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알 (8)
브라함은 이예와 하르모니아의 대화를 듣고 난 후, 앞으로 연우에게 무슨 일이 닥칠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칠흑왕이 깨어날 준비를 하려는 거구나. 아니, 이건 잉태(孕胎)라고 해도 되려나…….
‘알’.
그것은 새롭게 깨어난 뒤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육체, 칠흑왕이 내려앉을 장소를 말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칠흑왕이나 되는 존재를 수용하는 건 웬만한 그릇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주신 급의 인사들도 불가능한 일. 도리어 육체가 정신에 완전히 잡아먹혀 강림이 불발로 그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기존에 있는 괜찮은 그릇을, 칠흑왕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내구도를 가진 것으로 새롭게 빚을 필요가 있었다.
‘알’ 속에 칠흑왕이 내려앉고, 거기서부터 차차 영혼부터 육체까지 모든 본질을 칠흑으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브라함이 잉태라고 표현한 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칠흑왕이 새로운 탈을 쓰고 환생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으니.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하르모니아와 시의 바다는 이러한 ‘알’로 연우를 점찍었다.
‘낮’을 상징하던 옛 고대신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던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피를 한 몸에 타고났다는 점도 있었고.
어둠에 본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죽음을 개념적으로 획득할 만큼 뛰어난 격을 이루었다는 점도 있었다.
하르모니아는 자신이 ‘알’로 낙점되지 못했다는 부분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칠흑왕이 일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사장의 역할을 자처해 왔다.
그리고 당시 브라함은 이런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았다.
오랫동안 우주의 근본에 대해 탐구해 오고, 연우가 가져다준 계시록을 통해 그 어떤 신과 악마와도 비견할 수 없는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연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칠흑왕이 일어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제아무리 연우라고 하여도 절대 거스를 수가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천마의 시종이었던 이예까지 시의 바다에 붙은 이상, ‘알’의 운명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더군다나 그 자신도 거기서 죽을 운명이라 직감하였으니. 연우를 도와주고 싶어도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남긴 것이 바로 ‘태양의 서’였다.
-연우, 분명히 너의 성격대로라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하여도, 오히려 칠흑왕에게 달려들 테지……. 정우의 영혼도 어떻게든 찾으려 들 테고. 그렇다면 거기서 ‘너’를 잊지 않게, 도와주마.
칠흑은 완전한 어둠을 뜻한다.
빛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도 이전에 존재하던 것. 모든 생명체며 물질까지 집어삼키던 것이었으니, 그 속에서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연우가 아무리 냉혈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압도적인 칠흑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것은 기정사실일 터였다.
그렇기에.
브라함은 연우에게 빛을 남겨 주고 싶었다.
아무리 어두운 칠흑 속이라 하여도, 홀로 스스로를 빛낼 수 있는 빛을.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네. 나를 탑 속에 가둬 두었던 천마…… 그는 어찌하여 탑을 두고, ‘태양신의 사탑’이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던 걸까?
-오랫동안 고민을 하면서, 확실치는 않지만 난 이런 결론을 내려 보았다네. 칠흑에 항거하기 위해, 그러한 이름을 붙여 두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태양은 행성을 기준으로 봐서는 아주 크게 보이지만…… 사실 거대한 우주 앞에서는 아주 작디 작은 부스러기 정도일 뿐이지. 하지만 그래도 홀로 지지 않고 빛나지 않나? 마치 촛불처럼. 아마 탑에서 깨어난 존재가 칠흑과 맞닥뜨렸을 때, 그런 태양처럼 빛나라고 붙인 게 아닌가 싶어.
-그러니 자네도 지지 말게. 절대로.
화아아!
연우는 그렇게 한순간 브라함이 남기고 간 사념을 잔뜩 읽을 수 있었다.
[‘태양의 서’에 새겨진 브라함(브라흐마)의 신력이 천천히 영혼에 스며듭니다.]
[위태로운 신격을 복구합니다.]
[위태로운 신위를 복구합니다.]
[위태로운 신력을 복구합니다.]
……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신위, 올포원을 자극합니다!]
[신위, 올포원이 깨어나 천천히 고개를 듭니다.]
그가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그가 무엇을 염려하였는지도.
사실 브라함은 자신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절대 도망치거나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연우를 위한 안배를 남겨 놓고자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딸을, 손녀를, 사위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가족들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절대 쓰러져서는 안 되었다.
[신위, 올포원이 칠흑의 상태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신위, 올포원이 자신은 이루지 못한 소망을 너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념을 내뱉습니다.]
[신위, 올포원이 태양신 비바스바트라는 진명에 걸맞은 행사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신위, 올포원에 저장된 신앙이 모두 특별한 성질로 환원됩니다!]
……
[환원된 성질이 송과선으로 스며듭니다. 영혼과 육체에 동시에 강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정신이 깨어납니다.]
[육체가 깨어납니다.]
……
[올포원의 남은 성질이 특성 ‘냉혈’과 합쳐졌습니다.]
[새로운 특성, ‘열광(熱光)’이 생성되었습니다!]
연우는 여태껏 꺼져 가던 정신이 한순간 확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여태껏 마성들과 싸우면서 생긴 피로까지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특성: 열광]
‘냉혈’과 ‘올포원’이 합쳐져 만들 어진 특별한 특성. 모든 상태 이상과 정신계 저주로부터 영체를 보호하고 자아를 유지케 하며, 바라는 염원과 의지가 강할수록 육체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특성 ‘열광’과 신위 ‘투쟁’이 긴밀하게 연결되었습니다.]
……
[투쟁의 신위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화르르륵!
연우의 등 뒤에 맺힌 하늘 날개가 더욱더 거센 화력을 뿜어냈다. 좌측의 검은 날개가 여태껏 연우를 답답게 만들었던 칠흑을 한껏 밀어내고, 우측의 붉은 날개가 육체에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연우는 검뢰를 터뜨리면서 자신을 덮쳐 오던 마성의 손길을 한껏 뿌리쳤다.
그 와중에 번져 나간 여러 불길들이 다수의 마성을 휩쓸어 버리는 가운데.
이건……?
마성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던 녀석이 놀란 어투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렇군. 역시 어쩌면.
재미있다는 듯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 거다.
휘휘휘!
녀석을 중심으로 돌던 활자들이 잘게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연우는 다시 마성들과의 싸움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칠흑의 사이로 새로운 칠흑이 번져 나갑니다!]
온통 어둠으로만 가득한 세상에, 연우를 상징하는 더 짙은 어둠이 점차 번져 나간다는 점이었다.
* * *
『……브라함.』
르’뤼에가 자가 증식을 계속해 나가며 탑 외 지역을 점차 덮어 가고, 혼세팔신을 필두로 한 ‘밤’의 세력이 ‘낮’의 진영을 거의 궁지로 몰아갈 때 즈음.
하르모니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가를 따라 복잡한 감정들이 수도 없이 지나갔다.
그녀는 칠흑왕의 또 다른 후예이기 때문에 볼 수 있었다. 저 ‘알’ 속에서 빚어지는 일들을.
그곳에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브라함이 있었다. 칠흑에 저물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하고, 이에 따라 비바스바트의 사념도 덩달아 행동하면서 연우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제야 하르모니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 브라함은 원한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나, 연우를 위해 그러지 않은 것이란 걸.
그리고.
파아아!
-하르모니아. 당신이라면 내가 남긴 이 메시지를 볼 수 있겠지?
잘게 부서지는 빛무리 속에서, 브라함이 그녀에게 남긴 유언도 볼 수 있었다.
-당신이 살아온 삶을 나는 알지 못해. 당신에게 있어 나와 아 난타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이젠 물어볼 수 없을 테지. 어쩌면 당시에 내가 가졌던 생각대로,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따른 유희 거리였을지도 모르고……. 당신이 그리고 있던 어떤 큰 그림을 위한 포석이었을지도 모르지.
-그것을 두고 내가 당신에게 무어라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테지. 당신에겐 당신의 삶이 있고, 그것을 위해 밟은 길이 있을 테니.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비록 도중에 스텝이 꼬여 이제는 만날 수도 없을 테지만……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
하르모니아는 그윽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브라함을 보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저 속에 있는 브라함이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와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것만 같았다.
과거에 아난타를 낳을 적. 그의 말마따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빚어진 만남의 결과였지만, 그래도 아주 잠깐이지만 모성애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브라함에 대한 알지 못할 감정도…….
하지만 그녀에겐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일이 있었고, 유희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 존재가 되어 어둠 속에서만 살아야 했다.
그래도 하르모니아는 언제나 아난타와 브라함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둔 적이 없었다. 그들을 돕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럴 때마다 여러 상황적인 요인들이 그녀의 발목을 묶고 말았다.
그리고…… 언제나 외면했다.
브라함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때에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항상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노라고 최면을 걸듯이 스스로를 속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 뒤에 남은 것은 텅 비고, 아프기만 한 감정이었다.
특히 브라함이 죽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봐야만 했을 때. 그러한 공허함은 점점 더 정신을 좀먹어 갔다. 의식을 치르는 내내 정신이 딴 데 팔린 것처럼 멍했던 것이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
하르모니아는 이제야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후회할 짓은 절대 하지 마.
후회였다.
파아아…….
브라함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고.
하르모니아는 한참의 침묵 끝에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후회할 일을 하지 마라.
브라함이 마지막까지 전하고 싶었다던 그 말이 가슴 속에 강하게 내려앉았다.
『브라함, 당신은 결국 끝까지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군요. 아난타를 낳을 때에도 그렇게 만들더니……. 하긴 그렇기에 당신다운 것일 테지만.』
하르모니아는 이 순간 결심했다. 여태껏 칠흑왕의 후예로서 가족도 동족들도 버린 삶을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난타의 어미로 있겠노라고.
하르모니아는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의 크기만큼이나 엄청난 너비를 자랑하는 날개가 르’뤼에를 덮을 듯이 굴었다.
쿠쿠쿠쿠!
그 순간, 르’뤼에는 자가 증식을 하다 말고 도중에 정지하고 말았다.
동시에 표면 위로 칠흑이 불길처럼 일어나면서 르’뤼에의 전체를 휘감고 말았다.
무. 슨.
뭘. 하. 려. 는.
개중 민감한 감각을 가진 혼세팔신과 타계의 신이 하르모니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밤’의 첨병(尖兵)으로서 맹활약을 펼쳐 오던 그녀가 갑자기 무슨 짓을 하려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본능이 앞선 이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기도 했다.
『웜홀이 열린 이상, 당신들은 언제든 다시 모습을 비칠 수 있으니…… 이만 내 딸만큼은 보내 주십시오.』
하르모니아가 르’뤼에의 안전을 빌미로 협박을 일삼은 것이다.
시. 녀. 따. 위. 가.
시. 건. 방. 진.
그때, 경계의 거주자가 거대한 눈을 하르모니아 쪽으로 돌렸다. 르’뤼에는 칠흑왕이 내려앉을 육체. ‘알’에서 깨어난 칠흑왕의 정신이 머물러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쾅! 콰콰콰쾅!
칠흑의 불길에 휩싸인 르’뤼에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타계의 신들이 그것을 막기 위해 몰려드는 가운데, 하르모니아는 당당하게 그들에 맞서면서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결연함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사라졌어야 할 과거의 망령들이여…… 저와 함께 이 세상에 함몰됩시다.』
하르모니아는 자신이 ‘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은 묶을 수 있으리라.
‘알’이 있는 세상을 통째로 무너뜨린다면. 타계와 연결된 웜홀을 닫아 버리고, 르’뤼에를 망가뜨린 다면 저들이 다시 나타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난타. 잘 살아야 한다. 못난 이 어미가 이제야 어미다운 짓을 해 줄 수 있게 되었구나.’
[‘약속된 대지’가 붕괴합니다!]
[탑 외 지역이 무너집니다!]
[세계가 붕괴합니다!]
……
[‘낮(에로스)’의 빛이 조용히 꺼집니다.]
[‘밤(녹스)’이 그 아래에 묻혀 사라집니다.]
……
때문에 미처 아무도 듣지 못했다.
“오효효효. 이렇게 되면 계시록의 마지막 장이 조금 더 유예되는 것이라고 봐야겠군요. 이것도 천마의 안배려나요?”
한 곳에서 울린 누군가의 괴상한 웃음소리를.
* * *
그리고.
10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