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수라장 (11)
여러 사회들은 어떻게든 연우와 올림포스를 말리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분명히 내가 말했을 텐데? 쓸데없는 욕심 내지 말라고.”
연우는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인지하면서 으르렁거렸다.
[신의 사회, ‘멤피스’가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아베스타’가 침묵합니다!]
……
[선전 포고를 받은 모든 사회가 칠흑왕의 자아에게 선처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일을 이딴 식으로 꾸미고 있었단 말이지?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올림포스’가 정벌군을 형성하였습니다.]
[정벌군 명단]
1군단장: 아레스
2군단장: 헤라클레스
3군단장: 아폴론
……
[1군단이 ‘데바’로 출정합니다.]
[2군단이 ‘멤피스’로 출정합니다.]
[3군단이 ‘아베스타’로 출정합니다.]
……
[‘올림포스’의 선전 포고를 받은 신의 사회가 일제히 공세에 대비합니다!]
[‘올림포스’의 침략을 받은 악마의 사회가 다가올 전쟁에 경계 태세를 갖춥니다!]
……
[몇몇 신의 사회가 사절을 보내고자 합니다.]
[몇몇 악마의 사회가 항복 의사를 표시합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모든 사절의 방문을 거절하였습니다.]
[칠흑왕의 자아가 모든 투항 의사를 무시하였습니다.]
……
[모든 죽음의 신이 ‘죽음’을 집행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가 왕의 위엄을 거스른 적들에게 ‘죽음’의 축복을 내리기 위해 움직입니다!]
[동맹군, ‘천교’가 대기합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대기합니다.]
……
[천계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연우는 그 뒤로도 자신에게 사절을 보내겠다는 여러 사회들의 의사를 전면 무시했다.
그리고 군단장을 맡은 사도들에게도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면 절대 봐주지 말라는 명령을 따로 남기기도 했다.
‘천마가 신과 악마들을 왜 탑에 다 가둬 두려고 했었는지도 알겠어.’
신과 악마들은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기에 바쁘다. 오로지 자기네들만이 중요한 작자들이니, 제어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이번에도 그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지구를 결판낼 뻔하지 않았던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로는 부족했다. 어디다 가두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묶어 둬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올림포스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천교와 니플헤임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굳이 그들의 손을 빌려서 세를 키워 줄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주신의 요청에 따라, ‘아난케’가 강림합니다!]
올림포스에서 유일하게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존재가 조용히 내려왔다.
따스한 눈매가 인상적인 여신.
올림포스에서 ‘운명’을 신위로 두고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연우에게도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부르셨는지요?”
연우에게 예를 갖추는 아난케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그 순간.
차차착!
스퀴테가 잘게 부서지면서 인간의 형태를 갖췄다.
크로노스가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유모.』
“예전과 다르게 신수가 훤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크로노스.”
연우가 크로노스의 신화를 체험할 당시, 거인 출신 아틀라스와 함께 항상 그의 옆을 지켜 주던 고마운 존재.
아난케는 크로노스에게 있어 친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모든 사랑을 그녀에게서 받았으니까.
하지만 크로노스가 마성에 감염되고 폭군이 된 이후, 아난케는 올림포스에서 모든 직책을 내려 놓고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크로노스가 몰락한 이후에는 그나마 외부로 얼굴을 비추던 것도 전면 중단하고 원로원에서 조용히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제우스 일파가 그녀를 꺼림칙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권력을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가만히 있던 것이고.
그러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예전엔…… 아주 미안했어.』
사실 크로노스는 눈을 뜨고 난 이후로도, 한동안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포세이돈 등에게 용서를 구하면서도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처럼.
아난케에게도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모. 유모의 눈에는 짐이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짐은 이제 왕이다. 유모의 그런 보살핌은 간섭에 지나지 않아.
-그들을 용서해 달라? 선처를 해 달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 줄 아나?
-지금 유모가 한 행동이 짐의 위엄에 얼마나 먹칠을 하는지 알기나 해? 자숙으로 끝나는 것을 은총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야.
크로노스의 치세는 대부분 폭압과 공포로 얼룩져 있었고.
따스한 성품을 지닌 아난케는 그런 폭정의 피해자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아난케는 마음의 상처를 입다가 돌아선 것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 건넨 사과는 너무 늦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크로노스.”
아난케는 웃고 있었다.
오래전, 철없는 망나니였던 도련님을 따스하게 돌보던 유모의 모습으로.
“그때보다 훨씬 밝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이 어미는 항상 그게 참 걱정이었답니다.”
『……!』
크로노스는 빳빳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어머니였던 것이다.
“바이 더 테이블과의 접점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연우는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조심스레 다가가야만 했다.
아난케가 따스한 눈웃음을 지으면서 연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당신은 왕이십니다. 무릇 왕은 신하에게 말을 높이지 않는 법이지요.”
고상하면서도 반듯한 어투.
연우는 크로노스의 제왕학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전에 아난케는 제 아버지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니, 제게는 조모님이 되시는 겁니다. 어떻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연우를 보는 아난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와 닮으신 듯하면서도, 훨씬 더 반듯하게 자라셨군요.”
“제가 아버지보단 훨씬 낫죠.”
“하긴. 크로노스는 그냥 망나니였으니…….”
“최소한 전 아닙니다.”
“레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는지. 정말 천만다행이네요.”
『둘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크로노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두 사람은 가볍게 실웃음을 흘렸다. 크로노스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지만.
그러다 아난케가 인상을 굳히면서 말했다.
“그동안 저는 원로원에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올림포스와 바이 더 테이블을 중개하는 위치를 맡아 오곤 했어요.”
제우스 등이 함부로 아난케를 내치지 못했던 이유.
그건 아난케가 레아의 유산을 관리하던 바이 더 테이블과도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난케는 레아와도 사이가 아주 각별했으니까.
제우스 등으로서는 올림포스 통치를 위해 필요한 물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 중 상당수를 바이 더 테이블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연히 중개자인 아난케를 절대 내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아난케에게 바이 더 테이블과의 접선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탑이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그들과 마주칠 수 있는 통로가 전부 끊어진 셈이니까.
‘방주로 세샤 등을 구해 주고 나서도 그냥 훌쩍 떠났다고 했었고.’
“그런데 탑이 붕괴된 이후로, 바이 더 테이블이 뭔가 많이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어요.”
순간, 연우의 눈이 빛났다.
“혼란스럽다면……?”
“아무래도 내부에서 정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한 어떤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역시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기존에 있던 수장이 외부로 나서지 않고, 다른 후계자가 경영을 거의 다 도맡아 한다고 알려져 있어서……. 어쩌면 그 후계자가 권력을 틀어쥐었거나, 권력을 쥔 쪽이 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게 아니냐고 판단하고 있어요.”
연우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그 후계자라는 사람의 이름이, ‘율’입니까?”
아난케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를…… 아시나요?”
* * *
[‘올림포스’가 전쟁을 시작합니다!]
[천계가 비명을 지릅니다.]
“……하여간 우리 오라버니, 어디서 뭘 하고 계셔도 바로바로 알 수가 있구나. 그래도 너무하시지. 찾아오시지도 않고.”
에도라는 ‘핏’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쀼루퉁하게 투덜거렸다.
연우가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때는 겉으로 괜찮다며 티를 내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적잖게 원망하기도 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의 마음이 전해졌고, 그게 이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에게는 이렇다 할 언질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선택을 내리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희생을 결정한 것이라고 해도, 그녀로서는 하나뿐인 연인을 잃은 셈이었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래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도 에도라는 여전히 연우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마음이 연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묶인 인연의 실은 절대 세월 따위로 끊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여전히 무심하기만 한 연우가 밉기도 했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그렇지, 깨어났다며 자신에게 메시지라도 하나 보내 줄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커다란 소란을 일으키면서도,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는 걸까.
무정한 사람 같으니.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신마도를 끌어안고 마저 가던 길을 가려는데.
“……응?”
[칠흑왕의 자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에도라는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탑을 떠난 이후로, 게이트에 입장할 때가 아니면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 나타날 줄이야.
그리고.
[메시지: 곧 찾아가마. 미안하다.]
여전히 무뚝뚝함이 넘쳐 흐르는 내용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도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힐 무렵.
“아가씨!”
갑자기 그녀가 있던 들판으로 누군가가 뛰어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때 신녀 훈련을 받았던 ‘자매’였다.
그런데 뭔가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슬픔과 혼란이 가득 섞인 얼굴.
에도라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똑같이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영매께서……!”
* * *
“울지 마라. 기실 따지자면 내가 너무 오래 이 땅에 있었던 것이니까. 원래 있던 곳, 금천께서 계신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영매는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판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한평생 철없기만 할 줄 알았던 아들이었는데, 어깨가 이렇게나 넓었었나. 영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부족을 충분히 잘 이끌어 가겠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판트의 억장을 더 크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탑에서 탈출한 이후. 외뿔부족은 ‘낮’을 도와 ‘밤’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물 만한 터전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원래 시조인 소호 금천을 좇아 탑에 들어왔던 선주 종족.
원래 있던 고향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한동안 이주를 거듭해야만 했고, 그러다 뒤늦게 한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영매는 너무 많은 영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무왕의 죽음 이후로 심력 소모가 적잖았던 데다가, 일족의 명운까지 어깨에 짊어지면서 그녀는 급속도로 야위어만 갔다. 영력 소모에 따라 생명력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시시각각 노화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판트는 그러지 말라며 어머니를 뜯어말렸지만, 그녀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
언제부턴가 무왕과 마찬가지로, 영매는 부족 내에서 ‘성모(聖母)’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 부부가 일족에 남긴 발자취가 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영매는 마지막 남은 천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
그때, 에도라가 소식을 듣고 급하게 거처로 달려 들어와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다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건지, 원.”
영매는 파리한 안색과 다르게 입가에 시종일관 미소를 달고 있었다. 그러다 훌쩍 자라 버린 아들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판트, 약속대로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니?”
영매는 마지막 가기에 앞서 에도라와 단둘이서 짧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해 두었던 상태.
판트는 여기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물러난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족원들과 함께 방을 벗어났다.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당부를 너에게 하실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잘 모셔라.”
판트는 에도라에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그리고.
에도라가 조심스레 무릎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다가갔을 때.
영매는 품을 뒤적이더니 조용히 두 개의 목패를 바닥에 놓았다.
-필(必)
-멸(滅)
“이건……?”
순간, 에도라는 불길한 마음이 들어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떠나기 전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사위의 점을 쳐 보았다. 그 뒤에 나온 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에도라의 몸이 흠칫 굳어 버렸다.
영매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한결 더 깊어졌다.
“몇 번이나 해도 똑같더구나. 네 아버지의 마지막 점괘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