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22화 (722/862)

22화. 아수라장(8)

[비마질다라가 부서집니다.]

[부서진 신화들이 차례로 영상을 비칩니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비마질다라의 영육 사이사이로.

그가 그동안 이루었던 신화들이 파편이 되어 하나둘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가장 밑바닥인 지옥계(地獄界), 그곳을 구성하는 108지옥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에 위치한 곳의 두억시니로 태어나 아수라왕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싸움과 전쟁으로만 점철된 신화들부터 시작해서, 탑에 갇히고 이곳 지구에 다다른 순간까지의 모든 기록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 이것 역시 그런 기록 중 하나였다.

[비마질다라의 의지에 따라, 칠흑왕의 자아에게 신화의 일부를 재생합니다.]

* * *

탑이 무너진 이후, 비마질다라는 곧장 지구로 넘어왔다.

탑에 갇히기 전에 각자가 머물던 터전으로 하루라도 빨리 되돌아가고자 했던 다른 신이나 악마들과 다르게.

그는 언젠가 이곳에서 연우가 눈을 뜨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여러 사회들이 르’뤼에에 대한 관심이 크고, 칠흑왕의 파편을 어떻게든 습득하고자 관심을 기울이며 지구로 하나둘씩 진출을 하고 있었다지만.

당시에는 칠흑왕이나 ‘밤’의 무리들이 침공을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곳이 지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 은하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비마질다라는 자신을 칠 수 있다면 쳐 보라는 듯 무방비 상태로 있기도 했으니.

애당초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전장이며, 앉아 있는 곳이 터 전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지우지 않고 있었다.

지구에 있을 때는 별반 신격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인간들에게 모습을 비치지도 않았다.

그저 인적이 드문 산이나 숲 어딘가로 들어가 자기 수양(自己修養)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뿐. 추후에 ‘안데스산맥’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바로 그의 은거지였다.

그러던 중에 비마질다라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상하게 당시에는 그 얼굴이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뒤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림자가 잔뜩 져서 생김새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그나마 당시에 받은 인상이 있다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 외에는 입고 있던 복장도, 신력의 특징도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당신이 비마질다라요?”

“……그런데?”

“당신과 한번 붙어 보고 싶소.”

“귀찮으니 사라져라.”

비마질다라는 손사래를 쳤다.

애당초 그가 격을 달성한 이후로 칼을 섞은 이들은 하나같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연우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당시도 마찬가지.

그가 은거를 택했던 이유부터가 쓸데없는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 연우가 나타나도 바로 싸울 수 있도록 컨디션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으니.

필요하다면 수백 수천 년간을 그렇게 한자리에 머물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보지도 못한 존재가 나타나 싸움을 걸어 대니 당연히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만약 실력이 제법 좋은 작자라면 칼 솜씨를 날카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괜히 날을 무디게만 만들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니 차라리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자는 게 그의 주의였지만.

“음! 이래서는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데.”

우리?

마치 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있다는 듯한 말투.

“당신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소. 천마도 지금에 이르기 전에는 당신을 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었고, 우마왕도 당신 앞에서는 그리 크게 힘자랑을 하지 않는다지? 하여 ‘우리’는 당신이라면 우리와 뜻을 함께할 만한 동지라 생각하고 있소.”

“분명히 말했다. 일 없으니 꺼지라고.”

“그러지 말고 ‘우리’와 이야기라도 해 보지 않겠소? 그러기 싫다 하여도 한 번쯤 칼을 부딪쳐 본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그 말.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강제로 말을 듣게 하겠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아, 혹시 그렇게 들리셨소? 참. 그럴 생각은 없는데. ‘우리’ 중에 막무가내인 작자가 있긴 하오만, 그래도 되도록 설득을 할 생각이라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있다. 뭔지 아나?”

“오! 드디어 대화를 할 생각이 생겼나 보구려. 무엇이오?”

“말 많은 놈.”

“……음?”

“그리고 그런 놈들은.”

그 순간, 비마질다라는 움직였다.

“전부 죽었지.”

차아앙!

비마질다라는 눈앞에 있는 놈을 치워 버릴 생각으로 세주품을 거칠게 휘둘렀다.

나름 전력을 다한 것이기에 웬만한 신격 따윈 그대로 영체가 찢겨 나갔을 테지만, 놈은 그래도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 냈다.

“입만 산 건 아닌 모양이로군.”

“이런. 굳이 이렇게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만…… 그래도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잘되었구려.”

상대는 난감하다는 듯이 쓰게 웃으면서도, 흥미진진해진다며 한쪽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렸다.

그 순간, 비마질다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걸었지만, 성향은 비슷할지 모른다고.

수도 없이 많은 전장을 전전한 이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투기(鬪氣)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존재의 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마질다라가 은거하고 있던 안데스산맥 일대가 마경이 되어 버 린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주변에 남은 것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 버렸으니까.

* * *

“……하, 하하! 내가…… 이렇게 쉽게 패배해 버릴 줄이야.”

쏴아아!

비마질다라는 폭우를 한껏 맞으면서 허탈하게 웃어 젖혔다.

몇 년 동안 머물던 터전이 쑥대밭이 되고, 도시 몇 개가 부서져 수많은 이들이 명을 달리했지만. 그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패배.

그것도 완패였다.

몇 합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한데도 그는 세주품을 꺾어야만 했으니. 세주품의 검면에 네 번째 상흔이 남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만한 존재들이 부딪쳤으니 이런 행성 하나쯤은 쉽게 부서졌어야 할 테지만.

상대는 대륙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정도로, 비마질다라의 공격을 대부분 상쇄시키며 찍어 눌렀다.

그가 살면서 이렇게 압도적인 실력 차로 졌던 게 언제였더라?

인드라에게 패배했을 때에도, ‘데바’의 여러 존재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던 것이지 실력으로 진 적은 없었다.

천마에게 패배했을 때는 일대일 생사결에서 밀렸다지만, 그래도 지금 다시 겨룬다면 절대 실력 면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자는 달랐다.

-확실히 당신은 강하오. 아직 ‘우리’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이 못 된다 이 말이오. 부족한 부분이야 얼마든지 도로 채우면 되는 것이니. 어찌하겠소? 본인은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우리’와 일을 함께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비마질다라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만한 강자가 세상에 남아 있었단 사실이 그에겐 충격적이었기에 혹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반대로 그런 곳에 묶여 있어서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곳이 있을수록, 다음에는 자신의 손으로 꺾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했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려.

놈은 쓴웃음을 짓더니 쓰러진 비마질다라에게 다시 검격을 날렸다.

영체에 짙게 남은 상처.

그것은 앞서 싸울 때 입었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상처였다.

-그것은 일종의 긴고아(緊施兒)요. 두고두고 그대를 괴롭힐 테지. ‘우리’는 당신으로 하여금 이 지구에서 ‘꿈’을 찾게 할 것이고, 그 ‘꿈’을 언젠가 가져갈 것이오. 그 전까진 ‘꿈’의 주인으로부터 ‘꿈’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게 할 생각이기도 하고.

이를테면, 녀석들은 비마질다라를 집 지키는 개로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무엇을 노리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제천대성 손오공이 긴고아에 묶여 삼장법사의 제자로 있었던 것처럼, 비마질다라도 그런 식으로 지구에다 억류시켜 무언가를 하려는 속셈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것을 가만히 당할 비마질다라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워낙에 싸움으로 입은 상처가 중한 데다가, 영체에 남은 긴고아가 그를 너무 강하게 속박했다.

-천하의 제천대성도 끝끝내 긴고아를 스스로 풀지 못했었소. 아마 그것을 완전히 풀려면, 상당한 수고가 필요할 거요.

그것은 저주의 낙인이었다.

* * *

그 뒤로.

비마질다라는 숱하게 귀찮은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수도 없이 많은 덤벼드는 인간들을 처치해야만 했다. 고향을 잃은 복수라던가? 협회니 정부니 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신경 쓰지도 않았다.

비마질다라로서는 가뜩이나 회복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귀찮은 파리들이 모여드니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평상시와 상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신과 악마들의 도전을 뿌리치는 것도 상당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넌…… 뭐냐?”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녀.

마르기는 또 얼마나 말랐는지 뼈가 앙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인간들을 죽여서 그런가, 더 이상 그의 곁에는 아무것도 꼬이지 않아 한숨을 돌리던 차였는데, 이번엔 웬 이상한 소녀가 왔으니.

비마질다라는 인간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래도 보통 저 정도 나이쯤 되면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모의 돌봄을 받은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소녀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아니, 애당초 이런 곳에 홀로 버려졌다는 것부터가 그다지 좋은 처지는 아니란 뜻이겠지.

비마질다라는 소녀에 대한 관심을 일절 끊어 버렸다.

아니, 끊으려 했다.

그녀가 말만 걸지 않았더라면.

“아저씨!”

“……?”

“아저씨는 배 안 고파요?”

“……무슨 소리지?”

“전 배고파요! 밥 주세요!”

맡겨 둔 물건이라도 찾아가는 듯한 뻔뻔한 태도에 기가 찰 지경이었지만.

비마질다라는 그냥 죽은 인간들이 유실했던 비상식량인지 뭔지를 던져 주었다.

당시에 왜 그랬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심심해서일 수도 있었고, 시시각각 영혼을 좀먹어 가는 긴고아가 짜증 나서 조금은 마음을 달랠 필요가 있어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않는 ‘아수라장’에서 비마질다라와 한 소녀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저 수다 떠는 것이 전부인 시간들이었지만.

평화롭다면 평화롭고, 지루하다면 지루하다고 할 수 있을 시간 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비마질다라는 어쩐지 그 시간들이 마음만은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평생 싸움에 미쳐 살았던 그에게 안식이라는 것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긴고아에 묶여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임무를 강제로 떠안게 되었을 때, 마음이 조급증과 울화로 가득했을 때, 그것을 달래 준 건 바로 소녀, 사리나였다.

[재생이 모두 끝났습니다.]

“…….”

연우는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 아저씨이! 제발 눈 좀 떠요! 우리 친구잖아요! 친구를 두고 가는 게 어디 있어! 가지 말라고! 엉엉엉.”

사리나는 결계를 쾅쾅 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비마질다라와 보냈던 시간이 행복했었다는 것. 비마질다라도, 사리나도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했었으니까.

연우는 어쩐지 스승 무왕을 떠나보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 오르는 것 같아 가슴이 한편이 미어졌다.

그리고.

‘친구……였었나.’

사리나에게 비마질다라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친구였던 것처럼, 비마질다라에게도 자신이 그런 소중한 친구였었단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로서는 그저 플레이어로 있을 시절에 묵묵히 뒤에서 응원을 해 주고, 신격을 달성하고 났을 때는 칼을 부딪치고 싶어 하는 호승심 강하고, 조금 귀찮은 노인네라고만 여기고 있었지만.

비마질다라에게 있어 자신이란 존재는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비마질다라는 연우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엿보았는지도 몰랐다.

여하튼.

비마질다라는 그토록 바라던 연우와의 승부를 끝낼 수 있어서 흡족해했다.

비록 지난번에 입은 상처가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컨디션을 회복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패배로 귀착되었을 때, 그는 친구인 연우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긴고아로 인해 함부로 사실을 누설할 수 없는 상태. 그렇기에 일부러 심상 결계가 아닌 지구에서 승부를 내고자 했다. 지구가 날아간다면 저들이 마경에 숨겨 두고자 했던 것들이 훤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신화를 강제로 연우에게 보여 줄 수도 있을 테고.

덕분에.

연우는 비마질다라의 사연을 모두 알게 되었고, 마경의 배후에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르’뤼에를 차지하는 것이 저들의 목표였으니. 더불어 연우는 비마질다라가 강제로 ‘잊었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그 얼굴이 무엇인지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나도 모르겠다. 왜 저 양반이 거기에 있는 거지……?』

크로노스 역시 합일을 통해 시각을 공유했기에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꿈’을 가져가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목표라오.

그림자가 걷힌 얼굴.

그것은 연우도 크로노스의 신화 속에서 익히 보았던 얼굴이었으니.

‘오케아노스가 왜……?’

오케아노스. 크로노스의 맏형이자, 우라노스의 장남이었던 자.

그가 바로 비마질다라를 꺾은 존재.

즉, 마경의 배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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