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알 (5)
[대탈출이 진행 중입니다!]
[‘밤(녹스)’이 당신들을 주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방해가 계속 이어집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타계의 신과 외신들의 견제 속에서.
아가레스와 동마왕군은 억지로 조금씩 길을 열어 갔다. 그 와중에 죽어 나가는 마왕들도 있었지만, 일행들은 어느 누구도 그쪽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가레스조차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 하나를 돕겠답시고 어설프게 나섰다간 일행들 모두가 전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죠?”
아난타는 차정우를 업은 채로 수도 없이 명멸하는 빛무리들을 보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아가레스에게 물었다.
아가레스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와 잠든 차정우를 번갈아 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방주(方舟).』
“방주? 그게 무슨……!”
『‘낮’의 망령, 퀴리날레 가가 남긴 유산이야. 듣기로는 마지막 후예가 남겼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봐라. 지금은 활로를 여는 데만 집중해도 정신이 없으니까.』
“…….”
워낙에 대답이 차갑게 돌아오는 통에 아난타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원래 같았으면 저딴 싸가지 없는 태도에 한마디라도 쏘아붙였을 테지만.
지금은 어쩐지 저리도 냉막한 모습이 북받치는 감정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비쳤다.
바로 그때.
『저희도! 저희도 돕게 해 주세요!』
왕, 왕왕!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우렁찬 목 소리가 들렸다.
일행들의 시선이 곧장 위쪽으로 쏠렸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강림합니다!]
검은 벼락과 함께 줄지어 나타난 존재들은 하계에서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거대 사회, 니플헤임의 악마들이었다.
특히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고 있는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의 위용은 전장을 거의 뒤덮을 정도로 아주 대단했다.
……강아지처럼 반갑다는 듯이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어 대는 펜리르와 이쪽을 보면서 군침을 질질 흘려 대는 헬의 모습만 뺀다면.
『저, 저, 저곳에 있는 사람이 차정우 님……! 우리 연우 님이 그토록 구슬프게 찾아 헤매던……! 정말 똑같이 생겼잖아! 거기다 세, 세샤까지! 스크린으로만 보던 분들이 여기에 다 있어! 이 헬은 오늘 너무 행복해서 죽을지도 몰라!』
『……쓸데없는 소리일랑 그만하고! 아가레스, 방주가 있다고 했지? 어디냐?』
요르문간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과 여동생을 보면서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급한 어조로 아가레스를 돌아보았다.
『시나이.』
『과연……. 언약궤가 묻혀 있던 지성소(至聖所)인가. 알았다.』
요르문간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휘하의 악마들을 돌아보았다. 평상시 나사가 한두 개쯤 빠진 두 사람을 대신해 그는 언제나 악마들을 다스리는 위치를 고수해 왔다.
『아버지, 로키의 명령이다. 오늘은 우리의 사회가 처음으로 세상에 우리가 있음을 포고하는 날이니, 모두 날뛰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플헤임의 악마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르 인페르날이 패도적이고 절교가 날카로운 느낌을 자랑한다면, 그들은 대개 흉포한 성질을 자랑했다. 마치 길들이지 못한 야수와 같은 살의.
그렇게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가 확산되는 가운데.
쿠쿠쿠쿠!
별안간 그들이 지나던 대지가 거칠게 요동쳤다. 그리고 탑 외 지역이 그대로 아래로 무너지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여태껏 탑 아래에 숨겨져 있던 대륙이 떠오르고 있었다.
[공간이 함몰됩니다!]
[좌표가 삭제됩니다!]
……
[‘약속된 땅’이 떠오릅니다!]
르’뤼에.
우둔하기만 했던 칠흑왕이 공허에 처박히기 전에 가졌던 ‘살점’.
칠흑왕의 육신이 영혼과 정신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밤(녹스)’이 세계를 가득 물들입니다!]
* * *
『으, 으아아악!』
『칠흑에…… 칠흑에 이대로 묻힐 수는 없……!』
탈주를 시도하거나, ‘밤’과 싸우는 등 여러 사회들은 저마다 다른 대응책을 보였다.
하지만 대개 그들을 맞이한 운명은 동일했다.
죽거나, 스러지거나.
혹은 저물거나
끝도 없이 쏟아지는 타계의 신에게 사냥당하고, 아래에서 꿀렁대고 있는 칠흑으로 잠기고 마는 것이다.
칠흑은 칠흑왕을 이루는 염, 그 자체. 즉, ‘꿈’을 의미한다. 칠흑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꿈’에 완전히 잠긴다는 뜻이니, 자아를 잃은 존재의 소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영락 혹은 타천만큼이나 두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르’뤼에의 등장이었다. 르’뤼에는 칠흑왕의 세포에 불과하나, 저것은 절대 이 우주에서 형성될 수 없는 성질의 것.
모든 물리적 법칙을 거부하는 태초,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의 성질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닿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그냥 원시적인 물질로 회귀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어떻게든 저것을 막아야만 해……!』
그리고 ‘약속된 땅’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큼, 저것이 나타났다는 것은 칠흑왕이 눈을 뜰 때가 임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르’뤼에는 곧 자가 증식을 통해 육체를 마련할 것이고, 곧 공허에서 깨어난 칠흑왕이 그 위에 내려앉을 것이니.
그렇기에 일반적인 신과 악마들은 모를지언정, 계시록을 조금이라도 볼 기회가 있었던 상위 이상의 신과 악마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꿈틀!
꿈틀!
처음엔 그저 단순한 거대한 땅덩어리로만 보이던 르’뤼에는 어느새 거대한 세포 덩어리가 되어 살아 있는 것처럼 거세게 고동치고 있었다.
살덩이 위로 바짝 오른 혈관에 피가 맹렬하게 돌아다니고, 자그마한 세포들이 마구잡이로 증식을 시작했다.
삽시간에 수십 수백 배로 불어나면서 세계를 뒤덮어 가는 모습은 끔찍하다 싶을 정도였으니.
가뜩이나 혼란으로 젖었던 탑 외 지역은 곧 르’뤼에의 안쪽으로 뒤엉켜 사라질 것 같았다.
“…….”
하르모니아는 드높은 상공에서 그런 광경을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잠들어 있던 약속된 땅, 르’뤼에가 떠오른 지금.
그녀는 이것이 세계를 뒤덮고, 탑을 흡수하여, 그 속에서 깨어날 칠흑왕의 정신을 수용할 수 있도 록 인도하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손쉬운 마지막 과정만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르모니아는 언제부턴가 르’뤼에가 증식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할 뿐, 손을 대지는 않고 있었다. 의식(儀式)도 도중에 끊어져 르’뤼에가 탑을 덮지는 않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짜 ‘알’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 * *
[칠흑왕은 자신의 분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칠흑왕은 자신의 분신이 과연 ‘분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을지를 의아해합니다.]
[칠흑왕은…….]
……
칠흑왕과 관련된 메시지는 언제부턴가 연우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데이터가 근원으로의 업로드를 시도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성공하였습 니다.]
[업로드를 위한 과정이 시작됩니다. 데이터가 유실될 우려가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귀의(歸依)가 시작됩니다.]
……
[모든 영혼이 귀의합니다.]
[모든 자아가 귀의합니다.]
……
[모든 신위가 귀의합니다.]
[모든 신화가 귀의합니다.]
[단말(端末)이 유실되었습니다.]
[기존에 남아 있던 어뷰저 차연우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
[어뷰저 차연우의 데이터를 클라우드 시스템에 모두 백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백업된 데이터를 로딩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해당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메모리 할당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백업된 데이터가 리로딩을 시도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알 수 없는 이유가 전면 차단되었습니다.]
[리로딩이 불발됩니다.]
연우는 칠흑왕의 근본을 오롯이 인지할 수 있게 된 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데이터를 압축시켜 공허에다 집어던졌다.
그 과정에서 육체는 물론이고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이 칠흑에 묻혀 한낱 ‘꿈’의 파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칠흑왕에게 패배를 하여도 가장 먼저 먹히고 말 테니, 그럴 바엔 배수진이라도 쳐 보자는 생각에서 선택한 시도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우가 노린 것은 칠흑왕에 대한 완전한 종속(從屬).
아니, 구속(均束)이었다.
단순히 칠흑왕이 자신을 구속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칠흑왕을 구속할 수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탑’이라는 매개체가 있었으니, 자아를 칠흑에다 던진다면 탑의 시스템도 덩달아 칠흑으로 같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칠흑과 탑의 시스템에 더욱더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탑이 완전히 칠흑에 동화되어서야 그저 단순한 구속구에 불과할 테니까.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칠흑왕은 분명히 탑을 어떻게든 치워 내려 할 터였다.
아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우가 동화된다면 탑의 시스템도 칠흑으로 귀화된다는 뜻이니,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연우로서는 반드시 자아를 깨울 필요가 있었다. 시스템에 대한 제어권을, 정확하게는 주도권을 내어 주지 않아야만 했으니까.
물론, 무한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칠흑의 한가운데에서 자아를 깨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연우는 당장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음검.
의념을 강화하여 세계의 물리 법칙까지 강제로 비틀어 버리는 음검이라면, 의념 통천(意念通天)을 발휘하여 자아를 계속 유지케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런 시도를 여러 차례 해 보기도 했었으니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음검마저도 칠흑이라는 ‘꿈’에 바스러져 전혀 없던 사실이 되고 말았고, 자아는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업로드가 이뤄지고 있던 중에 일부 손상될 우려가 컸던 것을, 전혀 훼손된 것 없이 무사히 성공하게 해 준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연우도 정작 믿고 있던 건 따로 있었다.
[상태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현재 상태는 ‘칠흑’입니다.]
……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특성 냉혈.
아버지 크로노스 때부터 시작되어 연우에게까지 이어졌던 특성이, 영원토록 칠흑을 떠돌아다닐 수도 있었던 연우의 데이터를 완전히 깨우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부족한 메모리가 강제로 할당되었습니다.]
[백업된 데이터가 리로딩됩니다.]
[성공하였습니다.]
……
[상대 이상이 해지되었습니다.]
[칠흑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어뷰저 차연우의 자아가 깨어납니다!]
연우는 눈을 활짝 떴다.
‘성공했나?’
[새로운 감각이 열렸습니다.]
[육신통 중 세 번째, 타심통(他心通)을 획득하였습니다.]
……
[천안통과 천이통과 타심통의 복합 작용으로 인해 기존에 인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관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칠흑을 관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우는 어그러지던 감각 체계가 완전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키키키킥.
결국 왔어! 왔다고!
거봐. 내가 뭐라고 했나! 저것은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저게 ‘몇 번째’의 나였었지?
정말 대단하군. 여태껏 ‘꿈’이 스스로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기대를 걸어도 되는 건가?
과연, ‘우리’를 ‘나’로 바꿔 줄 수 있을는지. 그건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
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너무나 많은 양의 활자들과.
대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마성(魔性)의 시선들을.
그리고.
‘꿈’의 조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나열된 다중 우주(多重宇宙)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