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99화 (699/862)

24화. 알 (7)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연우는 언제부턴가 시간 개념이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 * *

1일째.

연우는 한 명의 마성과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아주 재미지구나. 말로만 듣던 것만큼이나 제법이야.

마성은 한동안 연우를 괴롭혔던 녀석보다 훨씬 강한 힘을 자랑했다.

마성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녀석들이 태어난 세계와 쌓은 업, 그리고 보낸 세월만큼 격도 천차만별인 게 틀림없었다.

가장 가까운 녀석이기에 선택했지만, 놈은 연우와 비등한…… 아니, 어쩌면 더 강할지 모르는 힘을 자랑했던 것이다.

아마 녀석만 따로 분리해서 본다면 고대신이나 혼세팔신쯤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만큼이나 월등한 격을 지닌 존재가 그저 칠흑왕의 아주 ‘사소한’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연우를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 데 더해 환경적인 요건마저 녀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곳곳에 칠흑이 산재해 있다 보니, 팔이 날아가도 금세 수복이 가능했다.

체력이나 마력의 한계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연우와의 싸움이 계속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더 강해져 갔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싸움법을 조금씩 되찾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연우는 냉혈 특성을 이용해 아직까지 칠흑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상태. 칠흑의 힘을 자유자재로 끌어다 쓸 수가 없었다.

체력과 마력은 물론,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연우도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자의 돌(오만·식탐·색욕)이 계속되는 ‘칠흑’의 상태에 강하게 저항합니다!]

[‘오만’이 기승을 부립니다!]

[‘식탐’이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하고 군침을 흘립니다!]

[‘색욕’이 매혹을 위해 강한 향을 뿌립니다!]

이미 3개의 영혼석과 완전히 동화가 된 현자의 돌은 각각의 성질을 차례로 드러내면서 연우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오만의 성질은 연우에게 절대 지지 말라며 더 많은 마력을 실어다 나르면서 위력을 증폭시켰고.

식탐의 성질은 ‘하데스의 식령검’을 이따금 드러내면서 마성의 목덜미를 물어뜯고자 했으며.

색욕의 성질은 계속 연우를 이물질처럼 취급하는 칠흑에 동화되고자 활발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마성과의 격차를 어찌어찌 메울 수 있는 수준까진 이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기를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싸움은 오로지 연우의 몫이었다.

‘거기다 이놈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들도 투성이고.’

연우는 주변을 뺑 에워싼 마성들을 보면서 차갑게 입술 끝을 비틀었다.

수만? 수억?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바글바글한 마성들은 흥미진진하게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이목구비 없이 새카만 얼굴만 하고 있어 표정 따윈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보이는 세계의 ‘나’여. 그대는 우리 중에 천마의 혈육을 유일하게 죽여 본 업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만한 격을 증명해 보아라.

연우는 대답 대신에 하늘 날개를 크게 활짝 피워 올렸다.

화르륵!

[‘투쟁’의 신화가 맹렬하게 빛납니다!]

검뢰와 함께 검붉은 불길이 작렬했다.

* * *

2일째.

연우는 왼팔이 잘렸다.

* * *

15일째.

오른쪽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갔다.

하지만 덕분에.

[마성134,298,111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마성에 대한 식령을 시도합니다.]

겨우겨우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엔 나야.

쉴 틈도 없이 다음 차례를 맞닥뜨렸다.

[칠흑을 빠르게 소화합니다.]

[합성되는 인자에 새로운 변화가 주어집니다.]

[더뎠던 탈각의 진행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집니다. 49.4, 49.5…… 49.7%…….]

* * *

43일째.

[‘만능 복원’이 맹렬하게 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채독’이 마성98,423,964,593을 중독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사흘 차로 줄였나?’

처음에는 마성을 한 명 처치하는 데 보름이 걸렸던 것이 이제는 사흘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연우는 점차 녀석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팔다리가 잘렸다가 수복되기 일쑤였고, 이따금 아트만 시스템이 과부하 상태에 잠겨 정지될 때도 있었다.

마력을 너무 과도하게 출력하면서 육체와 정신이 한계선까지 위태롭게 내몰리기도 했던 것이다.

언제나 무한하게 마력을 뿜어낼 줄 알았던 현자의 돌도 극한으로 몰린 탓에 달아올라 있었다.

[‘오만’이 현자의 돌에 가중된 과부하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합니다.]

[‘식탐’이 부족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칠흑을 필요로 합니다.]

[‘색욕’의 효과가 많이 약화됩니다.]

죽인 마성들을 이리저리 흡수하기도 했지만, 그중 태반이 육체 재구성을 위해 탈각의 양분으로 쓰이면서 마력 보충에는 상대적으로 들어가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흡수한 칠흑을 전부 마력으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피로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그는 쉬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마성들이 절대 연우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이지 않고, 일대일 생사결을 선호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신을 가다듬을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더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를 악물고 스퀴테를 꽉 쥐었다.

어쨌거나 이 끝도 없이 이어질 싸움에서 그는 이겨야만 했다.

그래야 동생을 무사히 구하고, 그가 살 수 있는 터전을 보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 * *

250일째.

연우는 비로소 마성 하나를 상대하는 시간을 사흘에서 하루로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마성에 대해 추가적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완전한 자유의사를 갖추고 있어.’

처음 맞닥뜨릴 때에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했다지만, 이제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마성은 하나하나가 별도로 완전히 분리된 인격체였다.

성격도 각자가 다 달랐고, 저들끼리 친분을 유지하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무리를 이루기도 해서 리더로 보이는 녀석도 있었고, 실력에 따라 나뉜 계급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녀석도 있었다. 그 외에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다니는 녀석이 있기도 했고.

천계의 사회나 혹은 타계 신들의 질서와 똑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고 있는 기술이며 권능, 특성도 다 다르고…… 지금은 칠흑에 종속되어 있지만, 원래는 각자가 다른 곳에서 발원한 존재란 뜻이겠지. 나처럼.’

이들은 연우, 자신과 똑같았다.

저마다 각자 다른 ‘꿈’, 즉 세계에서 살았던 존재들.

그러다 어떤 일들을 계기로 칠흑왕으로부터 후예 혹은 분신으로 지목되어 그를 깨어나게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이들이 틀림없었다.

‘칠흑왕…… 아니, 칠흑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깨지고 만다면 결국 그 영혼은 완전히 칠흑에 침식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마 그 과정에서 저들이 살던 세계는 한낱 ‘꿈’으로 저물고 말았을 테고.

연우는 궁금했다.

한때는 각자의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인연을 가지고 살았을 저들 중에도 자신처럼 감히 칠흑왕에게 대적할 생각을 가졌던 작자가 있었을까?

칠흑왕이 여전히 잠에 들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시도들이 전부 실패했다는 뜻일 테니……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기도 했다.

물론, 저들이 대답을 해 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 * *

599일째.

연우는 드디어 두 명의 마성과 한꺼번에 싸워도 승기를 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 * *

1천 일이 지났을 때,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고.

2천 일이 지났을 때, 다섯 명의 합공에서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강해진다. 강해져.

시건방지게 ‘우리’에게 도전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확실히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나도. 나도 확인해 보겠어!

그리고 5천 일쯤 지났을 때.

연우는 이제 생사결을 고집하지 않고, 무리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무수히 쏟아지는 마성들을 상대로도 절대 승기를 놓치지 않았으며, 자신이 다치는 것을 전혀 고려치 않으면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리고 또 이겼다.

그것은 마치 언제가 존재했다는 수라계(修羅界)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싸움만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곳이었으니.

그야말로 무한투(無限鬪)라는 단어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탈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63.6, 63.7%…….]

[현재 상태: 극종(克種).]

다만, 문제가 있다면, 연우가 이제 극도로 지쳐 가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 봐야 하나.

하지만 마성들이 그러한 연우의 상태를 고려할 리 만무했고.

마성들 중에서도 항상 뒤로 빠진 채 연우를 관찰하기만 하던 ‘수장’들이 슬슬 흥미를 보이며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칠흑왕이라는 존재의 의사를 결정짓는 이들.

당연히.

연우의 피로도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1만 일?

혹은 10만 일?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을지도.

연우의 의식은 언제부턴가 희미한 촛불처럼 밝혀졌다가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언제 완전히 칠흑에 저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로 지속되고 있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만약 특성도 없었더라면 의식 따윈 완전히 날아가 버렸을 테지.

그리고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나 겨우 사념들이 다시 뭉쳐 과거에 연우였던 기억을 가진 새로운 마성이 눈을 떴을 것이다.

칭찬하지.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아주 대단한 것이다. 너 같은 존재는 처음이니.

그때, 계속 이어지던 무한투가 잠시 중단되었다.

대신에 마성들이 뒤로 물러난 곳으로, 새로운 마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뛰어난 면은 보이지 않는 녀석. 아니, 오히려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이렇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쳤을 녀석이었다.

하지만.

모양새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제천대성……?’

연우는 어쩐지 저 검은 막을 치우고 나면 익숙한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쳐다보니 처음 받았던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휘휘휘!

녀석의 주변으로 활자들이 마음껏 춤을 췄다.

참으로 인간이란 생물은 신기하단 말이지. 한낱 피조물 주제에……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들 중에서도 가장 약해 빠진 축에 속하면서도 이따금 새로운 모습들을 보이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알고 있나? 원래 칠흑이 담길 ‘그릇’은 피조물 따위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란, 본디 ‘꿈’의 아주 자그마한 티끌에 불과하거든.

칭찬? 감탄?

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겨우 보이는 활자들을 읽으면서도, 녀석의 속내를 도저히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을 거면, 그냥 덤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마도 그러하였고…… 원래 우리들은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할 존재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천마도 결국 끝끝내 ‘우리’를 잠재우는 데 힘이 다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이지 않나?

그러니 제안하지. ‘우리’의 일부가 되어라. 비록 ‘나’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대를 인간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지. ‘꿈’에서 같이 깨어나는 거다. 이 또한, ‘나’가 되겠다던 그대의 소망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녀석이 마성들 중에서도 얼마나 대단한 위치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연우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을 아주 흡족하게 평가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최근에 본 ‘그릇’ 중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분신이 앉을 왕좌를 내어 주겠노라고 제안합니다.]

어떤가?

세 글자의 활자가 뱅글뱅글 돌면서 연우의 앞에서 가볍게 터졌다.

거기에.

“정우의 영혼을…… 돌려줘.”

연우는 이제 거의 잊다시피 한 육성으로 직접 말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버티게 했던 이유를.

동생의 영혼만 되찾을 수 있다면, 사실 주인격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이들과 동화되어 마성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했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네. 그것은 ‘우리’를 해방시켜 줄……. ‘나’가 깨어날 수 있게 해 줄 중요한 열쇠라.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연우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잔말 말고 꺼져!”

흠. 어쩔 수 없나…….

녀석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씁쓸해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연우 쪽으로 손을 뻗쳤다.

아주 느릿한 동작.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 얼마든지 옆으로 쳐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쩐지 연우는 녀석의 손이 얼굴을 덮어 올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져야만 한다고?’

연우가 답답한 마음에 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때.

번쩍!

[권속 ‘브라함(호문클루스·신)’이 남긴 안배가 발동합니다!]

[‘태양의 서’가 개시됩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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