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동면(冬眠) (4)
대체 이 지독하게도 새카만 세상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걸까?
백 년이던가, 이백 년이던가. 연우는 언제부턴가 시간을 헤아리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칠흑 속의 세상과 바깥 세상은 시간 흐름이 전혀 다르게 흐를 테니까. 바깥과 안쪽은 작용하는 ‘굴레’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건.
웬만한 신격들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을 거란 점이었다.
[투쟁의 신화가 화려하게 타오릅니다!]
[죽음의 신화가 두 개의 태엽을 빠르게 감습니다!]
[특성 ‘열광’이 칠흑을 물리칩니다.]
만약 새롭게 만들어진 특성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환한 빛을 발하기도 힘들지 않았을까.
이곳은 칠흑.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만이 가득한 곳이니.
『아들아. 쉬고 싶다면 언제든 쉬어도 된단다. 이후부터는 이 아비에게 맡기고.』
언젠가 아버지 크로노스가 그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지독하기만 한 세상에서 자신 혼자만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께서 계속 옆에서 의기를 북돋아 주고, 지쳐갈 때 즈음이면 항상 말을 걸어 주셨기에 연우는 이내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었다.
『언제나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참으로 신기해. 대체 어떻게 이렇게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거지? 대체 무엇이 있어 너를 그토록 지탱하게 만드는 것이지?』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와 마성들의 싸움에 절대 참전하지 않고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는 연우의 권속이 아니었으니 굳이 싸움에 개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강제로 권속으로 만든다고 해도, 녀석의 성격상 어떻게든 뒤로 내빼려 했겠지.
결국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호기심을 달래 줄 흥밋거리가 전부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연우는 그가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최고의 탐구 영역이었다.
『가족애? 아니면 영웅심? 대체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우리네들은 애당초 가지지 못하는 심리라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필멸자 출신이니 가질 수밖에 없는 심리인가?』
언제나 효율을 추구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연우의 도전이 너무나 무모하게만 보였다.
감히 아버지의 자아가 되겠다니?
아무리 아둔하다고 하시더라도, 그것은 그 비대한 몸집과 탐욕 어린 성정, 그리고 외신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커다란 사고관 때문에 그런 것일 뿐.
여러 우주와 차원을 단순히 ‘꿈’으로만 여기는 존재의 중심이 되겠다는 건…… ‘황’마저도 아래로 여기는 존재가 되겠다는 건…… 그로서도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연우가 그러한 무모한 도전에서 조금씩 승기를 잡아 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몇 번이나 물었다.
대체 너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거냐고. 대체 무엇이 있어 너를 여기까지 끄집어 올릴 수 있었냐고.
거기에.
“좀 닥쳐.”
연우는 손으로 입가를 훔치고, 피가 섞인 가래침을 내뱉으면서 소리쳤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렇군. 굳이 이유 따윈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런 건가?』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런 연우의 태도에 한참 동안이나 고민을 하다가 그런 결론을 내렸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입가에는 만족에 찬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원래 감정 따윈 전혀 갖고 있지도 않던 그가 처음으로 내비친 감정이기도 했다.
어쩐지 연우와 계속 함께하면서 그의 감정에 많이 동화되었던 모양이었다.
『좋아. 아주 좋은 대답이 되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일 뿐이고, 그래서 우둔한 아버지와 싸우는 것이라면…… 나도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 줘야겠지.』
파아아아!
기어 다니는 혼돈은 그 말을 끝으로 스스로를 해체시켰다. 원래의 형태인 사념 덩어리로 변해 칠흑 곳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마지막 호기심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으니, 더 이상 불필요하게 자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보고자 했던 연우의 투쟁 결과도 굳이 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듯했으니까.
대신에 그는 연우에게 다른 선물을 주었다.
바로.
마성에 대한 비밀이었다.
-우둔한 아버지시여……! 부디 나를 당신의 ‘꿈’으로 끌어들이시고, 제게서 아내와 자식들을 앗아 간 저것들을 부디 물리쳐 주십시오!
한평생 산골에서 약초꾼으로 산 사람이 있었다. 하루 종일 산을 올라 캔 약초를 팔아 겨우 가정을 일구었지만, 그는 늘 행복했다. 아름다운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쿠리에 약초를 가득 채우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식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가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사실도.
아랫마을로 내려가 수소문했고, 1년 뒤에 겨우 알게 되었다. 산천 유람을 왔던 영주가 아내의 미모에 반해 납치를 시도했단 사실을.
아내를 돌려 달라고 성 앞에서 시위를 해 보기도 하고, 황도로 직접 찾아가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산골 무지렁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다.
-어찌하여 비밀이 풀리지 않는가! 우둔한 아버지시여,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이 세상의 끝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세상이 품은 비밀을 풀고자 200년이 넘도록 탐구를 시도하던 마법사가 있었다. 그것이 수십 대에 걸쳐서 대대로 내려오던 학파의 비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대에서도 아무것도 풀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오.
-결국 난 이렇게 스러져야만 하는가. 아버지, 난 당신이 너무나 원통스럽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절실히 갈구하였고, 인정을 받고자 한없이 노력하였지만, 결국 자신은 그들의 출세를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았단 사실에 다리 밖으로 몸을 던졌던 재상.
미래를 약속한 연인을 두고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어 20년 후에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귀환병.
평생에 걸쳐 검을 좇았고 그 끝을 보았지만, 끝끝내 주군의 시기를 사서 억울하게 처형대로 끌려가야만 했던 기사…….
연우는 수도 없이 나열된 그 많은 삶들을 일일이 지켜보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삶의 경우에는 그가 직접 빙의되어 체험을 해 보기도 했다.
그들이 되고, 그들의 시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관으로 생각을 품기도 하였다. 그러다 여러 차례의 ‘꿈’이 스쳐 지나가고 나면, 가슴 한편에서 텅 빈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너는 우리들이 품고 있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온통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하다. ‘꿈’에서 깨고, 또 깨어도 결국 똑같은 세상만 되풀이될 뿐이지.
그리고 너 또한 우리에 못지않은 불운(不運)을 타고났고, 숙명(宿命)이 주는 무게에 어깨가 짓눌리지 않았더냐.
그것을 너는 완전히 떨쳐 낼 수 있는가?
마성이란, 수없이 응집된 한(恨).
지금은 허물어진, 각 세계에서 끝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고 끝끝내 아둔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던 이들이 남긴 것이었다.
어쩌면 연우가 그중 하나로 선택되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아아악!
[‘하늘 날개’가 현자의 돌(오만·식탐·색욕)과 호응하여 화려하게 불타오릅니다!]
연우는 꿋꿋이 그들과 계속 싸우고, 물리치며, 먹어 치웠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고, 체험하며, 동화되었다.
그렇군. 그것이 너만의 대답인 셈인가. 어설픈 위로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모르긴 하지. 흐흐.
키키킥! 시건방지구나. 아주. 한낱 인간 주제에…….
그 때문인지 마성은 언제부턴가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연우에게 호응하는 쪽과 적대하는 쪽으로.
호응하는 쪽은 충분히 자신들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였고, 적대하는 쪽은 여전히 연우를 깔보거나 자신들처럼 만들어 버리고 싶어 하는 부류였다. 혹은 동정받는 것을 극도로 경멸하는 부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후자 쪽이 월등히 많았기에 여전히 연우는 고립된 채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전세는 이제 그 혼자서도 백중세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 * *
“삼촌!”
그럴 때, 듣게 되었다.
자신과 마성만이 있는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어느 목소리를.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버려,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선명하게 와 닿는 목소리였다.
세샤.
나의 하나뿐인 조카.
가려는가?
그때, 연우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른 마성들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를 가진 마성이 서 있었다.
모든 마성 중 가장 위에 존재하는 우두머리.
이전에 그의 목숨을 앗아 가기 직전까지 갔던 그 녀석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언제부턴가 그를 현인(賢人)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말투가 그냥 그랬으니까.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성과의 싸움은 현인과 그의 대결로 다다르고 있었다.
연우는 현인을 완전히 꺾고 나면, 진짜 칠흑왕의 자아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녀석은 마지막 관문이었던 셈이었다.
물론, 현인은 쉽사리 자신의 목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웃긴 점은, 현인은 연우의 공격을 일일이 막아 내고 때로는 위협적인 공격성을 보이면서도, 평상시에는 호의인지 적의인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반응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녀석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와 피 튀기도록 싸우다가도, 이따금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덕분에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절대 상대방에게 양보란 없으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인은 ‘꿈’이 끝나길 바라고.
연우는 ‘꿈’이 이어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둘은 친구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연우가 보인 반응에, 현인은 곧장 그렇게 물어왔다.
연우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분명히 활자밖에 토해 내지 못하는 녀석에게서 그런 웃음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대는 아직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어. 우리 중에 그대를 인정하지 않은 이도 있고. 그런데도 괜찮나? 이대로 가버리면, 여전히 남은 놈들이 계속 길길이 날뛸 텐데.
“어차피 이 싸움, 다 끝나지도 않잖아? 너희들 전부를 먹어 치울 때까지는. 아마 여기서 나가서도 무의식 한편에서는 계속 전투를 벌이게 될 테지. 끝없이.”
그건 그렇지.
“결국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나?”
연우의 눈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형형히 빛났다.
“내가 너희들을 전부 떨쳐 낼 수 있냐는 것.”
호오. 자신만만하군. 자신 있나 보지?
“어느 정도는. 이 무저갱 같은 ‘알’을 깨고 나가면 그만이잖아?”
연우는 여전히 현인을 포함해 자신을 에워싼 마성들을 무시하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위쪽을 보았다.
사실 그가 보고 있는 곳이 정말 ‘위’가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방위 감각은 아무래도 필요 없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탈출구.
언제는 우리와 같이 저물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굳이 그러지는 않을 모양이로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으니까. 가족들과 좀 더 있을 생각이야. 우리들끼리의 싸움은 그때 가서 마저 잇도록 하지.”
하긴. 그대와의 대화는…… ‘우리’ 간의 이해는…… 그리 쉽게 끝날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 어쩌면 이것도 좋으려나.
연우는 어쩐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현인이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좀 더 ‘꿈’을 즐기다 와라, 또 다른 ‘나’여.
단, 기억해야 할 것이다.
늘 말했듯이, ‘꿈’이 계속 이어지는 한 그대를 누르고 있는 불운과 숙명은 절대 떨칠 수 없다는 것을. 아마 언젠가 그대의 손으로 ‘꿈’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
연우는 ‘흥’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서.”
그 순간, 연우를 둘러싼 세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깊디깊은 칠흑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새 절반이 넘었다는 증거였다.
[정지되었던 시간의 태엽이 빠르게 활성화됩니다!]
[정체되었던 탈각이 재진행됩니다. 99.8, 99.9%…… 100%!]
[탈각이 완성되었습니다.]
[7차 용체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
[현재 상태: 흑신(黑神)]
[알 수 없는 이유로 초월은 실패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아마도 마지막 남은 관문인 현인을 아직 삼키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연우는 우선 이것만으로도 족했다.
평생 떨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칠흑에서 벗어나고, 깨어나려던 ‘꿈’을 좀 더 유예시킨 것만으로도 일단 큰일을 치른 셈이었으니까.
콰직!
그 순간, 시간의 태엽이 빠르게 감기는 만큼, 칠흑을 따라 거대한 균열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균열 틈 사이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광경을 연상케 했으니.
그렇기에 탈각(脫殼)이었다.
여태껏 연우를 묶고 있던, 칠흑이라는 껍질을 깨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다.
그리고 연우가 힘을 준 순간.
콰아아앙!
칠흑이 있는 힘껏 터져 나가면서 새카맣던 세상이 사라지고.
“삼촌!”
비산하는 온갖 결정 조각들 사이로, 조카가 저 멀리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 커서 숙녀가 되었지만, 그래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콰르르릉!
연우는 오른손을 있는 힘껏 아래로 내리쳤다. 검붉은 검뢰가 세상을 가로지르면서 자신과 조카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