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23화 (723/862)

23화. 아수라장 (9)

[케르눈노스가 죽은 비마질다라의 신화를 안타까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케르눈노스가 한때 자신의 호적수이자 벗이었을지도 모르는 존재의 운명에 한숨을 내쉽니다.]

비마질다라의 죽음에 경악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대부분의 신, 악마들과 다르게.

케르눈노스는 비마질다라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케르눈노스는 비마질다라와 마찬가지로,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연우를 지켜봤던 존재였다.

비록 연우에게 강한 호승심을 느끼며 그가 강해지기를 바랐었던 비마질다라와 다르게, 그는 어디까지나 안타까운 사도의 운명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지만.

두 존재는 의외로 서로 간에 공감할 만한 공통된 부분이 많았다.

그 역시 이렇다 할 소속 사회 없이 외롭게 고독을 곱씹던 존재였으니.

비마질다라가 생전에 갖고 있던 고민과 따분함, 여러 복잡한 생각 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케르눈노스가 분노합니다.]

케르눈노스는 처음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로서는 ‘위대한’ 존재가 고작 이런 결말을 맞이한 것에 화가 단단히 난 것일 테지.

그가 생각하는 위대한 죽음은 최소한 이런 쓸쓸한 개죽음은 아니었으니까.

[케르눈노스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납니다!]

[케르눈노스가 이번 일과 관련된 존재들을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여러 신들이 케르눈노스를 우려에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여러 악마들이 칠흑왕의 자아에 이어 새로운 주신격의 활동에 침음을 흘립니다.]

* * *

오케아노스가 왜 갑자기 이런 곳에서 나타난 걸까?

연우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타르타로스 때에도 오케아노스는 실종 상태였었지.’

오케아노스는 크로노스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우라노스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존재였다.

당대 올림포스 내에서 두루두루 인망이 넓고, 가진 배경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품도 뛰어났으며, 실력도 대신격으로 분류될 만큼 뛰어났다.

무엇보다.

‘맏이’라는 이점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장자 승계의 법칙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가장 강한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림포스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 오케아노스는 주도권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일찌감치 오케아노스의 계승을 예상했었던 테이아가 다른 형제들과 먼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략상 우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케아노스의 전력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막내인 레아가 따로 테이아를 견제하면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뒤로 레아가 크로노스를 끌어들이면서 승세는 완전히 그들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오케아노스는 이때 자신은 절대 지도자감이 되지 못한다며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크로노스와 레아를 지지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뒤로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잊히다시피 했었는데…….

‘그러다 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올림포스 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아주 잠깐 얼굴을 비쳤던 것 말고는 외부 활동이 아예 없었지. 그리고…….’

연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사라졌었고.’

올림포스가 통째로 탑에 유폐되었으니, 오케아노스도 분명 그럴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오케아노스를 보았다는 목격담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그가 아예 ‘개념’이나 ‘법칙’으로 귀소했다는 말을 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실제로 그렇게 믿는 올림포스 신들도 적잖게 있었다.

평상시 외부 활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권력에도 초탈한 모습을 보이던 유순한 그라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선택지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그가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단 뜻이 된다.

『……이상하구나.』

그때, 크로노스가 나지막하게 흘린 말에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저 양반, 어디서 다른 꿍꿍이를 꾸밀 만한 성격이 못 되거든. 착해 빠지긴 더럽게 착해 빠져서 테이아와 전쟁 치를 때도 큰소리 한번 못 치던 양반이었는데. 흠……!』

“오케아노스와 친하셨습니까?”

『친하다면 친하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우리네 형제들이 다들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크로노스는 쓰게 웃었다.

우라노스는 통합을 위해 여러 세력의 후계자들을 양자로 들였다지만.

그들 사이에는 기묘한 신경전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한창 철없이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닐 때, 유일하게 내 편에 서 주던 양반이다.』

연우는 크로노스의 신화를 체험하면서 보았던 오케아노스를 떠올렸다.

확실히 크로노스를 챙겨 주던 이는 그밖에 없긴 했다.

또한, 그것이 가식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었다.

크로노스도 그것을 잘 아니 저렇게 말하는 것일 테지.

『비마질다라를 강제로 지구에다 묶어 놓을 때에 보였던 미안함도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사이에 어떻게 그만큼 강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세월이니 여러 방법이 있었겠지. 그보다. ‘우리’라고 말했던 걸 보면, 혼자가 아닌 건 분명한데.』

“일단은 그들부터 쫓아야겠군요.”

『우리 아들, 아주 바쁘구나? 그 수상쩍은 고블린에 바이 더 테이블도 가야 하고, 동생도 챙겨야 하고…… 흐흐!』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정리하기 위해 칠흑에서 겨우 나온 것이었는데.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일단은 저것부터 다시 처리하도록 하죠.”

연우는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르’뤼에를 바라봤다.

[칠흑왕의 자아가 본체를 올려다봅니다.]

[칠흑왕이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내려다봅니다.]

우선 저 본체가 날뛰지 않게 속박부터 해야겠지.

그리고 오케아노스 쪽 놈들이 르’뤼에에 간섭하지 못하게 단단히 방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은 그럴 겨를이 전혀 없어서 못 했지만.

지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단단히 봉인을 해 둬야만 할 것 같았다.

“채우라.”

첫 번째 용언을 내뱉은 순간.

촤르르륵!

갑자기 칠흑왕 주변으로 거대한 검은 멍울 수십 개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쇠사슬이 튀어나오면서 르’뤼에를 구속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쇠사슬은 이전에 연우가 다루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와 굵기를 자랑했으니.

『……저걸 밖에서 직접 보게 되니 너무 섬뜩한데.』

크로노스는 그것을 보면서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쇠사슬의 정체를 알아본 신들이 기함을 토합니다!]

[쇠사슬의 성질을 눈치챈 악마들이 칠흑왕의 자아에게 미쳤느냐며 강하게 따집니다!]

……

[신의 사회, ‘데바’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칠흑왕의 자아가 벌인 기행에 침음을 흘립니다.]

……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당혹해하면서도 동맹군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강한 무기가 생겼단 사실에 흥미로워합니다.]

……

신과 악마들은 각자 저마다 다른 반응들을 보이기 바빴다. 비마질다라가 죽거나, 르’뤼에가 나타났을 때보다도 더 격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쇠사슬은 연우가 ‘꿈’ 속에서 여유가 생길 때면 틈틈이 탑의 잔해를 이용해 만든 신물이었으니까!

[천하정절신진철 여의금고봉]

종류: 책정 불가

등급: 측정 불가

설명: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신과 악마들을 봉인하며 우뚝 서 있던 탑-여의봉이 무너진 이후.

칠흑왕의 자아들은 그동안 그들을 가둔 형틀이나 마찬가지였던 탑-여의봉에 강한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그중 한 명이 내놓은 제안에 따라 잔해를 수습하고 자신들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원주인이었던 천마에게 똑같이 앙갚음하기 위해서.

그리고 탑-여의봉의 잔해는 칠흑왕의 축복과 권능이 듬뿍 담겨 새로운 형태로 제련되었다.

* 측정 불가

* 측정 불가

**자세한 정보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저걸 네가 처음에 수습해서 사용하자고 했을 때는 정말이지 내 아들이지만, 정말 맛이라도 간 줄 알았었지.』

연우는 칠흑왕의 여러 인격들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밖으로 나갔을 때를 대비해 여러 준비 작업을 해 두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탑의 잔해를 재활용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칠흑왕의 인격들은 그것을 두고 크게 반발했다. 그동안 그들의 ‘꿈’을 번번이 실패로 만들고, 강제로 공허 속에 처박히게 만든 저주스러운 흉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의 그런 의견에 유일하게 찬성한 이가 현인이었다.

천마의 신물이었던 것을 이용해 천마에게 그들이 받은 만큼 되돌려 주면 어떻겠냐며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당연히 호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탑의 잔해는 오롯이 칠흑왕의 것이 되었다.

어차피 시스템이 연우에게로 귀속된 이상, 잔해의 소유주도 그였으니 새로운 형태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타나고 말았으니!

[공허가 열렸습니다!]

[신진철이 목표로 설정된 대상을 구속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칠흑왕이 저항을 시도합니다!]

꾸우우웅!

르’뤼에는 신진철을 발견하자마자 거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비록 영혼이 없다고 하나, 본능은 남아 있어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쇠사슬로 르’뤼에의 사지를 강하게 결박시키고, 몸뚱이를 수십 겹으로 둘러쳤다. 도르래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몇 번씩이나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쇠사슬의 끄트머리가 한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위치는 원래 르’뤼에가 있던 곳.

지구였다.

“잠들라.”

그리고 이어서 내뱉은 용언에 따라, 쇠사슬이 더 팽팽해지면서 르’뤼에를 강제로 지구 쪽으로 잡아당겼다.

너무 커진 나머지 벌써 은하계도 뒤덮을 만큼 비대한 덩치를 지구에다 욱여넣는 건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어떻게든 르’뤼에를 압축시켰다.

저항이 너무 심해 쇠사슬이 위태로워진다 싶으면 그 위를 새로운 쇠사슬이 다시 몇 겹이나 덮어 강제로 눌렀다.

그 과정에서 공간이 일부 붕괴되면서 블랙홀이 생기는 등, 크고 작은 피해가 있기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압축은 더 빠르게 진행되면서 르’뤼에는 끝끝내 처음 형태로 되돌아가 지구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고.

“되감으라.”

연우는 언제 다시 튀어 오를지 모르는 르’뤼에를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서 굴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시간의 태엽이 맹렬하게 돌아갑니다!]

[칠흑이 부여되었습니다.]

[‘꿈’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꿈’에 재접속을 시도합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가진 권한이 적용되어 접속에 성공하였습니다.]

[‘꿈’에 일부 간섭할 권한이 생겼습니다.]

[시간의 태엽이 되감깁니다.]

[굴레가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하는 것처럼.

연우와 비마질다라의 싸움으로 망가지다시피 했던 지구와 태양계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소행성이 복구되고, 행성들의 공전축이 제자리를 찾았다.

지구는 대기 밖으로 뿜어졌던 먼지들이 도로 안쪽으로 되돌아오면서 화산이 가라앉고, 대지가 만들어지며, 푸른 바다가 다시 만들어졌다. 하늘이 다시 원래 밝았던 색을 되찾았다.

[종말이 취소됩니다.]

[부상하였던 ‘약속된 땅’이 가라앉았습니다.]

[지구가 온전한 모습을 되찾습니다.]

[모든 신이 침묵합니다.]

[모든 악마가 적막에 잠깁니다.]

그리고 신과 악마들은 연우가 만들어 낸 기적에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내보내지 못했다.

과거 신왕 크로노스조차도 ‘굴레’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올림포스의 도움을 빌려 상당한 의식을  거친 뒤에 인과율을 소모해야만 가능했건만.

연우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 혼자서 굴레를 되돌리고 만 셈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겉보기엔 별반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신과 악마들은 또 한 번 더 연우가 그들의 수준으로 절대 가늠할 수가 없는 위치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해야만 했다.

하아!

연우는 그렇게 단내 섞인 한숨을 가볍게 내뱉는 것으로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하지만.

‘……힘들군. 생각보다 칠흑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어. 이 정도면 현신(現身)에 필요한 인과율 중 2할 정도를 날린 셈인가?’

굳은 그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이대론 위험해. 조금 더 일을 서둘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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