가 왜 굳이 자신들에게 이런 말을 길게 늘여 놓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천마가 원한다면, 메타트론이나 바알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강제로 신이며 악마들을 전부 여의봉 안에다가 처박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꺼낸 이유는 단 하나.

-……그 말씀은 저희가 먼저 들어가서 교통정리를 해 달란 뜻이겠군요. 마음에 드는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

-흑막이 되어 달라는 말을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으시군.

메타트론은 쓰게 웃었고, 바알은 먹던 쿠키를 입 안에 다 털어 넣었다.

살짝 구겨진 골 사이에는 고민이 많이 흘러내렸다.

이 남은 ‘찌꺼기’마저 전부 소진될 때까지 부려먹겠단 뜻이었으니까.

결국 늘그막에 쉴 틈 없이 일이나 하란 뜻이로군. 그들로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보였던 탓이었다.

그래도 바알은 그냥 순순히 승낙하기가 아니꼬왔던지,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툭 쏘아붙였다.

-그럼 천마, 당신은?

-음? 뭐가?

-우리가 구세대라며. 그래서 신 세대에게 뒤를 맡기고 물러나야 한다면서. 그럼 그건 우리와 같이 논 당신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천마는 그제야 무슨 말인가 이해했는지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만큼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난 아들이 있잖아. 녀석이 내 뒤를 알아서 잇겠지.

* * *

그러고 난 뒤.

메타트론과 바알은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을 이끌고 탑에 들어왔고.

그 뒤를 따르는 신과 악마들을 달래는 역할을 도맡았다.

물론, 천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숨겼다.

그건 휘하의 대천사들도, 마왕들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만약 비밀이 새어 나가게 된다면 겨우 잡아 놓은 천계의 질서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 테니까.

그들이 할 일은 기만(欺瞞)이었다.

철저하게 그들 두 사람만이 비밀을 깊이 간직한 채로. 불만에 찬 신과 악마들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천마와 대적하는 시늉을 하며, 어느 한 사회가 유독 힘을 얻는다 치면 교묘하게 편 가르기를 하여 힘을 빼는 등, ‘천계’라는 세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칠흑왕을 잠재우고.

언젠가 나타날지 모를, 후계자만을 기약 없이 기다리면서…….

그러한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제아무리 단단하게 선 결심이라 하여도, 뚝심을 지닌 신이라 하여도, 마음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메타트론과 바알은 꼿꼿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와중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천마가 늘 자신의 번듯한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손재원-비바스바트와 언제부턴가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낮’의 후계자로 괜찮지 않을까 점찍었던 이들이 칠흑왕의 농간으로 인해 타락에 젖거나, 손재원-비바스바트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수없이 보아야만 했다.

그래도 참았고.

또다시 기다렸다.

보상 따윈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저 평화와 정의, 그것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낮(에로스)’의 후계자가 탑 외 지역에서 탑 내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이제 그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아직 가진 힘이 부족하다지만,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그들의 뒤를 이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시(時)의 프네우마와 공(空)의 퀴리날레가 낳은 후손이며.

‘낮의 수장이었던 우라노스의 의지를 이은 이.

그리고 칠흑왕이 묻힌 지구의 출신이라면,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않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낮’의 후계자인 차정우의 영혼을 칠흑왕이 도중에 가로챈 점이라지만.

메타트론과 바알은 연우가 그것을 곧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 역시 칠흑의 세례를 받았을지언정, ‘낮’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신위 올포원의 힘을 이은 이상.

탑의 시스템, 그 자체가 되었으니 칠흑왕을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탑을 통해 그들이 선택한 정식 후계자는 차정우였으나, 천마가 마련해 둔 여러 시련들을 극복하여 정수(精髓)를 취한 건 연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다면 자신들을 비롯한 ‘낮’의 모든 권한은 차정우의 사념체에게로 계승이 이뤄질 터였다.

그 뒤에 그가 깨어나는 칠흑왕을 다시 잠재우고, 탑을 다시 빛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플레이어 차연우의 선택에 따라, 모든 시스템의 기능이 칠흑왕에게로 귀속됩니다!]

[칠흑왕과 대적한 모든 존재들이 강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게 무슨……?』

메타트론은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저 멀리 보이는 바알도 마찬가지. 마왕들을 대거 이끌고 선봉에 서서 타계의 신들을 물리치던 그의 고개가 이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당연히 ‘낮’을 응원하고, 그들이 ‘밤’을 물리치도록 도와줄 줄 알았던 플레이어 차연우가 ‘밤’을 선택했다는 말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악에 찬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로, 칠흑왕이 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사지를 속박한 쇠사슬이 이제 완전한 칠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촤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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