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구 (5)
연우가 떠나간 뒤.
무너지는 칠흑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히 떨어졌다.
외눈안경을 쓴 양복 차림의 고블린. 이블케였다.
“오효효효. 그러게 그렇게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조심하라고 했던 것인데. 하여간 누굴 닮아서 이리도 오만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요.”
이블케는 방금 전까지 제우스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곳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래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장기 말이었는데.
제우스는 자신이 잘났기에 그만큼 강해진 걸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물심양면으로 이뤄진 이블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힘에 취해 망아지처럼 날뛰다가 저딴 꼴이 되고 말았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앞으로 저만한 장기 말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그리고 또 언제 쓸만하다 싶을 만큼 키울 수 있을지, 이블케로선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블케의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말들이 몰려 있었으니까.
그와 함께 탑을 빠져나왔던 중앙 관리국뿐만 아니라, 여전히 종말을 향해 달리겠답시고 움직이는 시의 바다까지.
“이예도 있고 말이지요.”
이블케는 외눈안경을 고쳐 쓰면서 싱긋 웃었다.
“일단은 좀 더 어떻게 될지 지켜보도록 해야겠군요. 오효효.”
이블케는 꽉 주먹을 쥐고 있던 손바닥을 살짝 펼쳐 보였다. 방금 전까지 제우스의 보석안을 이루고 있던 두 개의 영혼석, ‘자선’과 ‘근면’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도로 입 안쪽으로 던져 넣어 가볍게 삼키더니, 씩 웃으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칠흑이 와르르 무너졌다.
* * *
“진짜, 얘는 어디로 간 거야……?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아난타는 거실을 초조하게 돌아다니면서 손톱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세샤가 언클로징 게이트에 들어가고 폭주가 일어난 뒤, 아난타는 계속 조급해지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똑같이 무장을 챙겨서 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치들도 전혀 가질 않고.”
아난타는 슬쩍 커튼을 열어 창 밖을 보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문 밖에 얼마나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 있는지 소란스러워도 너무 소란스러웠다.
국제적인 아이돌인 세샤의 실종 소식에 어떤 기삿거리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이 몰려든 것이다.
저것들, 그냥 날려 버릴까? 아난타는 아주 잠깐 그런 충동이 들었다.
탑에서도 저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마녀들의 집요한 추격으로부터 세샤를 보호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나날들.
물론, 그때보다야 이곳 지구에서의 생활이 훨씬 평화로운 게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법’을 방패 삼아서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는 것들을 보면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난타는 화를 꾹 삭이면서 커튼을 다시 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 폭주 소식이 속보로 전달되고 난 뒤, 세상은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있고 나면 으레 있어 왔던 몬스터 웨이브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그저 하늘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만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추가 폭발과 여진이 많이 가라앉으면서 구조와 탐사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는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공략대와 채집반의 생존.
아직 정확한 경과보고는 이뤄지지 않아 아난타로서도 그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그런 폭발과 폭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당사자들도 적잖게 당황하고 있는 눈치인 것 같았다.
다만, 생존자들이 ‘대부분’이라고만 표기된 것은, 두 사람이 홀연히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채집반의 어느 이름 모를 플레이어였고.
다른 한 명은 이번 행사를 주관 하기도 했던 세샤였다.
그러니 세샤에 대한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아난타로서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당장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실 저 밖에 있는 취재진들 때문이 아니었다.
아난타는 주변의 눈치를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고, 만약 저들이 자신을 방해한다면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냥 치워 버릴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는 건, 그만큼 자신의 딸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야 자신이 품어 주고 도와줘야만 하는 아이였지만, 지금은 충분히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아이였으니까.
남들이 봤을 때는 여전히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여고생이라 하더라도, 세샤는 보통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 조막만 하던 아이가 이만큼 컸다는 사실이, 더 이상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따금 안타깝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크면서 부모의 곁을 떠나는 건 아주 당연한 수순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용납되지 않는 점이 딱 하나 있긴 했다.
“차정우…… 이 인간, 정말 돌아오기만 해 봐. 아주 등짝을 날려 버릴 거니까.”
딸이 이 지경으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비라는 인간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자빠져 있는 건지.
아난타는 몇 년째 소식도 없는 차정우가 얄밉기만 했다.
물론, 그렇기에 그 역시 아무 이상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엄마아아!”
아난타는 밖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딸의 목소리였다.
똑같이 그 말을 들은 취재진들도 들썩거렸다.
“차소영 양이다!”
“어, 어디?”
“위!”
“헉!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저, 저런 스킬도 있었나?”
“뭐 해, 어서 카메라 돌리지 않고!”
“그런데 차소영 양을 안고 있는 저 남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차소영 양과 함께 실종되었다던 채집반이라도 되나 보지!”
“하지만 그는 분명히 F급…….”
“시끄럽고, 어서 카메라 들라고!”
아난타는 그동안 카메라가 찍을 수 없도록 꼭 닫아 놨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세……!”
딸에게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 했던 아난타는 저도 모르게 얼어 붙고 말았다.
처음에는 남편이 돌아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남편과 생김새만 같을 뿐,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의 뒤에 활짝 펼쳐져 있는 날개가 검고 붉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난타의 눈가에는 눈물이 차 올랐다.
“엄마! 내가 누구 데려왔게?”
세샤는 연우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려 창가로 내려앉았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에는 지구로 오고 난 이래 조금씩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전부 지워져 있었다.
연우가 조심스레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정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들어와도 되는 건지, 낯선 집에 아주 잠깐 주춤거렸지만. 그는 곧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세요, 아주버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 * *
‘여기가 세샤와 정우 녀석이 사는 집이란 말이지?’
연우는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거실과 마당을 쓱 훑어보았다.
서울 서초구 한복판에 위치한, 넓은 마당까지 딸린 4층짜리 단독 주택.
자신이 한국에 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생각지도 못하던 집에서 살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거긴 했다.
아무리 몸만 다급하게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들이 탑을 머무는 동안 쌓은 재산은 상당한 것이었으니까.
그중 일부만 가지고 나와도 지구에서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물며 탑과 비슷하게 시스템이 정착된 현재의 지구 환경이라면 더더욱.
‘지구가 이렇게 바뀌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연우는 아난타와 세샤에게서 무너지는 세계에서의 탈출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리 쉽지 않았을 지구 정착 과정이, 시작의 날로 대변되는 재앙의 발생으로 인해 혼란기가 찾아오게 되자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 것부터.
세샤가 그동안 자선 활동을 계속 벌이면서 연우를 찾고자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헤헤헤.”
세샤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자, 멋쩍게 웃었다.
본인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니 뭔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난타는 그런 딸이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가볍게 웃으면서 물었다.
“간만에 고향 공기 맡아 보신 기분은 어떠세요?”
“고향이라…….”
연우는 커피잔을 살짝 내리면서 작게 읊조렸다.
입가에 씁쓸하게 웃음이 걸렸다.
여태껏 생각지 못한 질문.
덕분에 그는 한순간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 고향이란 그리 정감이 가는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에게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주는 곳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를 잃고, 동생이 사라졌던 곳. 그에게는 좌절과 절망밖에 남아 있지 않아 등을 져야만 했고, 아주 잠깐 돌아왔을 때에는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받았던 곳.
그렇기에 연우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아픔만을 주는 곳이 고향이라면 그냥 가슴 속에서도 잊는 게 제일 좋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다 보니 다시 돌아오게 된 지금.
아난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것도 그냥 그럴싸하게 만든 대답이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만큼 아픔이 가신 걸까. 아니면 감정이 무뎌져 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더 이상 고향이 주는 무게가 별달리 무겁지 않은 걸까.
어쩌면 그냥 고향이라는 것 자체가 더 이상 그에게 별 중요한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칠흑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지내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체험하고 경험했던 수많은 ‘꿈’들은 그로 하여금 몇 번씩이나 ‘연우’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실 지금 연우는 ‘연우’라는 정체성도 많이 무뎌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살아온 삶은, 따지자면 현재 ‘낮’에 속하는 신과 악마들도 좁쌀만 하다고 여길 만큼 아주 기나긴 세월이었으니까.
영겁(永劫).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우는 이미 너무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 아둔하기까지 하다는 칠흑왕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지구라는 세계는 무수히 많은 ‘꿈’의 일부일 뿐이며, 그저 그가 발원한 장소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연우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아직 이곳에 내 인연이 남아 있으니까.’
최소한 이곳에 남아 있는 인연 들을 모두 정리하고, 그와 함께 있었던 악연들까지 전부 정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 곳곳에 남아 있는 인과율이 여전히 연우를 단단히 묶어 이곳에 있게 만드는 셈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할 일도 있고.’
꿈이란 언젠가 저물기 마련이다.
연우는이 ‘꿈’이 유예되었다고는 하나,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이미 알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서 거슬러서 중간 부분을 보고 있는 셈이었으니.
다만 연우는 그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있는 빈 페이지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써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난타로서는 연우의 그런 속내를 알 수 없었기에 그가 오랜만에 고향으로 귀환해 얼떨떨해하고 있다고만 생각하며 가만히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연우는 얼핏 그런 아난타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지만, 모른 척 넘기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걸렸던 다른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방주’라는 것 말입니다만.”
“네.”
“혹시 어떤 것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사실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아가레스가 저희를 인도하면서 옛 고대신들이 남긴 안배라고만 했었을 뿐이라. 저희가 본 것도 그냥 단순한 ‘배’였었구요.”
‘배?’
연우는 잡힐 듯 안 잡히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요란하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조금 특이점이라면, 그곳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바이 더 테이블의 수장님이나, 아나스타샤 님을 만났다는 것 정도…….”
연우는 한순간 눈이 퍼뜩 뜨였다.
“저희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었어요. 탑 외 지역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이와 아주버님의 고향으로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나스타샤 님은 그걸 두고 아주 ‘당연한’ 안배였다고 하셨어요.”
한순간, 연우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혹시 그 방주라는 것, 퀴리날레의 유산이라고 하였습니까?”
이번에는 아난타가 놀란 눈이 되어 연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분명히 그런 말씀들을 하셨었…….”
연우는 아난타의 뒷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물들일 뿐이었다.
방주.
그것은 어머니의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