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19화 (719/862)

19화. 아수라장 (5)

티와나쿠는 한창 기력이 왕성하던 시절에도 크로노스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런데 자아조차 온전히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격이 떨어진 지금, 칠흑의 파편을 가졌다고 해서 연우와 상대나 될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생전의 실력을 회복한 크로노스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연우로서는 제우스만도 못한 녀석에게 전력을 다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단순히 출력을 끌어 올린 검뢰를 날리는 것만으로도, 티와나쿠는 계속 갈가리 찢겨 나가야만 했다.

재생을 계속 시도한다지만…… 그렇다면 그만큼 연달아 찢어 놓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검뢰 폭풍이라 할 만한 공격 세례 속에서 티와나쿠는 몇 번이나 뜯겨 부서지기를 반복하다가.

살고 싶…….

티와나쿠는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한 채, 한순간 방황하는 눈으로 연우를 애타게 바라봤다.

하지만.

스걱-

연우는 가차 없이 스퀴테를 휘둘러 녀석의 영체를 뿌리까지 베어 버렸다.

[죽음의 개념이 ‘티와나쿠’를 잠식합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령을 시도합니다.]

찰칵, 찰칵-

우걱우걱!

칼날이 스쳐 지나간 자리로 짙은 그림자가 피어나 티와나쿠의 전신을 뒤덮었다.

톱니 이빨이 마지막 남은 신의 육체까지 먹어 치웠을 때,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인스턴스 던전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하라 사막.

쏴아아!

때마침 하늘에서는 엄청난 양의 폭우가 퍼붓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강수량. 하늘이 새카맣게 보일 정도였다.

가뜩이나 비도 잘 내리지 않는 사막 지대였던 곳이 마경이 되면서, 여태 십 년 동안 밀리고 밀렸던 강우가 한꺼번에 쏟아졌던 것이다.

덕분에 검뢰로 인해 한껏 뜨겁게 달아올랐던 대기가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

『마경이란 게 인간들에게는 나쁠진 모르겠다만, 그래도 이것들이 무너지면서 남은 양분도 꽤 커서 말이지. 어쩌면 여기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구나.』

크로노스는 오랫동안 지구 곳곳에서 전생을 거듭해 왔기에, 이곳 사하라 사막에 대한 소중한 추억도 한두 개쯤은 있었다.

그러니 이곳이 아름답게 남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

어쩌면.

단순히 칠흑의 파편을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연우와 다르게, 크로노스는 자신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생각에 가까울지 몰랐다.

『자, 그럼 다음은 어디지? 중동이냐?』

* * *

[올림포스의 대성역, ‘에우루노메’에 입장하였습니다.]

“으으. 그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이 고생을 시키냐.”

아레스는 올림포스 신들과 함께 돌아오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우루노메. 까마득한 세월 동안 탑에 봉인이 되어 있었어도, 수만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그들의 터전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의 왕, 연우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놀라웠기 때문이리라.

어떤 전조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사도랍시고 지구에 놔둔 피조물들이 저지른 사고 때문에 사회가 박살 날 뻔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흐흐흐.』

그때, 아레스 등과 함께 복귀하였던 제우스가 음침하게 웃었다.

모든 신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저마다 얼굴에는 착잡함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 자신들이 왕이라며 모시던 존재가, 저렇게 비루한 꼴로 돌아오니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것이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간절한 부탁에 의해 연우가 올림포스로 딸려 보낸 것이었다. 비록 몸은 망가졌지만, 다른 형제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던 부탁.

『올림포스가 한낱 인간의 개 따위로 전락해 버릴 줄이야.』

제우스는 신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진언 사용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잃고, 격을 잃었어도. 신으로서의 고고한 자세만큼은 잃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아버지.”

아레스는 그런 제우스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들아. 내가 이미 눈을 잃어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빤히 보이는 것 같구나. 너 외에도 다른 나의 자식들도 이 자리에 많겠지.』

그 말에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디오니소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저 헤르메스와 헤라클레스만이 묘한 눈으로 제우스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내 너희들에게 묻고 싶구나. 너희들이 정녕 내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맞는 것이냐? 이런 비루한 꼴로 사는 것이, 정녕 신으로 서의 자세로 맞다고 생각이 드느냐?』

제우스는 마치 눈이 있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테나. 그 아이는 어디에 있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이. 하지만 가장 먼저 인간의 개가 되겠다고 고개를 숙여 버린 아이. 그 못난 아이는 이 아비가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어찌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 것이냐?』

“…….”

“…….”

“…….”

아무도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던 그때.

여태껏 잠잠히 있던 헤르메스가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그래. 헤르메스. 두 번째로 인간의 개가 되어 버린 멍청한 아들아. 어디 너의 말이 듣고 싶구나. 이 아비에게 무슨 변명을 해 줄 테냐? 듣기로 그 인간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도 너였고, 곳간을 열어 준 것도 너였으며, 멍청하고 순진한 신들을 회유한 것도 너였다고 들…….』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뭐?』

“아버지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놈이……!』

비쩍 마른 제우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의 개가 된 게 비루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그저 혈통도 힘도 지닌 존재가 왕권을 쥐었을 뿐입니다. 조부님이신 우라노스께서 여러 사회들을 통합하여 올림포스를 만들었던 이래로, 우리네의 전통은 강자가 왕권을 쥔다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우라노스는 대지모신과도 전쟁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기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올림포스를 세울 수 있었고.

크로노스는 신왕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자질을 지녔기에 여러 형제들과의 내전에서 승리해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또한, 후대에 왕이 된 제우스는 그런 크로노스를 끄집어 내릴 정도였기에 지금과 같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따지자면 이미 한 차례 천마에게 꺾이시고, 저희 모두를 탑에 유폐되게 만든 폐왕(廢王)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다 천마증으로 쓰러지시고, 끝내 비바스바트의 벽도 뛰어넘지 못하셨지요.”

헤르메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칼이 되어 제우스의 속을 난도질하였다.

“반면에 저희의 새로운 왕은 유폐를 풀어 주고 자유를 주었으며, 그 세를 확장하여 이제 초월자들의 사회에서 가장 앞선 곳에 서게 해 주었습니다. 과거 신왕 때처럼 말입니다.”

『……!』

“이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저희가 어디에 설지는 당연한 것 아닙니까?”

『…….』

“저희의 대답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우스가 천마증을 앓으며 깊은 잠에 들었던 당시.

올림포스에서는 제우스 세대와 헤르메스 세대 간에 큰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자칫 그들 간에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를 만큼 큰 갈등.

제우스 세대는 위태로운 질서를 바로잡고자 안정을 부르짖는 데 반해, 헤르메스 세대는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밖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급진적인 경향을 내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신왕 크로노스를 추모하는 분위기를 띠자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르기도 하였다.

제우스 세대에 있어 신왕 크로노스란 반드시 멀리해야만 하는 구적(舊敵)이었으니까.

“사사로이 따지자면 아버지는 제게 친부이시지만…… 아시잖습니까. 결국 이 신의 사회라는 곳은 친부 간에도 권력을 나누지 않는 곳인 것을요.”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왕좌에서 끄집어 내렸듯이.

헤르메스 등이 제우스가 아닌 연우를 왕좌에 앉힌 것도 절대 이상한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역사란 돌고 도는 법이니까.

『……넌!』

제우스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뭐라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순간 치밀어 오른 울혈에 피를 한껏 게워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우와의 싸움으로 입은 피해가 전부 다 낫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울화까지 더해지니 격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세상이 빙글 하고 돌았다.

* * *

제우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정신이 좀 드나?”

그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순간, 입술 끝이 비틀렸다.

『이게…… 누구요. 우리 못난 형님이 아니신가?』

포세이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대놓고 말해 버리면 할 말이 없지 않나.”

『뭐지? 정말 당신, 내가 알고 있는 그 포세이돈이 맞기라도 한 건가?』

제우스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포세이돈은 언제나 포악한 성정을 자랑했으니까. 그리고 스스로가 ‘신’이라는 것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작자였다. 올림포스를 이끄는 데 있어서 매번 자신과 가장 크게 충돌했던 것도 그가 아니던가.

“신이든 사람이든, 힘이 없어지면 둘 중 하나가 되는 법이지. 성격만 앙칼져지거나, 아니면 지난날을 추억하며 쓸쓸히 사라지거나.”

에레보스에서 연우에게 구출된 이후. 포세이돈은 그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면서 윽박을 질렀다지만, 그것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발악일 뿐이었다.

그 뒤로 뒷방으로 밀려난 채, 사실상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져 원로 취급이나 받아야 했으니까.

처음에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많이 한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증오를 품으며 어떻게든 다시 밖으로 나서겠노라고 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독선적이던 성격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급급하게 달려왔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 크르노스와 어머니 레아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게 되었으니…… 어쩌면 부모님이나 자신이나 이 험하게 굴러가는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언젠가 나중에 크로노스를 다시 만난다면, 여태껏 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말들을 허심탄회하게 탁 털어놓고서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다고 해서 오랫동안 응어리 진 원한들이 단번에 풀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포세이돈은 추후에 올림포스의 옛 원로들처럼 천천히 세계의 개념으로 녹아내릴까도 고민 중에 있었다.

『유폐되었다고 들었는데. 맞나 보군. 탑에서 나오고 나서도 짐승처럼 길들여진 거야.』

제우스는 그런 포세이돈의 기색을 읽고 으르렁거렸다.

“그런 표현보다는 우리가 그냥 선택했다고 해 주지 않겠나?”

『다른 누이들도 있나?』

“옆에 있지.”

『후후후후! 그래. 그새 다들 잊었나 보군. 크로노스가 우리네 형제들에게 했던 짓을. 증오를 품어도 모자랄 판국에 병신같이 벌써 잊어서는 이딴……!』

제우스는 분기를 터뜨리다 말고 말을 뚝 그쳤다.

『그래. 그런 것이 당신들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애당초 길들여진 가축이 되어서야 어찌 더 이상 맹수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축이 된 대가는…… 잡아먹히는 것뿐이지.』

포세이돈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글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형님의 마음 아니겠소? 흐흐.』

제우스가 내뱉는 웃음소리에.

포세이돈은 어쩐지 가슴 한편에서 피어나는 불길함을 누르면서 가만히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사하라 사막에 이어서.

중동의 스텝 지역과 남태평양을 차례로 건너면서, 연우는 마경의 주인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그들은 티와나쿠처럼 대개 과거에 위대한 격을 지녔었으나, 지금은 볼품없는 상태로 전락해 버리며 칠흑의 파편을 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신명을 외쳐 대면서, 자신이 새로운 칠흑의 주인이 되겠다느니 하는 해괴한 소리를 지껄여 대곤 했다. 칠흑에 잔뜩 도취되어 더 큰 힘을 바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연우는 그들을 가볍게 베어 버리고, 마경을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세 개의 마경을 전전하면서 느낀 점은.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마경의 탄생이 절대 단순히 옛 존재들의 욕심에서 비롯 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경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인위적으로 마경을 조성해 지구의 환경에 막강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신앙을 끌어모으고자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칠흑의 파편을 단순히 탐내는 정도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지구의 생력(生力)에까지 손길을 뻗쳤다는 점이었다.

‘지구는 천마에 의해 칠흑왕이 강제로 잠든 장소다. 피조물들은 절대 감지할 수 없을 이면에 탑이 세워지기도 했었고……. 그런 지구의 생력에 손을 댔다는 건, 절대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야.’

마경은 위장일 뿐, 실은 그 주인들의 힘을 채워 주기 위한 공장 시설이었던 셈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건 그냥 세워질 수가 없다. 한두 개쯤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마경의 위치나 생력이 빨린 정도로 봐서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분명했다.

‘가축장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들어.’

배후에 있을 놈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연우는 마경에 자리 잡은 놈들부터 먼저 족칠 생각이었다.

다만, 궁금점은 있었다.

과연 마경의 주인들은 이러한 배후의 마수를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이용만 당한 걸까?

만약 이용당한 것이라면.

‘비마질다라는 왜 마경의 주인이 된 거지?’

그 생각이 끝난 것과 동시에.

[비마질다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드디어 왔구나. 그대가 눈을 뜨기만을. 그대가 이곳에 오기만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아는가? 어서 오시게, 친구여.]

화아아악!

공허를 건너려는 연우의 머리 위로, 드넓은 상공을 가로지르면서 거대한 빛줄기가 통째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마질다라가 날렸을 게 분명한 검격(劍擊).

『미친! 지구를 부수기라도 할 셈인가!』

연우로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기에 한순간 피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크로노스의 말대로 지구가 반 동강 날 것 같아 스퀴테를 거칠게 앞으로 뿌렸다.

콰아아앙!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면서.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남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일이 사방팔방으로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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