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수라장 (1)
연우는 만약 샤논이 있었다면 ‘악어의 눈물’이라며 조롱했을 게 분명한 죄책감을 금세 접어 버렸다.
어차피 이런 일에 대해 길게 생각하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칠흑에 젖어 감각이 많이 무뎌져서 그런가.
사실 그가 정말 미안한 대상은 세샤와 아난타가 전부였다.
괜히 칠흑의 파편 때문에 자신을 십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찾아야만 했었으니까.
“그런데.”
연우는 여전히 얼차려를 하기 바쁜 올림포스 신들을 쓱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테나는 왜 여태 보이질 않는 거지?”
다른 대신격들은 보이는 데 반해, 아테나만 부재중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테나는 수석 사도이니만큼, 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와 가장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려야 하는 것도 바로 아테나였다.
하지만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아테나는 전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으니.
아니, 연우 쪽에서도 아테나에 대한 건 감지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분명히 채널링은 살아 있었다. 심지어 또렷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본래 사도의 사념이나 심리 따윈 신이 금세 읽어 들이기 마련인데……. 아니면 사도의 행방에 대해서라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어려웠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신과 사도 간의 채널링이 방해를 받는 중일 가능성이 많지만, 또 그런 것도 아닌 듯했으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그것이…… 으어어!”
“음. 그림자에 들어가고 싶나 보지? 진즉에 말하지 그랬나. 하긴. 매번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만 터지는 바깥보단 어둠 속이 좀 더 낫지?”
「오오오! 그럼 저한테 이제 친구가 생기는 건가용! 제가 참 맘에 들어용!」
“……허, 헙! 아, 아닙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아레스는 아테나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자세를 풀려다 말고, 연우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에 식겁을 하면서 곧장 각지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연우의 그림자가 유난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라플라스가 어떤 변태인지 몇 번씩 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아레스는 자칫 저런 놈의 옆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테나는 뭘 하고 있다고?”
“디, 디스 플루토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디스 플루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 아무래도 ‘밤’과 전쟁을 치르는 데에 자신이 나서야 하지 않겠냐면서…….”
“흠. 그런 거로군.”
연우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제야 아테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챘던 것이다.
아테나는 전신(戰神)이기에 앞서 군신(軍神)으로서의 위상이 더 강하다.
가지고 있는 힘보다, 머릿속에 담고 있는 지략과 지혜가 훨씬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전장에 서는 것만으로도, 병사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막대한 효과를 실어 주니.
아군에게는 절대적인 사기와 승리를 향한 전략을, 적군에게는 위협적인 압박과 패배로 몰아넣는 함정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디스 플루토는 연우의 권속으로서 한창 ‘밤’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아테나가 그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재 ‘낮’에는 정우를 중심으로 한 내 권속들과 아가레스의 르 인페르날, 그리고 미카엘이 중심이 되는 말라흐가 있다고 했었지. 그 외에 올림포스와 니플헤임이 2군을, 그 옆을 천교가 간간이 도와주고 있는 형태고.’
그렇게 복잡한 전장을 진두지휘하려면 웬만한 능력으로는 안 되겠지. 아마 아테나가 가장 중심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낮’의 본영과 저희도 연락이 끊어진 상태라…….”
아레스의 말에 따르면, 현재 ‘낮’의 중심이 되는 이들은 차정우와 함께 적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차정우가 오랫동안 아내와 딸에게 연락을 넣지 못했던 것도 그 탓이었으니.
아테나와의 채널링이 또렷하면서도,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쪽 우주를 넘어서 저쪽인 타계(他界)로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연우가 읽어 들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연우가 칠흑의 힘을 품고 있다 해도 이쪽 우주에 육체를 두고 있는 이상, 전혀 다른 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타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쪽까지 인지 영역을 확대하면 될 일이지.’
하지만 사실 따지자면, 그마저도 연우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인지 영역을 아주 좁은 범위로 축소시키고 있었으니까.
괜히 넓혀 봤자 쓸데없는 정보만 과다하게 들어와 이들을 처리하는 데 정신이 받는 압박이 커질 뿐이니, 평소에는 일부러 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 온전히 작동시켰을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당초.
그는 이미 칠흑을 절반 이상 손에 넣으면서 우주와 차원의 한계 따윈.
그리고 ‘낮’과 ‘밤’처럼 ‘안’과 ‘밖’의 구분 따윈.
진즉에 없어진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연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으, 음……?”
아레스는 한순간 달라진 연우의 분위기에 살짝 놀라면서 주춤거렸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가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 어쩐지 아레스는 연우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강한 위압감을 느끼고 말았다.
분명히 별다른 기세를 뿌리거나, 신력을 유동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아레스의 눈에 연우는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지고 말았다.
아주 멀고, 아득하면서도.
너무 거대하기에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반대로 그렇기에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항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달처럼 고고한.
그런 존재.
지금 이 순간.
올림포스 신들이 만들어 내는 영압도.
이쪽으로 쏠리는 수많은 초월자들의 시선도.
지구라는 칠흑왕이 잠든 장소가 가진 무게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연우라는 존재만이 있을 뿐.
아레스는 알고 있었다.
이런 존재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을.
‘황(皇)!’
천마와 마주쳤을 때. 아득한 태곳적부터 존재했다던 우마왕을 마주쳤을 때. 그리고 초월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지던 무왕을 봤을 때.
그럴 때나 받았던 느낌이, 연우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다른 올림포스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얼차려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멍하니 연우를 바라보기만 했으니.
“무, 뭐지?”
“이, 이, 이건 대체…….!”
“이, 있는데 보이질 않아! 어떻게 된 거야?”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것 같고…… 아아아악!”
헬 하운드의 플레이어들은 오히려 연우가 주는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된 나머지 정신적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들의 하찮은 격으로 연우를 강제로 인지하려고 하니, 당연히 영혼이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연우는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존재하는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한 존재로만 비칠 따름이었다.
[7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연우는 붉고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개는 커지고 커져서 상공을 뒤덮고, 유리된 공간을 넘어 지구를 단번에 뒤덮었다.
이에 지구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갑자기 찾아온 개기 일식(皆旣日蝕)에 놀란 나머지 바깥으로 뛰쳐나와 하늘을 보며 경악했다.
연우의 확장된 인지 영역은 지구를 벗어나, 140억 광년도 훨씬 넘는 우주를,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우주군(宇宙群)을, 여러 차원들을 줄줄이 지나 ‘밤’이 있는 타계에까지 단번에 닿았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수용했다.
연우는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읽어 들일 수 있었다.
칠흑이 깨어나려 하면서 각지에 퍼져 나갔던 파편들과 혼란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지성체와 존재들이 보내는 시선들. 사념들. 행동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탑에서 겨우 빠져나왔기에 이제 막 자유 아닌 자유를 만끽하고 있던 여러 초월자들의 사회도 있었다.
그들이 하늘을 보면서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우는 굳이 그것들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느끼고 경악하거나 놀라는 소리인 것 같긴 했지만…… 애당초 이제 연우에게는 신과 악마들도 인간이나 외뿔부족 같은 피조물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네들끼리는 초월자니 필멸자니 하면서 계급을 두고,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쭐댄다지만.
연우의 시선에서는 초월자들도 그냥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덩치가 조금 큰 개미일 뿐. 저들끼리 누가 더 낫고 낫지 않은지를 겨루는 게 우습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아. 버. 지.
깨. 어. 나. 셨.
연우를 눈치챈 초월자들과 마찬가지로, ‘밤’에서도 연우의 존재를 하나둘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연우에 ‘맞설’ 수 있을 경계의 거주자만이 거대한 ‘눈’을 활짝 열면서 말을 걸어올 뿐이었다.
하. 지. 만.
아. 버. 지. 로. 부. 족.
그. 래. 도.
아. 버. 지. 맞.
꿈. 은. 왜. 저. 물. 지. 않.
경계의 거주자는 연우라는 존재를 대면하고 상당히 갈팡질팡하는 눈치였다.
그를 제대로 된 칠흑왕이라고 인식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왜 아직까지 이번 ‘꿈’이 꺼지지 않는지에 대해 여러 의문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는 모양이었다.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단순히 인간으로만 있을 때에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반드시 처치해야만 하는 적으로만 다가왔었건만.
그래도 꼴에 칠흑왕에 가까워졌다고 이제는 녀석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지는 않았다.
경계의 거주자는 아직까지 그에 대한 적아 판단을 마치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 아주 오랫동안 잠든 칠흑왕을 대신해서 ‘밤’을 이끈 수장이었다.
말이 부왕일 뿐이지, 가진바 권능과 격만 따진다면 이미 황 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연우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곧 찾아가지.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우가 그를 경계할 이유 따윈 없었다. 적아의 기준이 서지 않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니, 굳이 약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연우는 칠흑왕으로서의 자세를 보일 생각이었다.
경계의 거주자는 그 말을 듣고 도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서 수많은 사념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할지 내적 충돌이 많은 모양이었다.
알. 겠.
기. 다. 리. 겠. 습.
경계의 거주자는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지 연우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게 아니니, 보다 확실한 판단은 그 뒤에 내려도 충분할 거란 결론에서였다.
우우우, 우-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경계 거주자의 ‘눈’이 닫혔다.
그리고.
그 아래 후퇴하는 ‘밤’과 그들에 맞서 싸우다 말고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해하는 ‘낮’이 보였다.
그 속에 차정우가 정확하게 이쪽을 보았다.
『형……?』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선을 만나게 되니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피식.
연우는 동생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새로운 용언을 외쳤다.
“돌아오라.”
그 순간.
지구와 전 우주 각지에 흩어졌던 칠흑의 파편들이 귀소를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메인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적용 중이던 임시 운영 체제의 모든 기능을 정지합니다.]
[새로운 운영 체제가 작동합니다.]
……
[비교 기능이 복원되었습니다.]
[연산 기능이 복원되었습니다.]
[판단 기능이 복원되었습니다.]
……
[중앙 정보 처리 장치의 정상화로 인해 정보 수집 및 해석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습니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시스템이 전면 재가동합니다.]
……
[첫 번째 명령을 수행합니다.]
……
[외부로 노출되었던 칠흑의 파편들을 수거합니다.]
[모든 게이트가 닫힙니다.]
[모든 시련이 정지됩니다.]
[모든 플레이어 지원 기능이 전면 중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