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11화 (711/862)

11화. 지구 (7)

‘방주’를 처음 보게 되고 난 뒤, 연우가 느낀 감정은 아주 간단했다.

‘작군. 생각보다.’

연우는 모두가 빠져나온 ‘배’라고 하기에 아주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못해도 지구에서 사용하는 대형 선박쯤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방주는 끽해야 일반 가정집 크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래서야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싶다마는.

‘가능하겠지. 괜히 공간의 프네우마라고 불렸던 게 아닐 테니까.’

연우는 방주 안쪽에 마련된 공간이 아마 웬만한 스테이지쯤은 쉽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큰 크기를 자랑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프네우마와 함께 ‘낮’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일족이라 불렸다고 하지 않는가.

공간을 상징한다면 그만한 장치쯤은 되어 있겠지.

다만, 연우가 신기했던 점은 방주가 아니었다.

여태 방주가 보관되고 있는 공간이었지.

‘아공간…… 아니, 단순히 이걸 아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우가 방주를 둘러싼 아공간을 둘러보는데, 옆에서 아난타가 설명을 덧붙였다.

“탑의 세계를 빠져나온 이후로, 방주는 여태껏 아공간에 넣어 두고 있었어요. 사실 탈출할 때 외에는 쓰는 방도도 잘 모를 것 같아서…… 그래도 이따금 관리를 위해서 찾아오긴 하는데, 그때마다 놀라곤 해요.”

사실 방주가 있는 곳은 단순한 아공간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별세계(別世界).

기존의 우주나 차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였다.

하늘이 있고, 해와 달이 있으며,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다. 상쾌한 바람이 불고, 풀잎도 흔들렸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확 트이는 듯한 기분을 주는 곳이었다.

햇살도 따사로워서 가만히 있으면 잠이 절로 올 정도였으니. 그 느낌이 연우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기만 했다.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련한 감정.

‘어머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다만, 이 세계에는 시간이 흐르질 않았다.

모든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는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무언가가 죽는 일도, 태어나는 일도 없었다. 낮과 밤도 정지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럼 둘러보시고 말씀주세요.”

아난타는 연우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이용해서 지구로 돌아간 것이다.

“아버지.”

그의 부름에 스퀴테가 분해되었다가, 인간 형체로 조립되었다.

크로노스는 연우가 무엇을 물으려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몰라.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연우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래도 정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내가 프네우마인지 뭔지 하는 것의 후손인 줄도 여태 모르고 있었잖아? 퀴리날레가 무엇인지도 네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겠지.』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니 아버지가 잘 아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만.

역시나 안일한 생각이었던 걸까.

‘하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에 손을 잡으셨던 것도 사랑이 아닌 정치적인 동맹 때문이었으니. 아버지라고 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다 아시기는 힘들겠지.’

이 방주는 분명히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지구로 넘어오시기 전에 남긴 물건이 분명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신력이 어머니의 품성과 너무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이보다 확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가 이것을 왜 남기셨냐는 것인데…….

단순히 탑이 언젠가 무너질 것을 대비해서 자식들 중 누군가가 쓰라고 남기신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비밀스럽게 전승되었고, ‘낮’의 존재들밖에 알지 못했다.

‘역시 바이 더 테이블을 방문할 수밖에 없나.’

어차피 연우도 그들을 언젠가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으므로, 같이 일을 풀어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보다, 아들아.』

연우는 크로노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훨씬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너는 굳이 그러지 않고 꼭 돌 아가려고 하는 거냐?』

순간,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태도는 진지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다만, 너는 꼭 네 엄마를 소환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데. 혹시 내 생각이 틀렸더냐?』

“…….”

『이 아버지가 못난 나머지 너희 형제들에게 여태 제대로 아비 노릇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만. 그래도 그것만큼은 꼭 물어보고 싶었단다.』

연우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러다 아주 잠깐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속에 든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말씀…… 맞습니다.”

『뭐……?』

“지금이라도 어머니를 부를 수 있고, 영혼을 찾을 수도 있을 테지만……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아버지도 보시다시피 지금 저희 형제 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

“정우는 크게 다친 상태고, 저도 제대로 된 상태라고 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아버지도 사실 크게 다치셨던 적이 있으시니…… 좀 저희 부자(父子)들 꼴이 괜찮아지면 그때 직접 뵙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흠……!』

크로노스는 심사가 복잡한 얼굴이 되어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연우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으니까.

사실 그가 연우의 입장이 되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만약 레아가 그들 부자들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면서 자책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못난 어미 때문에 모든 가족이 고생한다면서 몸조차 못 가눌지도 모른다.

레아가 깊은 병에 걸린 이후. 차정우는 그녀의 병을 치료할 약을 찾고자 탑으로 넘어갔다가 그런 일을 겪었고, 녀석을 어떻게든 데리고 나오고자 했던 크로노스도 횡액을 당했다.

연우는 어떻게 말로 표현 못 할 시련들을 여러 차례 겪다가, 겨우 겨우 아버지와 동생을 찾아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련은 현재 진행형이다.

더군다나 올림포스에 두고 온 다른 자식들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그렇다 보니 자꾸만 머뭇거려지게 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레아를 사자 소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은.

『……네 걱정은 어떤 건지 잘 알겠다.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 같으니. 하지만 모든 게 정리되고 난 뒤에 네 엄마를 부르면, 그때 네 엄마가 받게 될 충격이나 원망은 생각지 않아도 되는 거냐?』

“…….”

『네 엄마는 항상 희생만 했던 사람이다. 가족들을 위해서. 그러고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아주 착한 사람이지. 그런데 그런 사람의 가슴에다 더 큰 대못을 박으려는 거냐?』

크로노스는 연우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딴 꼴 절대 못 본다.』

연우는 크로노스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시 삭이기를 반복했다.

“아버지.”

『왜?』

“다른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그냥 굳게 절 믿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냐?』

“…….”

연우는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크로노스를 바라보았다.

크로노스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특히 연우가 가진 ‘생각’이란 게 도통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여태 칠흑에서 연우와 계속 같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 동안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보이는 태도는 어쩐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아무리 인성이 파탄 난 아들이라지만, 그래도 제 부모 앞에서 그딴 짓은 하지 않겠지.’

크로노스는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 버리고, 끝끝내 묻지 못한 채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태껏 네 할 일은 네가 알아서 잘해 왔으니 이번에도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대신에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 둬라. 만약에 네 엄마…… 아니.』

크로노스가 처음으로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내 여자 눈에서 또 눈물을 흘리게 했다간,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라.』

“……!”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이런 강단이 있었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 들어 우울한 모습만 보이시던 것과는 달라서 보기 좋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아버지.”

『왜?』

“제가 아버지보다 더 센데 어떻게 절 때리시겠단 겁니까?”

『…….』

크로노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나와.”

츠츠츠-

연우의 간단한 명령에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그 위로 쇠사슬에 결박된 제우스가 나타났다.

제우스의 몰골은 도저히 말이 아니었다.

생기란 생기는 모두 빨린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 그 때문에 격도 한없이 쇠락해서 신력 생산도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상태였다.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후후. 이게 누구신가. 우리 막내가 아니신가. 그래. 이 형이 보고 싶기라도 해서 불렀나 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듯 연우를 잔뜩 노려보면서 입술 끝을 잔뜩 비틀었다. 부서진 눈알이 피로 번들거렸다.

신의 목소리, 진언(眞言)을 내뱉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야 그나마 겨우 남아 있는 신력도 몽땅 소진될 게 분명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더 안타까울 뿐이라, 크로노스는 차마 제우스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연우도 굳이 아버지에게 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과 제우스만 있는 공간을 별도로 유리시켰다.

“너에게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아버지가 계시니 짧게 몇 가지만 묻고 끝내지.”

『흐흐. 언제나 내게 있어서는 지옥과도 같았던 아버지가, 이렇게라도 아버지 노릇을 하시는군.』

“이블케, 어디 있지?”

『물으면 순순히 ‘예, 이렇습니다요’ 하고 대답해 줄 거로 생각하나?』

“아니. 그러진 않겠지. 너도 자존심이 있을 테니까.”

『그럼 왜 묻는 거지?』

“확인해 볼 게 있었으니까.”

『……?』

제우스는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연우는 제우스에게서 한 발 뒤로 떨어지면서 조소를 날렸다.

“이블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군. 그와의 연결 고리도 끊어졌고.”

그 말에 처음으로 제우스의 낯이 살짝 흔들렸다.

『너, 설마……?』

“영혼은 칠흑에서 비롯된다는 거, 모르나?”

연우의 두 눈은 화려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중이었다.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자의 눈]

[천안통]

연우는 여태껏 제우스의 영체를 포함해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에게 작용하는 모든 축복이나 가호 따위를 낱낱이 파악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영자(靈子) 단위로 하나하나 파악해 버린 것이다.

이래서야 제우스가 여태껏 쌓은 신화가 통째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거기서 파생된 신위, 신격, 신성 따위가 모조리 노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권능과 신권도 이미 연우에게 들통났으니, 이후에 그가 운 좋게 재기한다고 해도 더 이상 연우를 거스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여하튼.

연우는 제우스라는 ‘데이터’를 파헤쳐 약점을 모두 파악해 냈고.

연결 고리 중 어디에도 이블케가 닿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연우우우우!』

쿨럭, 쿨럭!

우웨에엑!

제우스는 분노에 젖은 나머지 괴성을 지르다 말고, 갑자기 바닥에다 머리를 처박고서 피를 한참이나 게워 냈다.

하나같이 검게 죽은 피들. 분노가 너무 큰 나머지, 그나마 남아 있던 신력도 역류를 일으킨 것이다.

저대로 둔다면 그냥 죽어 버리고 말 테니, 일단 숨은 붙여 놔야겠지.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우스를 도로 그림자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는 내내 원망하는 눈치가 느껴졌지만, 연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아아!

뒤쪽에서 크로노스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연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때마침 외부로 돌렸던 그림자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블케에게 던졌던 미끼.

녀석이 가져갔던 두 개의 주선석에 심어 두었던 그림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