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01화 (29권) (701/862)

29권

1화. 동면(冬眠) (1)

어디에선가 빚어졌던 누군가의 ‘꿈’은 10년 뒤, 무대가 바뀌며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다.

* * *

〈세상 곳곳에 갑자기 열리기 시작한 홀(Hole), 이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괴물들, 정말 세계 멸망의 날인가?〉

〈괴생명체에 대한 학계의 여러 논란들.〉

……

〈3년째. UN 가맹국의 만장일치로 ‘범세계연합국’ 발족〉

〈‘플레이어’들의 거취에 대한 논의 중.〉

……

〈‘플레이어’들에 의한 각종 범죄, 막을 길은 없는가?〉

〈새로운 신분이 되고만 ‘플레이어’에 대한 본질. 그들은 악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그것도 아니면 현실판 히어로인가?〉

……

〈‘시작의 날’이 있은 지 10년째. 현재 지구 사회의 안전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세계 각지에서 10주년 기도회가 벌어져.〉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외치는 평화의 노래.〉

벽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신문의 스크랩이 시대별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지구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열린 ‘게이트’, 동시에 줄지어 나타난 몬스터, 갑작스레 생성된 ‘시스템’. 그리고 자신들을 신과 악마라고 밝힌 존재들과 ‘플레이어’에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하나같이 근 10년 동안 지구 각지에서 있었던 굵직굵직한 일들이 적혀 있어, 플레이어에게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들이라 하여도 한눈에 역사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하지만 김범승의 시선은 스크랩된 기사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정되었다.

〈‘시작의 날’에 대거 발생한 실종자들에 대한 탐색 실시.〉

〈발견되지 못한 실종자들의 향방은?〉

〈사망 신고를 끝냈던 전 남편이 10년 만에 귀환하였어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귀환자들에 대한 교육 제도 실시.〉

〈피해 가족들에 대한 보상 체계 마련 시급.〉

실종자.

그리고 귀환자.

이 두 가지 단어는 김범승을 아주 오랫동안, 지난 10년 동안 괴롭혀 왔던 단어였다.

어린 시절, 시작의 날로 인해 행복했던 가정이 완전히 파탄 나고 말았으니까.

그 뒤로 김범승은 항상 게이트를 떠돌아다녔다. F급, 사회에서는 ‘폐급’이라고 비웃는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오로지 사라진 가족들이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만 안고서.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돌’ 차소영, “나도 삼촌을 잃었던 시작의 날 피해자. 삼촌이 언젠가 돌아올 날을 기다려…….”〉

〈차소영, ‘시작의 날’ 10주년을 맞이하여 피해 가족들과 함께 게이트 탐사를 실시.〉

차소영.

그 이름 세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만난다.”

김범승은 손을 뻗어 기사를 와락 움켜쥐었다. 차소영이라고 적힌 부분이 구겨지면서 찢겨 나갔다.

* * *

시작의 날 이후, 지구를 지배하던 가치관은 몽땅 뒤집히고 말았다.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고, 비이성적인 것들이 도처에서 난립했다. 갑자기 힘을 얻은 초능력자들이 스스로를 플레이어라고 일컬으며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혼란이 있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안정을 추구하였고, 사회는 천천히 질서를 되찾아 갔다.

다만, 그 전의 질서와 그 후의 질서가 아주 많이 달랐을 뿐.

김범승은 그렇게 새롭게 정리된 질서 속에서 가장 최하급으로 분류되는 이였다.

S급을 필두로, A~F로 이어지는 플레이어 계급에서 가장 하단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회 통념상 F급은 플레이어의 자질이 전무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정말 지독한 경제난이 있지 않고서야 일반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편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일반인들보다는 체력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경호 업무나 막노동 같은 육체적인 일을 많이 선호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F급이라 하여도, 플레이어 자격증이 있으면 직업적 선택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는 편이었다.

김범승도 당연히 주변으로부터 그런 제안을 많이 받곤 했지만.

그는 10년 동안 줄기차게 그것을 거부해 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들의 세계에서 F급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C급부터 이뤄진 공격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다니는 이들. 죽은 몬스터들을 해체하여 필요한 부위만을 골라내거나, 시스템이 내려 준 보상들을 짊어지는 짐꾼 역할을 많이 맡는 편이었다.

이런 이들에게 붙는 별명은 아주 간단했다.

채집꾼.

“오. 승, 왔는가? 여전히 남들보다 도착 시간이 빠른 건 여전하구만.”

반장 우성현은 김범승을 보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채집꾼은 주로 직업소개소에서 연결이 이뤄지는 까닭에 반장들의 입김이 아주 센 편이었다.

김범승은 그런 우성현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오면서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호형호제를 하고 있었다.

“늦으면 자리를 뺏길 수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와야죠.”

“흐흐. 뭔 그런 걱정을 하나. 자네 자리는 언제나 내가 따로 빼 두는데. 반을 꾸릴 때 자네가 없으면 말동무도 없고,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는 친구들도 드물어서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그렇게 친근하게 생각하면 일수나 올려 주든가. 김범승은 속으로 그렇게 작게 투덜거렸다.

사실 김범승은 몸값이 쌀 뿐더러, 명령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잘하는 편에 속했다. 10년째 채집꾼 생활만 하고 있으니, 바닥이 돌아가는 구조도 훤히 꿰고 있는 편이고.

보통 그 정도로 경력이 쌓이면 자신만의 ‘반’을 만들려는 경우가 태반인데도, 김범승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인력들을 대거 빼 나갈 염려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성현의 입장에서는 김범승만큼 편하고 만만한 호구도 아주 드물 터였다.

김범승도 자신의 그런 입장과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성현뿐만 아니라, 다른 새끼들도 속으로 적잖게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를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런 시선과 편견을 의도한 것이 그였으니까.

‘그것도 오늘로 끝이겠지만.’

“아니면 오늘 아이돌이 온다니까 좋아서 그러나?”

그런 김범승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성현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실실 웃었다.

“차소영, 맞지? 자네가 매번 그렇게 매번 노래를 불렀잖나.”

“아니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내 딸내미도 팬이라고, 싸인 좀 받아 달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만. 정말 인기가 많긴 많나 보던데?”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고, 광고도 엄청 찍어 댔으니까요.”

“하긴 TV만 틀면 죄다 차소영이 선전하는 광고이긴 하지. 옛날에 피겨 스케이팅 이후로 이만큼 국민 여동생이 된 사람도 없을 거야, 그렇지?”

오늘 그들 반이 맡게 된 작업은 아이돌 차소영의 행사를 뒤따르면서 채집하는 것이었다.

시작의 날이 있은 지 10년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차소영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거대한 자선 행사를 기획했다.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진 탐사대를 일구어 초창기에 열린 게이트 들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초창기 실종자들에 대한 흔적을 쫓자는 내용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이번에 차소영이 세계 각지에 쏟아 낸 메시지가 아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차소영부터가 삼촌을 시작의 날에 잃어버린 피해 가족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런 만큼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소력이 아주 짙었던 것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각지의 온갖 NGO와 자선 사업가들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나서면서 행사의 규모는 초창기 기획 단계에서 예상한 바와 다르게 세계적인 이슈까지 끌게 되었으니.

그런 이 행사에 채집꾼 자격으로 우성현 반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부터가, 우성현이 얼마나 수완이 좋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과는 별도로, 우성현은 차소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부모 잘 만나서 집안도 좋아, 재능도 타고나, 얼굴도 예뻐. 사람들도 숭배하다시피 해. 그렇게 살면 참 재미나겠어, 그렇지 않나?”

F급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타고난 재능만으로 상류층에 들어선 상위권 플레이어들을 속으로 질시할 수밖에 없었다.

우성현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일 뿐이었고.

다만, 김범승은 거기에 대해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난감하다는 듯이 쓰게만 웃어 보일 뿐.

“…….”

“흐흐. 내가 자네를 붙잡아 두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팬으로서 빈정이 상했다면 미안하 게 되었어.”

“아닙니다. 저도 부럽긴 마찬가지인걸요.”

“그렇지? 하하하! 자네는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해서 좋다니까.”

우성현은 김범승의 어깨를 크게 두들기면서 크게 웃어 젖혔다.

때문에 그는 보지 못했다.

김범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 * *

“저처럼 많은 피해 가족분들이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다시 한번 더 가슴 속에 희망의 촛불을 피우실 수 있게…… 게이트 속에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실종자분들이 그 소망을 이루실 수 있게…… 모두가 하나로 뜻을 모아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김범승이 있는 곳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무대.

수십 대의 카메라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여러 식전 행사가 쉴 틈 없이 이어지다가, 차소영의 축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순서가 끝이 났다.

“우와! 저게 차소영이야? 진짜 예쁘네. 거기다 기럭지도…… 정말 열여섯 맞아?”

“아직 초졸이래잖냐. 저게 말이 되니?”

“거기다 ‘빅 마운틴’이나 ‘살왕(殺王)’ 같은 양반들도 몰려 있고.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도 엄청 크고, 살이 다 떨린다니까?”

차소영과 함께 실종자들 탐색에 힘을 싣겠다는 여러 플레이어들의 소감 발표도 있었다.

채집꾼들은 한평생 살면서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은 유명 인사들을 보는 내내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 하나같이 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S급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채집꾼 생활을 하면서도, 상위 플레이어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꿈에 그리며 동경하던 영웅들을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물론, 그들이 저들과 함께할 일은 없을 터였다.

저들은 탐사대이자 공략대의 신분으로 3개 조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들어갈 것이고, 채집반은 마지막 조가 들어가고 난 이후 약 24시간 뒤에나 입장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래야만 채집반이 눈먼 몬스터들에게 당할 우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들 알다시피 이번 게이트는 시작의 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완전한 공략이 이뤄지질 않아 ‘클로징’이 되지 않은 곳이다. 그런 만큼 자체적인 생태계도 조성되어 있을 것이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단단히 주의하도록!”

우성현은 김범승에게 보여 주던 모습과 다르게, 단호한 어투로 채집꾼들에게 주의점을 일러주고 있었다.

취재 열기가 워낙에 뜨거운 만큼, 어디서 안전사고라도 벌어졌다간 그가 크게 패널티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모두 여기서 대기!”

채집꾼들 중 대다수는 이렇게 큰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했지만, 소수는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클로징 게이트(Unclosing Gate)는 언제나 그렇듯이 위험 요소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열 명도 넘는 S급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냐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반장의 말마따나 어디서 어떻게 위험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주의를 한다고 해서 전혀 나쁠 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대기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출발한다!”

우성현의 지시에 따라, 가장 먼저 김범승을 비롯한 채집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집반이니만큼 저마다 챙겨온 물품들이 아주 많았다. 마치 험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승, 평상시 했던 대로만 해. 사람이 많다고 해서 쫄지 말고. 알겠지?”

“예.”

“그럼 선두를 부탁하지. 자, 다음!”

김범승은 우성현의 응원을 받으면서 게이트 쪽으로 이동했다. 저 멀리,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칠흑 같은 것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게이트가 보였다.

이미 차소영을 비롯한 모든 탐사대가 입장한 것은 몇 번이고 확인한바.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들이는 김범승의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세샤…… 이번에야말로 당신네들 가족에게 복수를 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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