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구 (2)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김범승의 목소리와 다른 중저음의 목소리가 겹치면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의 등 뒤로 푸른 그림자가 어스름하게 맺혔다. 두 눈도 마치 벽옥을 박은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맺히고 있는 중이었다.
김범승. 정확하게는 그가 모시고 있는 신인 제우스가 임시 강림을 했다는 뜻이었다.
제우스.
연우에게 있어서 유전적 관계로는 친형이지만, 정서적인 관계로 봤을 때는 도저히 그렇게 부르기 힘들 인물.
연우는 어쩐지 그런 제우스가 이전에 봤을 때에 비해 훨씬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도를 중간 매개체로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도저히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연우가 칠흑왕의 자아가 되기 위해 수많은 마성을 잡아먹고 탈각을 이뤘듯이, 그 역시 보지 못했던 동안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영역에 들어온 자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동안 내가 고생한 게 너무 쓸데없다 싶지 않나?”
“하긴. 그도 그렇군.”
『하긴 그도 그렇군.』
하하하. 제우스가 그렇게 껄껄 웃는 동안.
세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흠칫 놀라면서 자연스레 연우의 등 뒤로 숨었고.
츠츠츠-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이 검의 파편들이 올라오더니, 조금씩 조립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크로노스. 그는 연우와 달리 살짝 침울한 얼굴로 제우스를 바라봤다.
『제우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아들이 아버지와 막냇동생, 그리고 조카를 만나 보고자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 기뻐하시지는 않고 왜 그리도 침울한 표정을 지으시는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언제부턴가 두 개로 분리되었던 목소리가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
『누가 보면.』
순간, 제우스의 한쪽 입술이 크게 비틀렸다.
『마치 제가 막냇동생과 조카를 죽이기라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보이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앗!
제우스의 신형이 아래로 움푹 꺼지면서 사라졌고.
쐐애액!
크로노스가 순간 스퀴테의 검형으로 변하면서 연우의 손아귀에 빨려들어 갔다.
까아앙!
연우는 사선으로 스퀴테를 거칠게 휘둘렀다.
단순히 쇠가 부딪친 것인데도 불구하고, 던전이 통째로 울릴 정도로 거친 파동과 함께 제우스가 위로 튕겨 올랐다.
후후후. 그는 차갑게 웃으면서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저 멀리 지반에 꽂힌 종유석의 끄트머리에 내려앉았다.
그의 두 눈은 마치 서로 다른 보석을 박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우는 그 순간 알았다. 제우스가 보유하고 있는 영혼석이 이제 한 개가 아닌 두 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속에서 일렁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잡다한 기운들을.
아니, 잡다하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하나하나가 전부 손에 꼽히는 주신격의 기운들이었다. 순수히 ‘창조’와 ‘하늘’의 신위와 관련된 신력들만이 극한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저런 건 순수하게 기량을 기른다고 해서 불릴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강탈.
혹은 착취를 통해야만 쌓을 수 있는 것.
연우, 그 자신이 그렇게 성장했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체 그동안 뭘 처먹은 거지?”
『글쎄. 그동안 먹은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사실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막내, 너의 도움이 적잖게 있었단다. 그건 아주 고맙게 생각해.』
“……주신격들을 많이도 먹었나 보지?”
『빙고.』
제우스가 히죽 웃는 모습을 보면서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차야만 했다.
탑이 쓰러지고, 탑의 세계가 무너지는 동안.
‘낮’과 ‘밤’이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수도 없이 많은 신과 악마들이 그 속에 매몰되거나 죽어 버렸다.
모두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우스는 당시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노렸던 모양이었다.
혼란은 뒤를 급습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제우스는 그런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신과 악마들의 사회를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다녔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다녔다. 식령을 거리낌 없이 벌이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식령의 대상은 철저하게 가렸어. 창조나 하늘과 관련된 신위를 가진 주신격들로만……. 용의주도하게도 일을 벌였군.’
신과 악마들을 잡다하게 먹어 치운다면 그만큼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격의 성장을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제우스는 한때 올림포스를 이끌며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끌어내기도 했던 자. 그런 이가 힘이 크게 모자랄 일은 없으니, 노릴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황.
신격마저도 초월하여야만 닿을 수 있는 지고의 자리.
하늘.
창조.
이 두 가지는 제우스를 상징하는 신위였고, 녀석은 이것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식령을 시도했다.
연우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거머쥐었듯, 제우스는 ‘창조’를 개념으로 격상시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의도했던 바는 어느 정도 이룬 모양이었다.
한쪽 눈에 박힌 또 다른 영혼석은 그 과정에서 추가로 얻은 전리품일 테고.
물론, 아무리 그런들 ‘황’의 자리가 그리 쉽게 손에 잡히지는 않을 테지만.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인 건 절대 아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 어여쁜 조카의 뒤를 밟아서 너도 똑같이 취하려 했었다만. 아쉽게도 그건 쉽지 않을 모양이야.』
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샤는 이를 악물었다.
『삼촌을 이토록 따르는 조카라니. 이 큰아버지로서는 조금 서운한걸, 세샤?』
제우스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세샤는 차마 그 눈빛을 마주 보지 못하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이, 연우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
“결국 요점은 이거로군.”
지이이잉!
“네가 여기서 뒈져 버리면 된다는 것.”
콰르르릉!
연우는 스퀴테를 다시 크게 휘둘렀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동작으로 보였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칼끝에서 떠난 검뢰가 단숨에 하늘과 대지를 잇달아 때리면서 제우스에게로 쏟아졌던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마치 세기말이라도 찾아온 것 같은 어마어마한 광경에 경악하다가, 어느새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저마다 어디론가 숨어 들어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런 피조물들이 어떻게 있건 간에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허공에다 손을 뻗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이로군. 벼락을 다루는 것은 본디 나의 주관일진대.』
검뢰는 제우스에게 닿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그의 손에서 노란색 뇌전이 생성되면서 검뢰를 옆으로 흘려 버린 탓이었다.
“그 번데기 맛이 어떨지 궁금하긴 하군.”
하지만 연우는 가볍게 실소를 흘리면서 스퀴테를 연달아 휘둘렀다.
제우스가 생각보다 강해진 사실이 재미나긴 했지만.
만약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거친 공격을 뿌리면 될 일이었다.
이뢰, 삼뢰, 사뢰…….
그리고 원래 한계였던 오극과 육극을 넘어 마지막 팔극(八極)에 다다랐을 때.
제우스를 포함한 던전은 그대로 터져 나가고 말았다.
* * *
“속보입니다! 현재 ‘아이돌’ 차소영 양과 ‘빅 마운틴’ 웨이 첸, ‘살왕’ 다니엘 군터가 포함된 공략대와 채집반이 폭주 현상에 휩쓸려 실종된 지 사흘째……. 수색대는 만일에 있을 게이트 브레이크(Gate Break)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가운데…….”
언클로징 게이트 ‘까마득한 태곳 적의 늪지대’가 폭주 현상을 일으킨 것은 2개 조로 이뤄진 공략대가 들어가고, 별다른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아 채집반까지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줄곧 안정적이었던 게이트 오로라(게이트 주변으로 흐르는 마력장)가 크게 출렁이더니, 갑자기 오로라의 색이 적색에서 흑색으로 빠르게 변했던 것이다.
게이트 오로라는 색의 선명도가 짙어질수록, 그리고 어두워질수록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즉, 검은색은 극악한 난이도라는 뜻이었으니.
특히 ‘까마득한 태곳적의 늪지대’의 색깔은 그마저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칠흑색.
여태껏 지구에서도 단 두 번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중 한 번은 아프리카를 하루아침에 죽음의 대지로 바꿔 버린 사태 때 보였던 최악의 색깔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 그것도 수도인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하고 말았으니…….
이 소식이 알려진 순간, 한국의 증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고, 서울과 경기의 모든 도로는 피난을 떠나려는 차량들로 가득 차게 되어 버렸다.
인접국인 북한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마저도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혹여 발생할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경계 태세를 갖췄으니.
“빨리, 빨리 서둘러!”
“주변 경계 철저히 하고, 이탈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
“플레이어들은? 그놈들은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젠장! 평상시에는 그렇게 잘난 척 거들먹거리더니, 이럴 때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주축이 된 수도군단을 비롯해 최전방의 부대들이 아래로 모두 내려오고, 한미 연합군 사령부도 급격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우지훈 준장은 게이트 브레이크에 대비해 바쁘게 움직이는 군 병력들을 보면서 엄지와 검지로 눈두덩이를 세게 문질렀다.
‘……피곤하군.’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에야, 사흘 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곳만 지켜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작전 현장에서 손을 뗀 지 오래고, 중간에 사령부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않아 산골짜기로 좌천되어 퇴역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지휘봉을 쥐게 되니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해 몬스터가 다량으로 쏟아지고 나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울 심산인 거겠지.
군이 군답지 못하고 정략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영 못마땅했지만…… 어쩌겠나. 정작 이런 긴박한 상황을 조율할 줄 아는 사령관 급은 자신밖에 없다는데.
우지훈 준장도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 될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현장 지휘를 맡은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는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 혹은 속죄일지도 몰랐다.
‘차 중사, 자네가 아직까지 군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까?’
우지훈 준장은 언젠가 동생의 유해를 수습하러 간다며 한국으로 떠나고 난 뒤, 홀연히 종적을 감춘 옛 부하에 생각이 미쳤다.
사실 당시의 일은 두고두고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부하가 그간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의 심기를 달래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동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돌아오고 나서도 연인을 잃어버리는 등 아픔을 겪었던 이.
그러다 실종되었다던 쌍둥이 동생마저 죽은 채로 돌아왔었을 때…… 그의 마음은 이미 당시에 꺼멓게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수하가 한국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 위로를 해야겠다고만 여기고 있었을 뿐.
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하가 전화로 다짜고짜 전역 신청을 한다는 말만 남 기고 떠났을 때에도, 그저 ‘카인’이 사라진다는 사실에만 불안감을 느꼈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의 자신은 참으로 못된 상사였던 셈이었다.
그래도 우지훈 준장은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차 중사가 만약 실종되지 않고 군에 남아 있었더라면. 아니,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지훈 준장은 한평생 살면서 그만한 인재를 본 적이 없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우수한 반사 신경, 그리고 뛰어난 운동 신경까지.
돌이켜보면 그는 애당초 군보다는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이 특출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만약 아직 있었더라면, 혼란스럽기만 한 이 모든 상황들이 조금은 괜찮아졌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당초 이 많은 혼란들을 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늙은이의 헛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지금쯤 그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잘 살고는 있을지.
어디서 굶고 다니는 건 아닌지…….
치직!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동안, 무전기가 노이즈를 내면서 보고가 이어졌다.
[이제 곧 공략대가 투입될 예정입니…….]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는 어떻게 해서든 발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한국은 물론, 미 정부도 가진 공통된 판단이었고.
이를 위해 특별히 어젯밤 미국에서부터 특수 부대가 도착한 참이었다.
스피리얼 밴드. 오로지 S급의 플레이어들로만 이뤄진, 미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공략 부대가 간단한 휴식 시간을 가지고 투입되려는 것이다.
거기다 이러한 한국 소식을 접한 여러 대기업들이며 9대 길드들까지 도움을 주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으니.
우지훈 준장은 부디 그들이 공략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고향을 다시는 못 밟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공략 부대가 추가 투입된다는 보고와 함께, 일련의 플레이어들이 일사불란하게 게이트로 진입하려던 그때.
[게이트 폭주! 갑자기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직 브레이크까지 리미트 타임이 4시간 넘게 남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오로라에서 발산되는 마력장의 수치를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
[스피리얼 밴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경악과 비명으로 가득한 무선 통신이 수도 없이 오고 가는 가운데.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3, 2……!]
콰아아앙!
게이트가 폭발했다.
마력이 한가득 뭉쳐진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화염 폭풍이 먼지구름을 잔뜩 껴안은 채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 갔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왔지만, 굉음이 너무 큰 나머지 일절 들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우지훈 준장은 볼 수 있었다.
불기둥 사이로 튀어 오르는 두 줄기의 거대한 뇌전을.
그리고 서로 상반된 색을 자랑하는 뇌전 중에서, 특히 검은색 뇌전의 끄트머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