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알 (2)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강한 충격에 빠져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충격에 젖은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낮’의 인사들로서는 연우가 갑자기 저런 선택을 내렸으니 충격일 수밖에 없겠지.
연우의 목적이 언제나 동생의 영혼을 되찾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던 그들로서는 전혀 예기치도 못한 전향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연우로서는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낮’과 ‘밤’의 충돌이 벌어지는 내내, 그는 손재원-비바스바트의 남은 신화를 대충이나마 빠르게 훑어보았다.
완전한 소화를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는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연우는 우주 창생에서부터 탑이 세워지는 경위까지, 베일에 가려진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신화를 60.2%만큼 소화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칠흑왕이 몇 차례에 걸쳐서 깨어날 기미를 보였고, 천마와 ‘낮’은 계속 이를 버티다 결국 힘이 다한 나머지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한 일환으로 탑을 세웠다는 사실부터.
원래 손재원-비바스바트가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그도 천마를 동경하는 마음에 그 뒤를 따라 오르던 중 ‘낮’과 의견 차를 보이며 관계가 틀어졌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탑 내에 절지천통이 이뤄지고, 천계와 하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그 중앙에 손재원-비바스바트가 ‘올포원’이라는 호칭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게 되었단 것까지.
손재원-비바스바트. 그는 그 나름대로 칠흑왕이 깨어날 수 없도록 절치부심 노력해 왔다.
처음부터 칠흑왕이 꼼수를 쓰지 못하도록 그의 후예나 사도가 될 수 있는 싹들을 사전에 제거하고, 탈각과 초월을 시도하면서 타계와 접촉할 수 있는 이들까지 강 제로 억류해 두었던 것이다.
그로서는 사명(使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폭거(暴擧)나 다름없던 일이었으니.
결국 여기서 생겨난 불만들이 쌓이고 쌓여 연우와 같은 인물이 탄생하고 말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다’. 처음 칠흑왕이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오랜 궁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낮’과 대립했다. 그는 이길 수 없노라고. 대신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과 나는 절지천통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달랐다.」
「난 그냥 칠흑왕이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내버려 두자고 말했다. 아주 깊은 꿈을 꿀 수 있게.」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대신에.」
「난 그 모든 업보를 내가 짊어지고 갈 생각이었다.」
손재원-비바스바트가 남긴 몇 가지 사념들은 하나같이 깊은 절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칠흑왕을 거스르기란 어려울지 모른다는 절망. 그리고 공포.
그리고 그것은 울분이기도 했다.
천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그는 애당초 피조물로서 태어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고.
그러한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려 드는 신들에게 깊은 불만을 품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탑에 들어온 이후로 더욱더 커져 깊은 혐오가 되고 말았으니.
신들마저도 어쩌지 못한다는 칠흑을 만났을 때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피조물이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노라면, 그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일저.
그래서야 자유의사가 무슨 필요가 있고, 미래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언가를 한다고 한들, 결국 저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가 헛기침만 하여도 전부 부질없는 허상으로 그치고 말 텐데.
그래서 손재원-비바스바트는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단, 혼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내가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가리?
생전에 언제나 입버릇처럼 외치고 다녔던 말처럼, 그는 스스로 멍에를 뒤집어쓰기로 하였다.
다른 피조물들은 몰라도 된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제 길만 걸으면 된다. 만약 진실을 몰라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것은 혼자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손재원-비바스바트는 그 때부터 올포원이 되었고.
신과 악마들을 막고, 피조물들을 가리면서 어떻게든 탑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현상 유지.
모든 것이 제 위치에서 굴러가도록 내버려 두면서, 애당초 칠흑왕의 ‘꿈’이 격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영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러나 지탄과 비난만 받을 뿐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던 고난(苦難)인 셈이었지만.
그 끝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음이니.
결국 칠흑왕이라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는 그도 쉽게 바스라질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너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결국 버림을 받고 말…….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마지막에 손재원-비바스바트가 남긴 활자들은 그러한 그의 생애가 집약된 유언일지도 몰랐다.
[소화한 신화들의 활자를 재조립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태껏 가려져 있던 단면들이 드러납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계시록의 일부가 나타났습니다!]
[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시작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성공하였습니다.]
……
[계시록을 1페이지만큼 얻었습니다.]
[계시록을 3페이지만큼 얻었습니다.]
……
그렇기에.
연우는 결론을 내렸다.
‘이 부조리한 사슬들을, 전부 내가 끊어야만 한다.’
더 이상 자신이나 동생, 손재원-비바스바트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되었다.
사슬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는 없더라도, 칠흑왕을 영원토록 잠재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되풀이가 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연우는 이번엔 자신이 멍에를 짊어질 생각이었다.
단, 실패했던 손재원-비바스바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몸이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지옥으로 갈 텐가.
애당초 연우는 손재원-비바스바트처럼 비범한 영웅이 되진 못했다.
모르는 여러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애당초 자신이 그런 성격이었다면 동생의 복수를 위해서 탑을 오르지도 않았겠지.
그가 바라는 건 그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동생을 되찾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도구처럼 쓰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또한, 그러하기에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멍청한 놈.』
아들의 그런 생각을 짐작한 크로노스만이 작게 읊조릴 뿐.
촤르르륵!
[플레이어 차연우가 자신의 본체를 올려다봅니다.]
연우는 칠흑왕의 시선을 느꼈고, 어딘가에 있을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사이에도 칠흑왕의 속박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손발을 묶는 사슬이 더욱더 두꺼워졌고, 77층까지 잠식한 칠흑이 더 어둡게 일렁였다. 그 너머에서부터 칠흑왕의 존재감도 점차 또렷해졌다. ‘밤’을 선택하면서 탈각의 성질이 점차 그쪽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탈각이 진행되던 중에 새로운 이물질이 개입하였습니다. 형질 변환에 새로운 개선점이 추가됩니다.]
[탈각 속도가 더 현저히 느리게 진행됩니다. 44, 45%…….]
[‘영과’ 상태였던 영혼의 격이 변화하였습니다. 현재 상태: 칠과(漆果).]
이것은 그만큼 칠흑왕에게 점차 귀속되어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가 안쪽에서부터 휘젓기에 좋단 뜻이기도 하지.’
연우는 칠흑으로 연결된 쇠사슬 쪽으로 손을 가져가 바짝 잡았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무슨 일을 할지 의문을 갖고 바라봅니다.]
연우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칠흑왕을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사슬을 안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무슨 생각인지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공허,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칠흑왕을 그만의 완력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당연히 팽팽해지기만 할 뿐, 사슬 끝은 아무 반응도 없이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미후왕.”
화화화!
그 순간, 연우의 뒤편으로 칠흑이 잔뜩 피어나면서 미후왕의 허물이 나타났다.
『여태 날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다고, 애송이!』
그는 과거에 오행산에서 연우가 흡수한 적이 있던 미후왕의 허물이었다. 하얀 머리를 길게 흩날리면서 시니컬하게 웃는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푸르다 못해 너무 짙은 나머지 남색빛을 발하는 거룡이 똬리를 틀며 서 있었다.
성.
한때, 천마의 권속이었으며, 여의봉의 자아이기도 했던 존재.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소스 코드(Source Code)였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는가?』
청룡 성은 시스템의 화신이기도 한 연우의 생각을 짐작하였기에 근엄한 투로 명령을 실행하는 데 재확인을 요구하였고.
“없다!”
『한 점도?』
“없으니까, 빨리 서둘러!”
연우의 선택이 한 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새로운 운영 체제인 그대가 그런 선택을 내렸다면, 내가 할 일은 오로지 그 명령에만 집중할 뿐이지.』
그 말을 끝으로, 거룡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잘게 부서지면서 연우에게로 깃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와 공허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사슬 쪽으로 녹아들었다. 빛이 가신 자리에 남은 것들은 전부 여의봉의 조각 들이었다. 신진철로 이뤄진 것들. 청룡 성이 사라지면서 남긴 흔적들이며, 탑의 핵심 구성 요소이기도 했다.
[최고 등급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명령을 수행합니다.]
[명령을 수행합니다.]
……
[시스템의 모든 기능이 신진철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하려는 일을 뒤늦게 깨닫고 가볍게 탄성을 흘립니다.]
연우는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웃는 칠흑왕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는 생각에 녀석에게로 이어지는 사슬을 계속 두껍게 쌓아 나갔고, 그럴수록 칠흑왕의 존재감도 덩달아 불어나면서 확연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칠흑왕과의 채널링이 생성되었습니다!]
[단말(端末)이 생성되었습니다.]
[발신 상태가 양호합니다.]
[수신 상태가 양호합니다.]
[칠흑왕을 더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칠흑왕과 직접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핫라인이 개설되었습니다.]
……
[칠흑왕의 본체를 일부 감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연우는 칠흑왕의 본체를 찾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로써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칠흑왕은 나를 잘라 내지 못한다.’
탑의 시스템이 모두 칠흑왕과의 결속에 집중된 이상, 그가 강제로 연우를 내치려고 한다면 그만큼 그 자신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지금 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칠흑왕이 아예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연우 그 자신이 구속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포악한 이빨을 들이댑니다!]
[현자의 돌(오만·식탐·색욕)이 기승을 부립니다.]
[신화의 양이 너무 방대합니다.]
[신화의 양이 너무 방대합니다.]
……
[‘오만’의 성질이 기승을…….]
[‘식탐’의 성질이 포악함을…….]
[‘색욕’의 성질이 회유를…….]
……
연우, 그 자신이 칠흑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애당초 그가 지닌 힘이 칠흑왕에게서 기원하는 한, 본류를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는 건, 역으로 말하자면 얼마든지 본류에 닿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칠흑왕은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지, 완전히 깨어 난 상태는 아니란 점이었다. 또, 깨어났다고 해도, 형틀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는 이상 완전히 빠져 나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하물며 그것이 완벽히 의사 체계를 갖춘 자아가 아닌, 사념과 개념의 ‘덩어리’임에야.
칠흑왕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두 후계자를 두어 자신을 꿈에서 깨우기 위한 의식을 벌였던 것이겠지.
연우는 바로 이 점을 노리려 했다.
지금 자신의 신분은 무려 칠흑왕의 분신이었으니.
이는 때에 따라서 얼마든지 본체의 자아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체와의 동화 작용(同化作用)이 발생합니다!]
비에라 듄이 대지모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도 직접 녀석의 자아가 되어, 같이 저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