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05화 (705/862)

5화. 지구 (1)

“……!”

“……!”

“……!”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 ‘빅 마운틴’ 웨이 첸과 ‘살왕’ 다니엘을 비롯해서 뒤쫓아온 플레이어들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순간 자신들이 무언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으니.

세샤-차소영은 평상시 잘 웃지 않고 도도하게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플레이어들 세계에서도 친분을 가지고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나머지와는 공적인 관계라는 선을 미리 그어 놓고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들곤 했다.

그러면서도 자선 행사나 봉사 활동 같은 좋은 일들에는 항상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으니.

때문에 그녀는 생전에 인세에 두 번 다시 없을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그보다도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던 대배우 오드리 햅번에 주로 빗대어 표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차소영이 갑자기 타계의 신들 틈 사이로 뛰어가더니 ‘삼촌’이라고 외쳤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삼촌?

알려지기로 차소영의 삼촌은 10년 전, 시작의 날 때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게이트 출현으로 인한 실종자들을 찾는 여러 모임과 협회에 모습을 내비치고, 이번 행사를 주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난데없이 그런 삼촌을 찾다니.

혹시 다른 귀환자들처럼 이곳에서 실종자를 찾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상황이 위험해지자 그냥 본능적으로 그를 찾은 것일 뿐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타계의 신들 틈바구니에 있던 결정이 깨지면서 검고 붉은 벼락이 잇달아 쏟아졌으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을 겪어 보았다지만. 그리고 그만큼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을 보아 왔다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괴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딱 보기에도 너무 단단해서 부러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던 나무들이, 숲이 모조리 갈려 나가는 것과 동시에.

타계의 신들이 마치 구멍이 숭숭 뚫린 걸레쪽과 같은 모양새가 되더니 파스스,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수호한다는 신과 악마들도 섣불리 부딪치기를 꺼려 한다는 존재들이. 너무나 쉽게.

[경고! 당신은 지금 최고 위험 지대에 입장하였습니다! 어서 탈출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경고! 당신은 지금 최고로 위험한 권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서 현장을 벗어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경고! 당신은…….]

……

플레이어들의 망막에는 긴급 메시지가 다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으니, 살고 싶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라는 내용의 메시지.

하지만 이미 그들은 검뢰가 준 충격에 반쯤 넋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 검뢰가 흩어지고 나서도 곳곳에 튀어 오르는 불똥하며 짙은 탄내, 그리고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달아 오른 대기 등이 그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저 눈에 띄었다가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데바’의 신, 바유의 사도이기도 한 다니엘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바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모신 이래 언제나 그를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 주며, 드높은 하늘처럼만 느껴지던 신이.

다니엘은 그와 연결된 채널링이 단단히 경직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너머로 신의 당혹스러움과 공포가 짙게 배어 나왔다.

[바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나의 아이야. 어서,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아직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어서! 서둘러라!]

‘시, 신이시여.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다니엘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바유가 이토록 격앙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계의 신이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지켜 주겠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 여인을 구하여도 좋다고 말씀하셨던 분이 아니던가.

더구나 바유는 ‘풍천(風天)’이라는 이명까지 있을 정도로,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존재였다.

데바를 상징한다는 여덟 대신격, 로카팔라의 한 명이기도 했으니.

그렇기에 다니엘도 그동안 인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던 것인데.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살왕이라는 호칭답게, 그는 뛰어난 안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먼 거리에 있어도 상대가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 입고 있는 옷마저 까맣긴 했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모습이었다.

그 외에 그에게서는 아무런 특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과 악마들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위압감도 없었고, 상위권 플레이어들이 보일 법한 기도도 없었다.

그냥 조금 잘생긴 평범한 인간으로만 보이는데. 대체 왜……?

[바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무, 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어서 도망치래도……! 그, 그, 그랬다가 저자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러던 그때, 바유가 다니엘의 돌발 행동을 막고자 채널링을 다급하게 울렸지만.

그보다 먼저 검은 머리의 사내, 연우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다니엘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아니, 만약 바유와의 채널링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절명했을지도 모를 만큼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단순히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 속에 담긴 깊디깊은 심연이 그의 영혼을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을 본능적인 공포가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격의 차이를 지닌, ‘죽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마주했을 때에 느낄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으, 으아아악!”

다니엘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뒤돌아 뛰었다.

“사, 살왕……?”

“정신 차리십시오, 다니엘! 왜 그러십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런 다니엘을 이해하지 못해 소리쳤지만, 다니엘은 그런 것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나의 아이야. 정신 차릴……!]

“비켜어어엇!”

바유가 다급하게 나섰지만, 다니엘은 이미 반쯤 미쳐 버린 나머지 칼까지 뽑아 그의 앞을 막는 주변인들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 순간.

“동작 그만.”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에 다니엘의 행동이 뚝 하고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너무나 조용했지만, 이상하게도 귓가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절대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숨어 있어 다니엘은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꼿꼿하게 서야만 했다. 심지어 채널링으로 연결된 바유까지도.

[바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하아. 아무래도 엿 된 것 같구나.]

바유의 짙은 한숨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 * *

「이 라플라스에게는 짜릿한 것이어요! 하악! 하악! 주인님, 좀 더 크고, 굵고, 짜릿한 형벌을 주실……!」

“라플라스.”

검뢰가 찢어 놓은 건, 세샤를 위협하려던 타계의 신들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라플라스도 있었다.

연우가 굳이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권속에게 해를 끼칠 만한 행동은 잘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갑자기 녀석이 다짜고짜 검뢰가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저딴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이다. 어째, 보지 않은 동안에도 성격은 크게 달라진 구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갓 깨어난 연우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 저딴 것이었으니 짜증이 단단히 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사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던지, 한순간 라플라스의 주접이 중단되었다.

그래도 못 본 사이에 눈치라도 생긴 걸까. 연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인님.」

“……?”

「저를 더 그렇게! 경멸에 찬 목소리로! 혐오와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또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용?」

“…….”

연우는 아주 잠깐 동안 라플라스와의 권속 계약을 중단하고, 도로 사념 덩어리로 찢어 놓을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 더러운, 욕망 가득한 사념 덩어리를 계속 그림자에 두고 있게 될 터.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였기 때문에 연우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가까스로 참으면서 말했다.

“……닥치고, 먹어.”

「하악하악! 분부 받잡겠습니다용!」

허공에 흩어진 라플라스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그림자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그림자의 중간 부분이 길게 쭉 갈라지면서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포악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허기진 짐승이 먹이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듯이, 검뢰에 찢겨 나갔던 타계 신의 조각들이 톱니 이빨 안쪽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아. 버. 지.

우. 둔. 한. 아. 버. 지. 시. 여.

어. 찌. 하. 여.

왜. 저. 희. 를.

겨우 목숨만 붙어 있던 타계의 신들은 연우를 향해 애타는 사념을 뿌려 댔다.

그들의 눈에 연우는 위대하시고도 아둔한 아버지, 칠흑왕으로 보였으니까.

비록 완전하지 못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현재 칠흑왕이라 할 만한 이는 연우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아버지에게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릴 거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연우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다.

으득, 으드득!

꾸르륵, 꾸륵-

그렇게 한참 동안 그림자의 괴물이 타계의 신들을 꾸역꾸역 뜯어먹고 난 뒤.

「하하하! 너무 맛있고, 간만에 배가 차는 기분인 것이에용.」

라플라스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연우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주인을 만났으니 그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권속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

오랜만에 근원과 연결되고, 먹이도 한가득 먹었으니 소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제 좀 변태에게서 해방될 수 있겠군.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옷자락에 묻어 있던 결정의 조각들을 다 털어 내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텁텁한 공기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애당초 이제는 일반적인 물리적 법칙이 없어도 생활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숨을 안 쉬어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한평생에 걸쳐 몸에 밴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칠흑의 향. 늪이로군.’

연우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언젠가 크로노스의 꿈에서 보았던 칠흑의 늪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쓰게 웃고 말았다.

칠흑의 늪은 ‘꿈’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접점에서 형성되는 칠흑왕의 잔재.

당연히 자신이 깨어난다면 이런 곳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삼촌!”

연우는 갑자기 자신에게 와락 안기는 세샤를 보며 생각을 멈추고, 그대로 양팔을 뻗어 꼭 끌어 안았다.

잠들기 전 봤을 때에 비해 훨씬 커져 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때처럼 체구가 아주 작고 가냘픈 것 같았다.

“삼촌, 정말 삼촌 맞는 거죠?”

“많이 컸구나. 키만 따진다면 제수씨보다도 크겠는데.”

연우는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가볍게 웃었다.

세샤는 그제야 상대가 연우의 탈을 쓴 다른 존재가 아닌, 진짜 연우라는 사실을 깨닫고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우리가…… 아빠랑 엄마가…… 다들 삼촌 얼마나 찾았는데, 왜 이제야 나타난 거예요…….”

“미안하다.”

연우는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한참 동안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어야 했다.

주변에 보는 눈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움직임도 정지시켜 놨으니 남은 이야기는 그 뒤에 해도 되는 것이고.

아니, 아직 하나가 남았나.

연우는 세샤를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싸늘한 눈을 하면서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거기 있는 건 다 알고 있으니, 이만 나와라. 제우스.』

그 말이 끝난 순간.

스륵!

타계의 신들이 죽은 자리, 공간이 열리면서 잔뜩 굳은 얼굴을 한 김범승이 조용히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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