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98화 (698/862)

23화. 알 (6)

-이제 좀 그만해라. 지치지도 않냐?

-그. 저. 우. 리. 는. 깨. 어. 나. 려. 만. 할. 뿐.

태초에 우주 창생이 시작되기 직전, 거대한 칠흑과 전쟁을 치르는 천마가 보였다.

-יהי אור(빛이 있으라).

그리고 그런 칠흑왕을 공허 속에 유폐시키고 난 뒤, 천마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며 언령을 외치는 광경도 있었다.

한 점의 빛과 함께 우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대들은 무지하오! 또한, 무모하오! ‘낮’을 밝히는 횃불이라 더 이상 말할 수 없단 말이오!

어쩐 일인지 눈물을 흘리면서 메타트론과 바알에게 저주를 퍼붓는 비바스바트도 있었고.

-그러니 묻지. 너는 ‘몇 번째’의 나인 거지?

칠흑의 늪에 손을 담갔다가, 마성에 젖어 드는 크로노스도 보였으며.

-또 ‘굴레’가 이렇게 되감기는구나. 종말은 이렇게 또다시 유예 되는 것이고…….

어둠으로 가려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뭐라고 혼잣말을 떠드는 세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게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다행히 이 늙은이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남아 있으니, 이 저주를 완전히 씻어 내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눌러 두고 견제할 수는 있겠지.

-전부 대가리 박아.

-넌 누구냐?

연우가 겪었던 신화들. 그저 단순히 퀘스트로만 수행해 ‘이야기’로만 그쳤을 일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크로노스에 빙의되어 그가 겪었던 일들이며, 프네우마의 하늘을 얻기 위해서 저질렀던 사고들까지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연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한때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며, 세계였지만.

지금은 ‘없는’ 세계라고.

* * *

연우가 항상 계시록을 볼 때나, ‘낮’의 존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 던졌던 의문이 있었다.

그건 바로 대체 ‘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었다.

꿈.

칠흑왕은 공허 속에 처박힌 채 기나긴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우주를 창생할 수 있었다는 말까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칠흑왕이 저문 자리에 나타난 것이 천마의 우주라면, 어째서 그 우주는 칠흑왕의 ‘꿈’으로 표현되는가?

그리고 인간을 비롯해 수많은 피조물들이 가진 무의식의 근간, 원형(Archetype)은 어째서 칠흑왕이 머무는 심연에 닿아 있던 걸까?

또한, 죽은 영혼들은 윤회전생을 돌고 돌아, 가장 먼저 칠흑왕의 심연을 한껏 유영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까?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오랫동안 칠흑왕의 힘을 겪어 보고, 그의 분신까지 되면서. 그리고 직접 칠흑왕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면서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칠흑왕은…… 역시 단순하게 딱 뭐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던 거였어. 개념에 가까운 것이지.’

태초 이전의 물질. 우주 창생과 함께 태어난 후대의 존재들이 어떻게 관측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존재인 셈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우주 창생은, 그 자체만 봐도 칠흑왕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우주 곳곳에 칠흑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니까.

피조물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무의식을 비롯해 영혼의 순환까지…… 죽음, 어둠, 꿈, 영혼, 겨울, 악, 파괴 등 세상을 구성하는 마이너스적인 개념들은 전부 ‘칠흑왕’, 그 자체라고 봐도 되는 것이리라.

‘대립된 위치에 있는 천마와 나란히 세우면 이원론(二元論)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렇게 세상 곳곳에 남아 있는 칠흑왕의 흔적들은 ‘꿈’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들은 칠흑왕이 눈을 뜬 순간, 전부 단순한 허상으로 화해 바스러지고 말 테니.

연우는 그제야 칠흑왕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존재이고, 그것을 강제로 억누르는 천마와 ‘낮’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 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너무 많아. 신과 악마들이 여태껏 소유할 수 있었던 우주와 차원은 그냥 한 줌에 불과했을지도…….’

비록 연우가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건 그러한 우주들에서 빚어지는 단편적인 광경에 불과했지만, 그것만 해도 연우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아득하게 넘어설 만큼 방대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도.

‘이것이 전부…… 칠흑왕이 꾸고 있다는 ‘꿈’.’

제아무리 ‘황’에 근접했다느니, 신왕의 격을 갖추었다느니 해도, 결국 칠흑왕 앞에서는 한 줌의 모래 알갱이에 불과했으니까.

냉혈 특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자아를 유지하지도 못했겠지.

과연 이런 것들을 전부 집어삼키고, 주인격이 될 수 있을지 까마득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푸하하하! 너를 선택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바로 그때, 연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어뷰저 차연우의 신화 중 일부가 칠흑을 매질 삼아 구현됩니다!]

[구현된 신화: 기어 다니는 혼돈]

파스스-

돌연 잿빛 구름이 뭉치더니 연우를 닮은 형태를 떴다.

그것을 본 연우의 눈이 커졌다.

그건 분명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꿈’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지. 꿨다가 끝나면 그걸로 끝이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덧없다고 하기도 힘든 법이지. 누군가가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야.』

기어 다니는 혼돈. 정확하게는 연우가 크로노스의 신화를 체험하면서 ‘밤’으로부터 흡수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이었다.

칠흑왕의 어여쁨을 받았지만, 근원이나 다름없던 칠흑왕에 대한 탐구심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던 자.

『여하튼 이렇게 우리 아둔한 아버지의 곁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요그-소토스, 그치가 알면 그렇지 않아도 컸던 눈이 아주 왕방울만 해지겠어! 하하하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웃음소리에는 점차 광기가 묻어났다.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해. 이토록 많은 세계들이 전부 수용되었다는 건, 초끈에 따른 무한한 인플레이션을 동반한다는 뜻일 테고…… 그중에서 확정될 수 있는 건, 인지와 관찰의 해석에 따른 변곡점을 기준으로 잡는다는 건가? 아냐. 그건 결정론이 무의미해지는 데다가, 이토록 많은 시선이 있어서야 다세계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해질……!』

기어 다니는 혼돈은 저 혼자만이 알 수 있을 말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다가, 갑자기 도중에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봐, 인기남. 이렇게 많은 아버지의 시선들이 보고 있는데, 뭐라고 응답이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에게로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과 사념, 그리고 인격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연우 역시 그러한 시선과 인격들 중 한 명의 자격으로 있다는 것도.

“넌 왜 나온 거지?”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살며시 좁혔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보고 싶었을 뿐.』

“무엇을?”

『태초 이전의 태초! 어둠 이전의 어둠! 혼돈 이전의 혼돈! 바로 아버지의 진짜 모습!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의 눈동자가 기이한 광망을 뿌렸다.

『이 우둔한 아버지의 끝.』

녀석의 눈동자에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비쳤다.

『꿈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다.』

“…….”

연우는 아주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머릿속을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던 탓이었다.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칠흑왕의 끝을 보고 싶다니. 그게 ‘밤’을 상징하는 혼세팔신이던 놈이 할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녀석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럼 그렇다는 건,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거군?”

연우에게는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씩이나 되는 녀석이 방해를 하려 들면, 이 마성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쓸데없이 귀찮아질 테니까.

『당연하지.』

다행히 기어 다니는 혼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그 순간, 연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중 우주 곳곳에서 수많은 마성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칠흑왕이 까마득한 시간을 영유하면서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피어난 무의식의 잔재들. 혹은 ‘꿈’의 허물들.

그것들 모두가 칠흑왕의 주인격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던 찌꺼기였다.

[6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화아악!

연우는 등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용의 날개를 한껏 드러냈다.

탈각과 함께 7차 용체 각성도 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지, 일부 비늘에서 허물이 조금씩 벗겨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단되었던 탈각이 재진행됩니다!]

[현재 주변의 알 수 없는 영향으로 인해 탈각의 진행 속도가 많이 더딥니다. 47.2, 47.3…… 47.6%…….]

[현재 상태는 ‘칠과’입니다.]

[7차 용체 각성이 탈각과 함께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각성을 무사히 완성하기 위해서는 탈각을 끝내야 합니다.]

[현재 어뷰저 차연우의 속성은 ‘밤’입니다.]

『하하하! 그렇군. 이곳에서 탈각을 시도하면서 단번에 다른 마성들을 압도하고, 주인격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인 건가? 더딘 진행은 그 경쟁에서 처치한 마성을 흡수하는 것으로 보충하고……?』

기어 다니는 혼돈은 단번에 연우의 노림수를 알아차리고, 다시 한번 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연우가 다른 데이터는 망가지더라도, 냉혈 특성과 함께 반드시 지키고자 했던 권능이 하나 있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었다.

그것만 있다면, 다른 데이터는 소실되거나 훼손되어도 어떻게든 역전을 꾀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칠흑왕을 대변하는 수많은 자아와 사념들과 전쟁을 치르고, 처치한 녀석들을 일일이 삼킨다면.

그리하여 칠흑으로 환원된 것들을 양분 삼아 더디게 진행되는 탈각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테니, 다른 마성들보다도 더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콰아아앙!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추론에 전혀 대답을 하지 않고, 가장 먼저 근방에 있던 세계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연출되는 세계와 세계 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여러 활자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15구골의 ‘꿈’을 꿨던 그놈이 몇 번이고 이를 갈았었는데. 상대로 가장 먼저 나를 선택한 건가? 시건방진.

아니. 어쩌면 이것이 더 재미날지도.

활자가 뭉친 인형(人形)은 연우를 향해 주먹을 거세게 내밀었다.

쾅!

쿠르르르-

스퀴테와 주먹이 작렬한 자리로 거친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거기서 삐져나온 것은 불똥이 아닌 짙은 어둠이었다. 마성이 자리 잡고 있던 세계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금방 왜곡되었다.

그 순간.

띠링!

[시나리오 퀘스트(칠흑왕의 야욕 II)에 이어 새로운 연계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칠흑왕의 야욕 III]

설명: 칠흑왕은 이제 지난날 자신을 배반하였던 ‘낮’을 물리치고, ‘밤’을 가져오면서 천마의 흔적들을 물리치고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지 모를 미몽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칠흑왕은 너무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나머지 일어나는 데 아주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비몽사몽인 상태인 정신을 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칠흑왕이 자아를 온전히 갖출 수 있도록, 칠흑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원하는 바대로 주인격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달성 조건:

1. 천마가 만든 탑을 더더욱 많은 칠흑으로 잠식시켜 성전(聖殿) 구축을 완성하십시오.

2. 칠흑이 산재된 ‘꿈’의 조각(세계)에는 마성이 하나씩 배당되어 있습니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더 많은 ‘꿈’의 조각을 쟁취하십시오.

3. ‘꿈’의 조각이 커질수록 ‘밤’의 진정한 주인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칠흑왕의 분신

제한 시간: -

성공 시: 칠흑왕의 주인격.

실패 시: 사라진 ‘꿈’의 조각.

연우와 함께 칠흑 안쪽으로 침투되었던 시스템이, 연우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새로운 시나리오 퀘스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배틀 로얄.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벌이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겠군.

나도.

나도 하겠어.

‘우리’를 ‘나’로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시험을 해 봐야 하지 않겠나.

단순한 그릇일지. 단순한 알일지. 보면 알겠지.

곳곳에서 여러 활자들이 조합되면서 나타난 마성들이 일제히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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