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지구 (10)
토마스 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
아레스더러, 튀어나와?
아레스는 자신이 모시는 신이다. 비록 스스로가 열렬한 신앙심을 품고 있는 신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모시는 신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다.
전 세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아주 유명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단연 가장 높은 자리 중 일석(一席)을 차지하고 있고.
제우스의 수많은 자식들 중에서도 헤라에게서 태어난 적통이기도 하지 않던가.
비록 망나니라는 소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고대 로마가 한창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는 ‘마르스’라는 이름으로 제우스에 버금가는 신앙을 자랑하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레스를 마치 수하 부르듯이 부르는 모양새에 당연히 부아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샤도 그렇고, ‘카인’도 그렇고. 둘 다 올림포스를 너무 쉽게 여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를 겪으면서 뇌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셋.”
하지만 연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한 채로 숫자를 헤아렸고.
토마스 리는 개소리하지 말라면서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는데.
『뭐야? 왜 이렇게 채널링이 흔들려? 뭐라도 있나? 야! 대체 무슨 일……!』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골을 뒤흔들었다.
토마스 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껏 명색이 사도가 되고 나서도,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신의 목소리가 아닌가!
다른 사도들은 모시는 신과 줄곧 잘만 이야기를 나눈다고 들었지만, 그는 그동안 신탁이나 계시를 따로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 리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신께서 그를 시험하시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드디어 지금 이 순간 듣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순간 다른 놈이 수작질을 부리는 건가 싶었지만, 토마스 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자신이 모시는 신, 아레스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채널링이 강하게 떨렸고, 무엇보다 영혼이 울리고 있었다.
신께서 분노하고 있음이라!
그래서 곧장 신명을 더럽히고자 하는 저 무엄한 작자에 대해서 고자질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레스가 투덜거리다 말고 도중에 말을 멈췄다. 아주 잠깐이지만 적막이 흘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채널링에 집중하는데.
딸꾹!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런 소리가 들렸다.
‘따, 딸꾹?’
무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화들짝 놀랐을 때 보통 저러지 않던가.
“둘.”
『저, 저, 저, 저 양반이 왜, 왜, 왜, 저, 저, 저기에 있어? 부, 분명히 깨, 깨, 깨어나면 우리가 알 수 있게 아테나 사도한테 마, 마, 말해 놨었……!』
‘시, 신이시여?’
아레스는 마치 절대 만나서는 안 될 존재라도 만난 것처럼 목 소리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토마스 리는 채널링을 통해 아레스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경악.
충격.
공포.
‘시, 신이시여?’
워낙에 심한 감정적 동요이기에 토마스 리도 똑같이 거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신이 통째로 날아갈 판이라, 토마스 리는 아레스에게 왜 그러냐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레스의 귀에는 사도의 애타고 간절한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개긴다, 이거로군. 좋아. 하나.”
그런 와중에도 카운터는 착실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으아아아아아!』
아연실색한 아레스의 비명이 골을 거칠게 흔들더니, 갑자기 채널 링이 격하게 울리면서 또렷해졌다. 토마스 리의 정신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거대한 영혼이 그의 몸을 대신 차지했다.
강신(降神)!
화아악, 하면서 강풍이 불어닥쳤다. 거대하고 웅장한 신력이 내려앉으면서 토마스 리의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시, 신이 내려온다!”
“갑자기 여기서?”
“대장의 신이라면 아, 아레스잖아? 아레스가 나타난다고? 대체 왜……?”
하지만 그런 여러 의문들을 뒤로한 채, 토마스 리의 머리 위로 떠오른 배광이 한껏 빛을 뿜어 댔다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헬 하운드의 플레이어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몇몇은 환희에 젖기도 했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신께서 직접 도와주신다면 승부는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들은 모두 승리를 한층 더 확실히 장담하고 있었다.
이제 곧 그들의 신께서 저 시건방진 작자를 혼내 주시리……!
“영……!”
『스토오오옵!』
연우가 마지막 운을 띄우려는 순간, 토마스 리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연우 앞으로 넙죽 엎드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토마스 리의 몸뚱이에 빙의한 아레스였다.
『아, 아레스가 신 차연우 님을 뵙……!』
“늦었어.”
아레스가 허겁지겁 뭐라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이미 연우의 입술 끝은 더 크게 비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허공에다 손을 흔들었다. 마치 파리를 내쫓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콰아아앙!
『꾸에에엑!』
갑자기 땅에서부터 그림자가 거칠게 일어난다 싶더니, 그대로 아레스를 거칠게 후려쳤다. 아레스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저만치 튕겨 나 데구루루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
“…….”
“…….”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우, 우리들이 대체 지금 뭘 본 거지?
혹시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모두 그런 표정이었다.
하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별도로 유리된 공간에서는 그런 환각 따윈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역시 3초 준다. 선착순 다섯 명, 실시.”
콰릉, 콰릉, 콰르릉!
쿠쿠쿠쿠-
[‘헤라클레스’가 강림합니다!]
[‘디오니소스’가 강림합니다!]
[‘아폴론’이 강림합니다!]
[‘아르테미스’가 강림합니다!]
[‘카리테스’가 강림합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넋이 나가다 못해 완전히 영혼이 빠져 있었다.
지금 벌어진 것은 단순한 강신이 아닌, 신이 직접 인과율을 소모해서 하계에 몸소 내려오는 강림이었으니까.
하나같이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곤두설 것 같은 강렬한 영압을 뿜어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들이 전부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연우 앞에서 넙죽 엎드린다는 점이었다.
올림포스는 협회를 비호하며 지구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가장 앞선다고 알려진 선신(善神)의 사회.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헬 하운드는 대부분이 올림포스의 열렬한 신도들이었다.
그런 곳의 대신격들이 저렇게 고개를 조아린다고……?
더 큰 문제는.
[모모스가 강림합니다!]
[에리스가 강림합니다!]
……
그 뒤로도 올림포스 신들이 줄줄이 허겁지겁 나타난다는 것이었으니.
어느새 그들이 있는 공간은 엄청난 영압에 짓눌려 짜부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둘러보면서 뒤늦게 나타난 이들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카리테스 뒤로 나타난 놈들은 전부 집합. 앞서 온 놈들은 열외다.”
그 말에 모모스 등은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고.
카리테스 등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 *
“원산폭격 실시. 자세 흐트러지거나, 신력 쓰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림자에 들어가고 싶은 걸로 알지.”
“으어어……!”
“어어……!”
연우의 명령에 따라 올림포스 신들이 전부 얼차려를 하는 광경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그냥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뭘 해야 할지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했다. 물론, 이미 연우를 어떻게(?) 해 볼 생각 따윈 지운 지 오래였다.
-왜? 계속 해 보려고? 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지만.
연우가 그들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면서 던졌던 한마디는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연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까닥하다간 올림포스와 단체로 전쟁을 치르게 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을 노려보는 올림포스 신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건 ‘전쟁’이란 단어로 끝낼 수 없을 터였다. 그냥 지구 멸망이겠지.
그렇기에 헬 하운드는 즉각 무장을 해제하고, 올림포스 신들의 얼차려가 어서 끝나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연우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분명히 신원은 실종된 ‘카인’이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올림포스 신들이 저렇게 숙이고 들어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상식으로, 필멸자와 초월자 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의 차이가 있고, 때문에 초월자들이 한낱 인간에게 저처럼 넙죽 엎드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사실이 협회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파란이 일어나게 될지.
그들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여기서 살아나는 것부터가 가장 급선무일 테지만.
한편.
헬 하운드를 끌고 온 토마스 리는 정말 죽음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버러지 같은 새끼가……! 뭐? 감히 누굴 건드려? 정녕 네가 뒈지고 싶은 것이냐?』
연우 때문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아레스 때문이었다.
아레스에게서 풍기는 살의가 너무 지독하게 끓고 있는 나머지, 토마스 리의 영혼은 금방이라도 짜부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만큼 아레스는 크게 격노하고 있었다.
한낱 인간 때문에 연우를 자극하고 만 꼴이 되었으니까.
십 년 전의 연우만 하더라도 신왕의 업을 이어 쉽게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건만.
칠흑의 힘을 흡수하고 눈을 뜬 지금은 대체 격이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물론, 그 역시 사도이니 연우의 격이 높아지는 만큼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될 테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단단히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었다.
‘으, 으어어……!’
그 때문에 토마스 리는 어느샌가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사실상 백치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하여간 두고 보자. 이 일은 추후에 따져 물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둘 아레스가 아니었으니, 분노를 여전히 토해 내고 있었지만.
저대로 있다간 영혼이 아예 소멸하겠다 싶을 때 즈음, 그와 1대 1 대면을 하고 있던 연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올림포스가 협회인지 뭔지를 지원했던 게, 지구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고?”
『그, 그렇습……!』
“진언이 아니라 육성으로 직접 말해. 귀 울리니까.”
“그렇습니다!”
아레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누가 일어나랬지?”
“헙!”
아레스는 다시 조용히 엎드려뻗쳐 자세로 돌아갔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난타로부터 대충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긴 했다지만, 그래도 천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대탈주가 이뤄진 뒤. ‘밤’은 지속적으로 이쪽 우주로의 진입을 시도했고, 차정우를 중심으로 한 ‘낮’은 그들에 대한 항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림포스는 연우의 의지에 따라, 그리고 초대 수장이었던 우라노스의 유지에 따라, ‘낮’에 가담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우가-정확하게는 칠흑왕이-잠들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밤’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에 지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바.
그러던 중에 협회라는 곳이 지구의 질서를 잡으려고 나름 애를 쓰는 듯 보이자 지원을 해 주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직접적으로 난리를 칠 신과 악마들을 전부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게이트는 감당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연우와 관련된 존재, 혹은 흔적이라도 발견된다면 즉시 알리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이놈들은 올림포스가 날 노린다고 생각하고, 대신해서 레이드를 하려 했다 이거지?’
올림포스로서는 일개 신도와 사도들에게 연우와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줄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만 말한 것일 테지만.
스스로를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십상인 인간들로서는 주제 파악이 늦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연우는 그동안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들이 단번에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찝찝한 점이 있다면.
“그러니까…… 게이트라는 것이 생기고, 이상한 시련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게 전부 칠흑의 잔향이 묻어서 생긴 거다, 이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이곳 지구뿐만 아니라, 여러 행성이나 문명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단 점입니다.”
“음.”
아레스는 연우가 뭔가 탐탁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다시 조바심이 들었지만.
연우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지구가 왜 이렇게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상하게 변해 있나 싶었는데.
‘이렇게 개판이 된 게 전부 나 때문이라, 이거지?’
그런 생각이 드니.
조금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