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21화 (721/862)

21화. 아수라장 (7)

「그럼 잘 먹겠습니당!」

그림자, 라플라스가 아가리를 확 젖히면서 소녀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어라?」

라플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바로 뒤쪽.

어느새 비마질다라가 나타나 이쪽으로 세주품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은 구비타라의 최종기가 단단히 응집되어 있는 만큼, 폭사된다면 제아무리 그림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라플라스라는 자아 자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라플라스는 비마질다라의 그런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우와 맞부딪치기 직전에 갑자기 위치를 바꿔 버리다니. 자신이야 여기서 소멸한다고 해도 어차피 흥미를 위해 있던 것이니 별 미련이 없다지만, 비마질다라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곧장 연우가 그의 빈 뒤통수를 가격해 버린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하지만 비마질다라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연우를 상대할 때는 흥미진진함으로 가득하던 두 눈에, 지금은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걱정.

우려.

분노.

이 소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최고 관리자 출신이었기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 삭막하기 짝이 없던 비마질다라가 한낱 소녀를 걱정한다구용?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용!’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화아아악!

세주품이 라플라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번에 그를 찢어 버릴 듯이 흉포한 위력.

그리고 그 순간, 연우도 스퀴테를 거칠게 휘둘렀다. 그가 따로 재해석해서 만든 검은 구비타라가 잔뜩 피어나면서 검뢰의 형태로 번쩍였다.

검뢰는 굴절된 공간을 따라 비마질다라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라플라스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멍청하게 등을 내어 준 비마질다라의 죽음도 같이 직감했다.

그래도 최소한 가는 길에 혼자는 아니군용. 그렇게 입가로 웃음이 삐져나오려는데.

쐐애액!

순간, 검뢰가 다시 한번 더 굴절되었다. 공간이 크게 꺾이면서 비마질다라 쪽이 아닌, 라플라스의 등 뒤로 검은빛이 번쩍이면서 비마질다라의 검격을 튕겨 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라플라스가 거칠게 튕겨 나고, 비마질다라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동시에 높게 일어선 빛의 기둥이 지면을 뚫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로 맨틀과 외핵을 뚫고 지구의 반대편으로 삐져나왔다.

쿠쿠쿠-

지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크게 떨렸다. 이미 뻗쳐 나간 먼지구름이며 충격파는 대기마저 우주 밖으로 떠밀어 내면서 지구를 더 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불모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갈라진 지면 사이로 솟구친 화산은 용암을 쉴 새 없이 토해 내면서 유독 가스로 새롭게 대기를 가득 채웠다.

「주인님! 지금 저를 구해 주신 건가용?」

라플라스는 바닥을 한참이나 뒹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역시 충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영체의 7할 이상이 강제로 뜯겨 나간 상태였지만, 자아는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기에 감격에 찬 얼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연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비마질다라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여간 겉보기에는 차가워 보이셔도, 속은 따뜻한 남자라니깡.」

라플라스는 그렇게 웃으며 그림자 속으로 숨으면서도 눈동자를 빠르게 데구루루 굴렸다. 그는 방금 전의 상황으로 연우가 잔뜩 화가 났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 비마질다라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 했지만, 그는 기어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덕분에 지구는 멸망한 상태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으니.

유일하게 온전한 곳을 꼽으라 한다면 소녀가 있는 결계 구역밖에 없었다. 세샤 등은 다행히 진즉에 방주로 몸을 숨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른 존재들은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심지어 지구의 공전축은 완전히 뒤집혀서 태양을 어지럽게 도는 신세가 되어 버린 상태.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도 모조리 축이 어지럽히면서 이미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로서는 여태껏 고생하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셈이니 잔뜩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구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며, 동생이 부활한다면 가족들과 함께 다시 머물 터전이기도 했지만.

그가 끝까지 이곳을 보호하려 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

그 순간, 바닷물이 전부 증발하기 전에는 태평양이었던 공간에서부터 검은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꼬박꼬박 쏟아지고 있는 맨틀이나 용암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암흑물질처럼 어둡고, 그림자처럼 형체가 없으며, 공허처럼 진득한 점성을 가진 물체였다.

그것들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하나둘씩 피어오르더니, 서로 엮이면서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가다가 어느 순간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전체로 확 하고 번졌다.

동시에 그것은 점차 형체를 갖춰 나갔으니.

[타계와의 연결이 긴밀해졌습니다.]

[지구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립니다.]

[지구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스스로를 자각합니다.]

[지구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종말’을 그립니다.]

……

[‘약속된 땅’이 떠오를 준비를 합니다!]

그것은 언젠가 연우가 탑이 무너지기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거대하고 아득하기에 좀처럼 제대로 된 형체조차 인지할 수 없었던 것.

칠흑왕이었다.

[칠흑왕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자아가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영혼이 없는 상태입니다]

……

[칠흑왕이 자신의 결여(缺如)된 부분을 찾습니다.]

……

[칠흑왕이 자신의 의식을 응시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자아를 주시합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영혼을 묵시합니다.]

……

[‘종말’이 중단됩니다.]

[‘약속된 땅’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것은 영혼과 자아가 전혀 없어 움직이지 않는 ‘육체’라는 점이랄까.

‘결국.’

그래도 연우로서는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 인상을 팍하고 찡그려야만 했다.

칠흑왕은 원래 천마와 ‘낮’에 의해 공허의 밑바닥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던 상태. 그리고 그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신과 악마들을 끌어들여 가두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각 우주에서 초월의 자질을 타고난 영웅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가 바로 지구, 정확하게는 지구의 이면(裏面)이었다.

지구에 온갖 신과 악마들의 신화가 넘쳐흘렀던 것도, 전부 이곳이 칠흑왕의 봉인지이자 신과 악 마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탑이 없어진 지금. 칠흑왕의 비상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연우가 자아의 일부가 되면서 ‘꿈’을 유예하는 형태로 칠흑왕을 강제로 재우고 있는 중이라지만, 완전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자아와는 별개로 지구에는 칠흑왕의 육체 즉, 르’뤼에가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이 역시 ‘알’을 형성하다 말고 탑의 붕괴와 함께 다시 지구 아래로 잠들고 말았으니. 언제 튀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연우도 칠흑왕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르’뤼에는 별개의 부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마경의 주인들이 지구에 빨대를 꽂으면서 캐내려 했던 것이 바로이 르’뤼에였다.

마치 S극과 N극이 서로를 찾듯이, 영혼이 결여된 르’뤼에는 어떻게든 영혼을 찾고자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칠흑의 파편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마경의 주인들은 이런 칠흑의 파편을 이용해서 르’뤼에에 접촉하여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려는 것이니.

연우가 눈을 뜨자마자 파편이 우주 곳곳에 흩어진 것을 감지하고 곧장 회수를 시도했던 것도, 마경을 차례로 지워 나가고자 했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도 르’뤼에에 접근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지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던 것도 괜히 르’뤼에를 자극하지 않으려던 것인데…….

비마질다라가 이런 식으로 나서면서 강제로 르’뤼에를 깨워 버린 셈이니.

[신의 사회, ‘천교’가 긴급 경계 상태에 돌입합니다. 지구를 경계합니다.]

[신의 사회, ‘멤피스’가 최고 경계 태세를 갖춥니다. 지구를 경계합니다.]

……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수장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 출병할 자세를 갖춥니다. 지구를 경계합니다.]

……

[모든 신들이 ‘탑’이 무너지던 순간을 떠올리며 등골을 바짝 세웁니다.]

[모든 악마들이 칠흑왕의 반응이 어떻게 이어질지 몰라 잔뜩 경계합니다.]

[몇몇 존재들이 결여된 칠흑왕을 보면서 탐심을 드러냅니다.]

[몇몇 존재들이 아직 회수되지 않은 칠흑의 파편에 눈독을 들입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방금 전에 탐심을 드러낸 존재들과 눈독을 들인 존재들을 관망합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그들에게 쓸데없는 욕심을 부린다면, 그 사회 자체를 불살라 버리겠다면서 짧게 경고합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명단을 확인합니다.]

[탐심을 드러냈던 몇몇 존재들이 자라목이 됩니다.]

[칠흑의 파편에 눈독을 들였던 몇몇 존재들이 자라목이 되어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칩니다.]

연우는 신과 악마들의 쓸데없는 생각이 커지기 전에 그들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고, 짧게 경고했다.

이것으로 일단 큰 분란은 막을 수 있겠지만, 완전히 저들의 탐심을 전부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칠흑왕이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바라봅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칠흑왕의 시선을 무시합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비마질다라를 노려봅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연우는 비마질다라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대체 그가 뭘 원하는 건지,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싸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장소를 옮겨서 싸웠으면 됐을 일이고, 르’뤼에 관심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지구를 뒤집었으면 됐을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과하게 판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르’뤼에까지 드러내서야 다른 놈들이 개입할 소지만 있으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텐데.

이건 마치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 주려는 듯한…….

‘보여 주려고 한다고?’

연우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깼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저 제대로 싸우고 싶을 뿐이라고 말이야.”

비마질다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눈에 맺힌 호승심은 진짜였다.

그렇기에 연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싸우는 것도 싸우는 것이지만, 비마질다라는 무언가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고 있었다.

경고.

이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으니, 반드시 조심하라는 경고.

‘대체 누가 있어서?’

비마질다라가 이런 식으로 퍼포먼스를 하면서까지 삥 에둘러서 경고해야 할 대상이 있는 걸까? 애당초 그는 이런 걸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을,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연우가 진즉에 그와 부딪치기 전에 존재를 의심했던 ‘배후’가 분명했다. 혹시 그것이 이블케나 그와 관련된 무언가일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콰르르릉-

비마질다라는 다시 웃으면서 이쪽으로 몸을 날렸고.

연우는 전력을 다해 그와의 싸움에 집중해야만 했다.

비마질다라는 이미 자신의 메시지가 연우에게 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다시 전투에 몰두했으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렇기에 연우는 스퀴테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싸움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비마질다라도 딱히 그것을 원하지 않을뿐더러, 이곳을 관전하고 있을 ‘배후’에게도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쪽에서도 ‘배후’를 향한 경고가 필요했다.

곧 찾아가겠다는, 그런 경고.

‘아버지.’

『알았다. 저 친구와는 더 길게 겨뤄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것은 저 친구에 대한 예의가 되지 못하겠지.』

크로노스와 마음으로 의사가 전달된 순간.

합일(合一)!

연우는 칠흑왕에게 묶여 있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인격’이 더 또렷해지고, 독립성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퀴테에 맺힌 검고 붉은 검뢰가 몇 층 더 짙어졌다.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검뢰 출력이었으니.

[검뢰팔극 - 팔극(八極)]

[올포원 - 대수인]

순식간에 3번의 검격이 오고 갔다.

쾅!

첫 번째 충돌에 거대한 빛줄기가 다시 한번 더 우주의 공간을 관통하고.

채앵-

두 번째 충돌에서 스퀴테가 비마질다라를 둘러싼 수많은 결들 사이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세주 품을 가르고 지나갔으며.

퍼어억!

세 번째 충돌에서 스퀴테가 비마질다라의 왼팔을 사선으로 가르면서 우측 가슴팍에 깊숙하게 박혔다.

[죽음의 태엽이 맹렬하게 회전합니다!]

[‘죽음’의 개념이 비마질다라를 잠식합니다.]

“아저씨!”

어디선가 뒤쪽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마질다라는 죽음이 영체를 잠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웃는 낯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스퀴테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건…… 뭔가. 단순히 검뢰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던데. 전혀 새로운 기술이었어.”

“대수인입니다.”

“아니. 그것 말고. 비바스바트의 것은 내게 닿을 수 없어.”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꿈’에서 깨우친 것이로군. 하면 가장 먼저 내가 견식한 것 같으니, 내게 그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영광을 주겠나?”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붉은 구비타라’. 어떤가?”

“그러겠습니다.”

연우가 깨우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 비마질다라의 투쟁심에서 자극을 받고 영감을 얻은 것이니……. 그의 권능에서 이름을 따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후후. 이로써 이 몸은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되었군. 그대가 있는 한, 그 이름도 계속 이어질 테니까.”

신과 악마는 ‘이름’이 없어진 순간 죽는다. 반대로 ‘이름’이 길이 길이 전해지는 한, 신앙도 계속 이어진다.

“그것이라면…… ‘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

그런 흐릿한 말과 함께.

퍼석!

파스스-

비마질다라는 가루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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