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수라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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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하여간 내 아들이지만, 정말 사람 같지도 않다니까.』
크로노스는 ‘굴레’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 자신도 한때 ‘황’에 근접했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대단했지만, 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오른 연우를 보고 있으니 참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인과율, 많이 소모했지?』
크로노스는 웃음을 뚝 그치면서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연우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버틸 만합니다.”
『아닐 텐데?』
크로노스는 연우의 ‘본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뿌리는 이제 칠흑에 두고 있을지언정, 정체성은 거마신룡에 두고 있지 않던가.
그만한 존재는 애당초 이 세계의 물리적 법칙으로 현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폴리모프(Polymorph)였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인과율의 양은 상당했다.
지금까지는 ‘꿈’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쌓은 인과율로 어떻게든 충당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인과율을 소모해서야 좋을 것이 전혀 없었다.
애당초 연우는 수많은 칠흑왕의 자아들을 홀로 막아 내고, ‘꿈’을 유예시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당수를 잃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연우는 이런 점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으니.
크로노스는 그런 게 너무 서글펐다.
이럴 때는 그래도 이 아버지를 믿고 속내를 털어놓고서 함께 고민해도 좋으련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홀로 안고 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너무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철이 들어 버려서일까.
크로노스는 그런 게 전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연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거드름을 피웠다. 크로노스의 짐작이 맞았지만, 결코 티를 낼 수 없었으니까.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아버지에게는 절대 들켜서는 안 돼. 그랬다간 정말 큰일이 날 테니까.’
『하지만……!』
“아직 남은 마경이 있습니다. 그 것부터 처리하고 마저 이야기 나누시죠.”
연우는 고의로 크로노스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스퀴테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흠.』
짙게 내뱉는 탄식 속에는.
걱정이 깊게 묻어나 있었다.
* * *
그래도 다행이라면.
남은 마경, 남극의 주인은 연우가 비마질다라를 상대하기 전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는 점이었다.
“많이도 빨아들였군.”
연우는 마경에 맺혀 있던 칠흑의 파편을 회수하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남극 대륙의 정중앙.
거대한 싱크홀이 깊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만큼 아주 깊게 파여 있었다.
연우가 대략적으로 측정하기에는 이미 내핵까지 다다른 듯 보였으니.
이건 거의 무저갱이라고 해도 되는 수준이었다.
마치 유황불이 끊는 것처럼 안쪽에서부터 어둠이 꾸역꾸역 토해지고 있었다.
『네가 나오는 게 조금만 더 늦었어도, 르’뤼에는 빼앗겼을지도 모르겠구나.』
“예.”
녀석은 그래도 비마질다라를 제외한 다른 마경의 주인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었던 걸로 보였다.
지구의 생력을 이렇게 말끔하게 빨아들이면서 내핵까지 들어가는 무저갱을 설치한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철수를 할 때에도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무저갱은 그대로 있었지만 신력은 전혀 남아 있질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였단 뜻이었다.
‘비마질다라를 지구에다 묶어 놓은 게 애당초 내 발을 잡기 위했던 거였으니까. 이놈이 빠져나올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건가?’
연우는 차갑게 웃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닌, 그가 어이가 없을 때면 짓곤 하는 비웃음.
『하지만 그만큼 놓친 점이 있으면 아주 크군.』
“그러게 말입니다.”
연우는 무저갱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굴레’를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제약마저 벗어나 완전한 독립적인 개체가 된 ‘황’이 아니고서야.
제아무리 신과 악마라 하여도 ‘굴레’에 얽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 ‘굴레’를 되감는다면?
당연히 거기에 똑같이 딸려 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상당한 인과율을 소모하여야겠지
‘그래 봤자 ‘큰 굴레’를 굴리는 만큼은 아니니까.’
게다가 아무리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도,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써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연우는 무저갱 쪽으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태엽이 맞물렸습니다. 감기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시간의 태엽이 되감깁니다!]
[작은 굴레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츠츠츠-
연우가 설정한 범위를 따라, 시계 방향을 그리면서 내핵으로 쏠리던 무저갱이 도로 반시계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감춰 뒀던 많은 것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무저갱 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가 사라졌던 신전이 다시 생겨났다.
『허! 이놈 봐라, 아예 실험실까지 만들었어? 무슨 자원 채굴 공장이라도 되나?』
크로노스는 경륜이 깊은 만큼, 남극에 세워진 신전이 어떤 용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생력을 흡수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행성의 문명력까지 갈취할 수 있는…… 미래에 있을 잠재력까지 저당 잡아 불모의 대지로 만들 수 있는 악랄한 장치였다.
웬만한 신격들도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로서는 행성을 많이 확보하면 확보할수록 그만큼 신앙을 흡수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전략상 적에게 빼앗기기 싫어 청야전술을 펼칠 때에나 쓰는 방식이었다.
한데 이곳 마경의 주인은 바로 그런 짓을 저지르려 했으니. 지구의 모든 잠재력을 갈취하여 신력으로 삼고, 르’뤼에까지 완전히 깨우려 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연우의 손에는 어느새 한 남자의 모가지가 걸려 있었다.
충격에 잔뜩 젖은 얼굴.
분명히 지구에서 도망쳤던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꼭 그런 놈들이 있지.”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반드시 죽도록 처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
화아악!
[인스턴스 던전, ‘형벌 지옥’에 입장했습니다!]
연우는 이미 비마질다라와의 싸움을 겪어 봤던 터라, 절대 칠흑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심상 세계가 활짝 열리고, 녀석은 어떻게든 연우의 손목을 떨쳐 내고자 했지만.
콰아아앙!
연우는 그보다 먼저 단단한 지면에다 녀석을 처박았다.
『컥!』
녀석은 피를 잔뜩 토해 냈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우의 악력이 워낙에 강한 데다가, 본체라 할 수 있는 거마신룡이 어느새 그의 몸 위로 잔상처럼 겹쳐져 막중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이름.”
『말을…… 할 것 같……!』
“사실 안 해도 상관없어.”
『무슨……?』
“할 때까지 죽이면 그만이잖아?”
『……!』
충격에 젖은 얼굴.
연우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콰드득.
모가지가 돌아가면서 혀를 길게 빼물었지만.
“사자 소환.”
츠츠츠-
「어, 어떻게 내가……?」
그림자가 녀석의 사체를 완전히 잡아먹고, 영락한 영체만 고스란히 토해 냈다.
그리고.
[권능, ‘연옥로’가 발동합니다!]
「크아아악!」
연우는 과거에 고문을 할 필요가 있는 대상에게 그랬던 것처럼, 녀석도 연옥로의 불길에다 가둬 둔 채로 한참 동안 굴렸다.
「크아악! 제발, 제발 그만해! 살려 줘! 묻는 건 다 말해 줄 테니, 제발 그만……!」
“아직 멀었어.”
「제발, 제발……!」
그렇게 있기를 한참.
「컥, 컥!」
녀석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제발 죽여 달라는 얼굴.
연우는 차갑게 웃었다.
드디어 놈들의 꼬리를 잡은 셈이었으니까.
* * *
‘세샤.’
『삼촌?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여기는 다들 난리가 났어요!』
지구가 한번 멸망을 맞았다가 겨우 복구되었기 때문일까. 세샤의 목소리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되살아난 지구인들은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 전에 비마질다라가 일으켰던 자연재해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두려움에 젖을 수밖에 없었고.
연우도 지구에서 풍기는 막대한 원념(怨念)을 읽을 수 있었다.
[신앙이 쌓입니다.]
[신앙이 쌓입니다.]
……
그런 원초적인 두려움과 막대한 공포는 자연스레 칠흑왕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기에, 연우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다오.’
『……또 어디 가시려구요?』
연우는 침묵을 지켰고.
『하아! 이제 좀 돌아오시려나 싶었더니……. 알겠어요. 그럼 여기는 제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요. 대신에.』
세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다가 도중에 그쳤다.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아버지라도 같이 데리고 오라고 말하려는 걸까?
연우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으니 그러겠다고 말하려는데.
『올 때 메로나.』
‘……?’
연우는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말에, 순간 세샤의 말을 이해하질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휴! 하여간 재미없긴.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엄마도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연우는 ‘음, 그래. 알겠다.’고밖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현실에서 오랫동안 동떨어져 있던 그로서는 이런 쪽의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애당초 인간일 때도 크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지구에 대한 걱정이 전부 끝난 뒤.
『이제 가야겠지?』
“예.”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구나. 하아!』
남극의 주인은 소멸되기 위해서, 연우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무엇이든지 말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되었다.
이번 일에는 단순히 오케아노스가 있는 수상쩍은 배후 세력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세력도 여럿 얽혀 있다는 것을.
-나는……! 나는 그저 의뢰를 받았을 뿐이라고!
-의뢰?
-그래……! 지구의 생력을 흡수하기 위한 신전을 건축해 달라는 의뢰였……!
-누가? 누가 의뢰를 넣었단 거지?
-몰라!
-연옥로에서 나오기가 아쉬웠나 보군.
-그, 그런 게 아니야! 나나 내가 속한 조직은 애당초 의뢰주가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익명으로 처리된다고!
-너희들이 누군데?
-우리는…….
그때.
녀석이 했던 말은 연우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바이 더 테이블이다……!
바이 더 테이블이 의뢰를 받아서 마경을 건설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연우 부자에게도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한데. 흠!』
바이 더 테이블의 수장이 누군지를 떠올려 본다면, 크로노스와 레아가 살았던 터전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게 너무 이상했으니까.
“권력 구도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들 사이에서도 다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죠.”
『하긴. 그보다 자세한 건 직접 넘어가 보면 알겠지. 어차피 방주에 대해서 물어볼 것도 있었고.』
크로노스는 작게 중얼거리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연우는 크로노스의 시선이 상공으로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두려움에 찬 시선들이 두 부자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데바’의 신, 아그니가 마른침을 삼킵니다.]
[‘데바’의 신, 바유가 탄식을 흘립니다.]
[‘데바’의 신, 라바나가 곧 다가올 전쟁에 당혹해합니다.]
……
[‘멤피스’의 신, 호루스의 눈이 방황합니다.]
『저치들은 어떻게 할 거냐? 그 대로 두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우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덤볐으면, 되갚아 줘야죠.”
『역시 내 아들이로군.』
-단순히 의뢰가 들어왔다고 해서 지구에 마경을 설치했다고? 나와 올림포스를 적으로 돌리게 될 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그, 그들 말고도 같이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추후에 다른 일이 생기면 같이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 곳이 여럿 있었어!
-어디지, 그곳이?
-신, 악마, 가릴 것 없이 전부……! ‘낮’이 ‘밤’을 막고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면서……! 그러니 칠흑의 파편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날 보내 줘! 제발!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지 묻잖아.
-데바, 멤피스……!
처음 칠흑의 파편을 회수하면서도 짐작했었다지만, 그래도 일을 크게 키우기 귀찮아 경고로 끝냈었다.
하지만 저들이 르’뤼에까지 탐내려 했고, 지구의 생력까지 전부 소진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연우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올림포스.”
연우는 고개를 들고 허공을 응시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도열 중입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주신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미 올림포스는 그가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련된 곳들, 전부 친다.”
[‘올림포스’가 신의 사회, ‘멤피스’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올림포스’가 신의 사회, ‘아베스타’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올림포스’가 신의 사회, ‘투어허 데 더넌’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
[‘올림포스’가 악마의 사회, ‘절교’에게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
[갑작스러운 ‘올림포스’의 선전 포고에 많은 신의 사회들이 경악합니다!]
[선전 포고를 받은 악마의 사회 중 몇몇이 ‘올림포스’에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기를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