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알 (3)
[어뷰저 차연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밤’을 선택한 연우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메타트론과 바알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메시지: 튀어.]
『……!』
『……!』
크게 별다른 내용이 없는 메시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메타트론과 바알은 순간적으로 연우가 무엇을 노리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크게 티를 낸 적은 없어도, 두 사람은 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지켜보았고, 그가 어떤 성격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우는 절대 ‘아군’이라고 해서 쉽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포용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언제든지 이용만 하고 가차 없이 내버릴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샤논이 오래전에 만들었던 노래가 한때 두 사람에게 쓴웃음을 가져다주기까지 했을까.
그러니 저런 메시지를 주는 것 자체를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이게 함정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다만, 바알은 이것도 혹시 ‘낮’을 집어삼키기 위한 연우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주 짧게 가지기도 했지만.
철컹!
순간, 그의 손목을 감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체내에서 신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자, 연우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신위(神位)! 신위가 돌아왔다!』
『봉인이 풀렸어!』
대천사와 마왕들을 비롯해, ‘밤’을 경계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태껏 그들을 탑 안에만 강제로 억류하던 보이지 않는 구속구가.
이렇게 지낸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한 몸처럼 여겼던 인과율이.
시스템이 드디어 해제되었던 것이다!
[탑 내에 입장한 존재들에게 강제로 실시되었던 모든 구속이 해제되었습니다.]
[구속 기능이 해제되었습니다.]
[속박 기능이 해제되었습니다.]
[예속 기능이 해제되었습니다.]
……
[시스템의 클라우드에 기록되어 있던 모든 백업 데이터가 삭제되었습니다.]
[플레이어에 대한 기록이 말소됩니다.]
[신에 대한 기록이 말소됩니다.]
[악마에 대한 기록이 말소됩니다.]
[관리자에 대한 기록이 말소됩니다.]
……
[랭킹 시스템이 말소됩니다.]
[‘명예의 전당’이 삭제됩니다.]
……
[천계가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
비바스바트를 쓰러뜨리고 쟁취하겠다던. 그리고 언젠가 천마를 끄집어내리고 얻고 말겠다던 자유를 얻는 순간, 모든 신과 악마들은 기뻐했다.
그들로서는 이제 더 이상 이 좁디좁은 세계에, 돼지우리에 갇힌 것처럼 억류되어 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층계가 허물어집니다!]
[스테이지가 붕괴됩니다!]
……
[탑이 무너집니다!]
[경고! 탑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모든 기능이 신진철 형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탑 내에 계신 분들은 충격에 휩쓸리지 않도록 모두 주의하십시오.]
[경고! 아직까지 탑 내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분들은 빨리 대피하십시오!]
[경고! 탑의 붕괴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대피를 하지 않을 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
[‘밤(녹스)’이 기승을 부립니다!]
[웜홀이 더 커집니다.]
[타계(他界)와의 연결이 더 긴밀하게 이뤄집니다.]
……
[칠흑왕이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합니다.]
[약속된 종말이 찾아옵니다.]
[탑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르’뤼에가 떠오를 준비를 합니다!]
[‘밤(녹스)’의 영향으로 인해 탑의 붕괴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쿠쿠쿠쿠!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에 신과 악마들은 모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탑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칠흑이 미칠 듯이 울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조각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세상을 따라 균열이 잔뜩 퍼지더니, 하나둘씩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붕괴.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탑이……. 여의봉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그들 모두 한순간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지만.
『뭐 해? 뛰어, 새끼들아!』
바알이 있는 힘껏 마력을 담아 사자후를 내지른 순간.
『……!』
『……으, 으아아아!』
『차연우! 저 작자가 벌인 일들은 어찌하여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단 말인가!』
신과 악마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연우가 지나갈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평지풍파에 질린다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런 서로 다른 반응과 다르게 행동만은 똑같았다.
선두에 서서 ‘밤’을 막으려 하던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도 다르지 않았다.
군단처럼 진영을 갖추고 있던 대천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분대별로 흩어지면서 쏟아지는 세계의 조각들을 쳐 내기 시작했고.
마왕들은 여기저기로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각자 마기를 있는 힘껏 발출해 외부로 통하는 길을 열어젖히고자 했다.
콰콰쾅!
콰르릉, 콰릉, 콰르르-
어. 딜. 가. 느.
신. 기. 한. 것. 들.
배. 신. 자. 보. 여.
찌. 끼. 기.
우. 리. 도. 따. 라. 간.
타계의 신들은 그런 신과 악마들을 보고, 더더욱 억지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웜홀의 크기를 강제로 넓혔다. 신과 악마들의 뒤를 쫓아 ‘밤’의 영역을 강제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밤(녹스)’의 영토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칠흑왕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입장 속도가 빨라지는 타계의 신과 다르게, 천계의 신과 악마들은 탈출 속도가 많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탑에 갇혀 지내 오면서 권능의 상당수가 유실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칠흑왕의 가호를 받는 ‘밤’을 그들만으로 대적하기란 쉬운 게 절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비마질다라가 무너지는 세상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케르눈노스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납니다!]
천계에서도 상당한 이질감과 무게를 주는 두 존재가 움직였다.
[비마질다라가 아주 재미있노라며 검을 쥡니다!]
[케르눈노스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습니다!]
77층을 보며 연우가 오길 기다렸던 비마질다라는 검을 높이 들면서 크게 휘둘렀고.
케르눈노스는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시피 한 자신만의 진언(眞言)을 외웠다.
[권능이 작렬했습니다!]
[강한 충격이 이어집니다.]
[강한 충격이 이어집니다.]
……
[외부로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하늘을 따라 거대한 검흔(劍痕)이 아로새겨지고, 그것이 단숨에 확장되면서 외부로의 탈출로가 활짝 열렸다.
『언젠가 오실 그분의 종들이시여, 모두 길을 엽시다.』
『뭐해! 신 놈들한테 밀리면 다 뒈질 줄 알아!』
천계의 신과 악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일제히 확장된 검흔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메타트론과 바알의 인도에 따라, 대탈주가 시작되었다.
[엑소더스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세계와 차원의 중심을 이뤘던 탑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 * *
“타, 탑이 무너진다……!”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탑의 붕괴는 탑 외 지역에도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가뜩이나 탑에서 강제로 방출되고, 시시각각 이상한 일들만 벌어져서 걱정이 되던 차였는데.
이번에는 칠흑이 아직 차오르지 않은 탑의 윗부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것 같던 탑이 붕괴를 하다니.
신과 악마들을 가두고, 각 세계의 영웅들을 끌어모아 경쟁을 시키던 신화의 세계가 주저앉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잠깐.”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데?”
“저건 무너지는 게 아니라…….”
“탑이 어둠을 감싸고 있어……?”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천계의 집단 탈출을 보다 말고,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던 탑 윗부분의 파편들이 칠흑의 표면을 뒤덮기 시작했던 것이다.
찬란한 황금색을 자랑하는 탑이 계속 확장을 시도하려는 칠흑을 억지로 덮으려는 모양새. 황금색과 칠흑색이 서로 복잡하게 뒤엉킨 구체(球體)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형,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차정우의 사념체는 처음에 느꼈던 ‘알’의 형상이 서서히 모양을 갖춰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플레이어들이며 신과 악마들, 심지어 관리자들도 전부 빠져나온 마당에 연우만이 저곳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칠흑을 탑의 파편으로 억지로 뒤덮는 건, 분명히 칠흑왕의 재림을 막으려는 시도일 터.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연우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만약 그도 같이 빠져나오려 든다면 칠흑을 가둔 탑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는 건, 그도 저곳에 남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미친 새끼가!』
차정우는 그제야 연우의 의도를 완전히 읽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미 형에 대한 존중 같은 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조급한 마음뿐.
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형이 저런 미친 짓거리를 하려 들면 옆에서 뜯어말려야지, 그걸 내버려 두면 어쩌자는 거냐고……!
차정우는 탑이 있는 쪽으로 뛰쳐나가고자 했다. 그런 그를 다급하게 아난타가 가로막았다.
“뭘 하려는 거야?”
『아난타, 비켜 줘. 제발!』
“설마 저기로 가려는 건 아니지?”
『저기에 형과 아버지가 있다고!』
“무슨 소리야! 저렇게 위험한데 당신이 어떻게 하겠단……!”
아난타가 절대 보낼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가로젓던 그때.
콰아아앙!
갑자기 폭음이 울리면서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확 쏠리는 여러 기운에 차정우와 아난타의 시선이 덩달아 그쪽으로 쏠렸다.
아직 탑의 조각이 덮지 못한 칠흑의 표면 위로, 거대한 구멍이 뚫리면서 신과 악마들이 집단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신과 악마들이 내뿜는 기세가 금세 탑 외 지역을 가득 메웠지만, 이상하게도 칠흑에게서 일렁이는 불길한 기운 때문인지 플레이어들은 위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신과 악마들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것 같았다. 중급이나 하급의 격들은 대부분 죽고, 상급의 존재들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비바스바트와의 전쟁 중에 상당수가 희생된 데다가, 타계의 신들의 침입을 막다가 죽은 이들도 많기 때문에 이미 천계의 숫자는 기존의 4할 아래로 줄어든 상태였다.
문제는 그들의 뒤를 쫓아, 타계의 신들도 덩달아 같이 튀어나오려 한다는 점이었다.
먹. 어. 야.
삼. 켜. 야.
꿈. 이. 한. 가. 득.
[‘밤(녹스)’이 출현하였습니다!]
차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드래곤 슬레이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본능적으로 등골을 따라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밤(녹스)’가 ‘낮(에로스)’의 후계자를 감지하였습니다.]
[‘밤(녹스)’가 옛 배신자의 무리인 ‘낮(에로스)’를 처단하고, 이 세상을 다시 영겁의 혼돈으로 회귀시키고자 합니다.]
[‘밤(녹스)’가 ‘낮(에로스)’의 후계자를 처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때, 천계의 신과 악마들을 쫓아 나왔던 타계의 신 중 한 마리가 차정우를 발견하더니, 단숨에 이쪽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