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지구 (8)
「정말이지 아무리 봐도 우리 주인님의 인성은 너무 훌륭해용!」
그때, 잠시 외출했던 그림자를 받아들인 연우의 그림자가 크게 출렁거렸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라플라스가 키득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에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온 그림자가 바로 제우스의 사도, 김범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김범승에게 있어 연우와 세샤 가족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하필 그들이 방주를 타고 지구로 넘어왔던 시점에 맞닥뜨려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기에 김범승은 십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세샤에게 접근할 만한 기회를 노렸고, 드디어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연우를 만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리고 지금은 제우스와 함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와 한낱 망령으로 영락해 버린 상태였다.
「가만히…… 두지 않을……!」
보통 망령들이 너무 쇠락한 나머지 대부분 생전의 기억을 유실해 버린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김범승은 꽤 특이한 경우였다. 그는 억지로나마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만큼 연우에 대한 원망이 아주 깊단 뜻일 테지.
물론, 그런 자아와는 반대로 자유는 없었기에 연우가 부리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 인형 신세였지만.
그래서 녀석은 그동안 주선석에 붙들린 채로 이블케의 뒤를 밟아야만 했다.
그리고 되돌아온 지금은 보고를 해야 했지만.
끼아아!
「나는…… 말을 하지 않을…… 으아아아!」
연우에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의사와 다르게, 그의 망령은 여태 자신이 보고 겪었던 것들을 전부 사념의 형태로 줄줄이 토해 냈다.
라플라스는 바로 이점을 두고 인성을 운운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이를 이렇게 갖고 노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연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었다.
여태까지 그가 모았던 권속들, 부를 비롯한 이들이며 망자 거인, 사룡들은 전부 동생에게 붙여 준 상태.
때문에 당장 그에게 남아 있는 권속은 라플라스가 전부였다. 하지만 라플라스를 주선석에 묻어 두어서야 이블케에게 들키기 십상이니, 비교적 약한(?) 김범승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장 그가 소울 컬렉션에 넣어 둔 영혼이 그것뿐이었으니까.
다만 억울한 점이 있다면, 그 역시 김범승의 영혼이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흔히 신의 사도라면 그 신의 위격에 따라서 사도가 가지는 영격도 달라지기 마련인바, 당연히 제우스의 위격을 생각한다면, 김범승의 영격도 높은 편이어야 했다.
아니, 실제로 꽤 높은 편이기도 했다.
하나, 문제는 그 정도로 연우의 눈에 차기는 힘들다는 점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신과 악마들을 상대해 오며 그들의 영혼을 강탈해 온 연우다. 사도가 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필멸자의 것이 어디 눈에 차기나 할까.
‘빨리 정우를 찾아서 권속들을 회수하든가 해야지, 원.’
일개 망령이 보고 들어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량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김범승이 가져온 정보도 그리 양이 많거나 질이 좋은 건 아니었다.
단편적으로 분리된 정보 조각이 전부였다.
‘이걸로는 부족해. 조금 더 필요하겠는데.’
만약 이곳이 탑이었다면 이런 부분적인 정보를 가지고도 이블케의 위치가 어디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탑이 아닌 지구. 그리고 수도 없이 펼쳐진 세계와 차원이 있었다. 이 정도 정보만으로 정확한 좌표를 찾아낸다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곧장 녀석이 있는 위치로 갈 생각도 없고.’
연우는 가능하다면 계속 이블케에게 눈을 붙여 둘 생각이었다.
여태껏 녀석이 하던 짓을 봐서는 뜻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가 있거나, 배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왕에 이블케를 잡을 거면 그들의 본거지를 쳐야겠지.
“계속 감시해.”
끼아아!
연우는 손에 붙들고 있던 김범승의 망령을 가볍게 쳐 냈다.
그러자 그림자가 찢어지는 귀곡성을 내뱉으면서 도로 흩어져 사라졌다. 현재 뿌리가 박혀 있는 주선석의 그림자로 귀소한 것이다.
「하여간! 참으로 멋진 인성인 것이에용!」
라플라스는 그것을 보면서 아주 즐거워했지만.
* * *
“뭔가 재미난 게 있으세요?”
소녀, 사리나 주니오르는 품에 꽃을 잔뜩 안은 채로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얼굴에 검은 재가 덕지덕지 많이 묻어 있긴 하지만 해맑은 얼굴. 특히 양손에 잔뜩 들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귀나 머리에도 꽂을 잔뜩 꽂고 있어 진한 향이 강하게 풍겼다.
그녀 자체만 두고 본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다만, 사리나가 있는 주변은 전혀 그렇질 못했다.
모든 게 엉망이었으니까.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끝없는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었을 마천루들은 모두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뼈대만 남아 휑했고.
잘 닦여 있었을 도로는 곳곳이 내려앉아 크레이터가 형성되어 있거나, 그 위로 무너진 건물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상태였다.
더불어 황량하게 부는 바람 속에도 황색 먼지가 자욱하게 섞여 있었으니.
곳곳에 마련된 건물 무덤군에는 부서진 전차나 날개를 잃은 항공기들, 총기류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끔찍한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
주변 어디에서도 인기척이나 생명체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곳에 홀로 있는 8살 난 해맑은 소녀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지만.
사리나는 그런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런 폐허들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익숙하기만 했으니까.
약하면 죽고, 강자에게 모든 걸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폭력과 억압이 가득한 이곳에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그녀가, 지금은 강자의 위치로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눈앞에 있는 존재 덕분이었다.
아수라왕.
본명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던 그녀에게,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말하였다.
사리나에게 있어 그는 영웅이었고, 하늘이었으며,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아수라왕. 사리나의 영웅인 비마질다라는 명상에 잠겨 있다 말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다 자신에게 바짝 얼굴을 붙인 사리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별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두 눈에는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웃고 있다, 라…….
비마질다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웃을 때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물론 있긴 있었다.
보통 조소나 비웃음을 지어서 그렇지.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웃음은 분명히 기쁨에 찬 미소였다.
그러니 사리나, 이 깜찍한 꼬맹이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일 테지.
그녀와 함께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태껏 이렇게 웃을 때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항상 ‘싸움’을 외치면서도, 이 행성에 온 이후로 그리 흥미진진한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상당히 욕구 불만인 상태였다.
“재미난 거라……. 그래. 아주 재미난 거지.”
“어떤 거예요? 사리나한테도 가르쳐 주세요!”
사리나의 두 눈은 이제 별이 와르르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반 짝였다.
비마질다라와 함께하는 생활은 항상 즐겁지만, 때로는 또래 친구가 없어 심심하기도 하다. 그러니 혹시 재미난 놀이라도 생겼을까 싶었던 것이다.
“친구가 왔단다.”
“우와! 아저씨한테도 친구가 있었어요?”
“음! 글쎄. 모르겠구나.”
“응? 친구가 왔다면서요.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그를 친구라 생각한다만, 그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서 말이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친구면 친구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가?”
“그럼요!”
비마질다라는 딱 잘라서 말하는 사리나를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세상만사가 그녀의 말처럼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전 아저씨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아저씨는 저를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어요?”
그때, 사리나가 앙증맞게 양손을 허리에 얹으면서 내뱉은 소리에 비마질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러다 가만히 ‘친구’라는 단어를 읊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나와 너는 친구 사이였지.”
“그렇죠? 헤헤헤.”
사리나는 엄했던 얼굴에서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 헤실거렸다.
비마질다라는 그녀가 자신이 대답을 주기 전까지 얼마나 심장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불안했던 거겠지. 1년 내내 보호자라고 여기며 따라다녔던 사람이, 자신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릴까 봐. 또다시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가 한가득 든 꽃. 저건 그녀와 똑같았다.
뽑혀 버린 나머지 돌봐 주지 않으면 시들고 말 꽃.
비마질다라는 그것을 잘 알기에 사리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행성의 정 반대편.
그곳에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친구, 라.”
그를 떠올리니,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흥미진진한 미소.
“그래. 우린 친구였지. 그렇게 칼을 겨누었는데 어찌 아니라 할 수 있겠나. 그러니 어서 오게, 친구. 이제야말로 지난번에 이루지 못한 승부를 겨뤄 볼 때가 아닌가.”
지구의 대기를 타고 흘러온 칠흑이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멀게 돌고 돌아온 공기가 이 정도일진대, 진짜는 얼마나 더 재미날까?
비마질다라는 곧 찾아올 싸움이 너무 기대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 * *
탈영병인 ‘카인’을 협회로 귀속시키겠다.
우지훈 준장은 순간 이야기를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소?”
어느새 공손했던 존대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만큼 조슈아가 방금 전에 내뱉은 말은 아주 충격적이었으니
하지만 조슈아는 전혀 잘못 들은 게 없다는 듯이 또박또박 끊어서 말해 주었다.
“탈영병은 군법에 있어 최고 사형까지도 가능한 중죄입니다. 하물며 ‘카인’은 당시에 아프리카 소말리아 지역에서 중요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고, 일신상의 불우한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뒤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는 국제법을 어긴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일급 기밀로 분류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카인’의 소속이 단순히 한국군이 아닌, 국제 연합군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해서 저희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어떤 기회 말이오?”
“당연히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이지요. 다시 돌아와 세계 평화와 안전, 그리고 질서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보인다면 정상 참작을 해 줄 생각입니다.”
우지훈 준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다. 탈영병에 대한 엄벌 조항은 한국군이든 미국군이든 다를 게 없었고, 당시 ‘카인’이 군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기밀 유지를 위해서라도 그는 발견 즉시 사살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돌아왔으니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오?”
문제는 상대가 언터처블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제우스와 다퉜던.
비록 승부는 곧이어 찾아온 이상한 어둠에 잠겨 알 수 없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그런 존재를 강제로 귀속시키겠다고?
대체 어떻게?
함부로 대들었다간 한국, 아니, 한반도 자체가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러니 우지훈 준장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지훈 준장은 문득 든 생각에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느새 보안 요원들이 그의 주변을 삥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조슈아가 특별히 부린다는 협회 직속의 특수부대, ‘헬 하운드’가 분명했다.
“……인질극이로군.”
“미스터 우는 ‘카인’에게 있어 친부나 다름없는 존재라 불렸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와 나는 단순한 상관과 부하 관계였을 뿐이오.”
“그전에 나누셨던 연락이나, 주변인들의 진술은 다르던데요.”
‘내 뒤를 아주 샅샅이도 뒤졌군. 어제 반찬으로 뭘 먹었는지도 알겠어.’
“여하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격을 갖췄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입니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외부에 밝혀지진 않았지만, 저흰 탈각을 이루기도 했던 ‘존재’를 레이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었습니다.”
“……!”
“과거에 있었다던 탑의 하이 랭커나 아홉 왕에는 못 미칠 것이나, 저희들은 저희 나름대로 비밀 병기를 마련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
“저를 뒷바라지해 주시는 여신께서도 직접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셨었으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
우지훈 준장은 적잖게 놀란 상태였다.
조슈아의 신은 초월자들의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였으니까. 전쟁뿐만 아니라 지혜와 승리, 심지어 문명까지 주관한다는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아무리 언터처블이라고 해도 당해 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우지훈 준장은 저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계속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플레이어들의 세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한때 ‘카인’의 직속상관이었던 몸으로서 한 가지만 경고해도 되겠소?”
“귀담아 경청하도록 하지요.”
“‘카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그가 손을 대면 마치 마술처럼 풀리곤 했지.”
“마술이라……. 충고 감사합니다, 미스터 우. 하지만 그 충고를 듣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 같군요.”
조슈아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이미 저희 측 일원들이 움직였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