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1화. 율 (1)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바이 더 테이블에 소개해 준 게 저였습니다.”
“아! 그래서 역시……!”
아난케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우는 어쩐지 뉘앙스가 이상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세력을 이끄는 데 있어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던 수장 프레지아와 다르게, 후계자인 율은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때가 많았거든요.”
아난케의 설명은 간단했다.
프레지아는 평상시 탑을 비롯해 여러 세계들을 돌아다니면서 재능이 있어 보이는 인재들을 발굴해 직접 양성하는 것을 즐겨 했고.
율은 다른 이들에 비해 늦게 제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성적을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고, 뭔가 주어지면 악착같이 해내는 성품도 그렇고…… 프레지아가 그를 두고 칭찬할 때가 꽤 많았어요. 나중에 크고 나면 믿고 맡길 게 많다고.”
천품(天稟)을 타고난 사람은 주변에 많을지 몰라도, 그것을 갈고 닦는 이는 아주 적다. 하지만 율은 바로 그 적은 축에 속했다.
“여기저기서 시기하거나 방해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걸 전부 꺾고 일어서더니…… 결국에는 자기 위에 있던 사형들을 누르고 후계자가 된 거였죠. 그리고 실권을 틀어쥔 뒤부터는 거의 그가 주도하다시피 하면서 세력을 이끌고 있어요.”
바이 더 테이블을 여러 엘리트 들의 비밀 집회이자 사교 파티로만 두었던 프레지아와 다르게.
율은 본격적으로 바이 더 테이블을 세력화하고, 집단 내 다른 파벌들을 고의적으로 내치면서 중앙 집권화를 이뤄 냈다고 했다.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많이 없애고, 전면에 나섰다고 하던가?
거기다 그동안 프레지아가 닦아 두었던 기반도 아주 튼튼해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방해가 있다면?
그냥 치워 버린단다.
율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그냥 업계에 발도 못 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상계 쪽에서 바이 더 테이블의 입김을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현재는 천계의 여러 사회들도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구요. 때문에 그쪽에서는 ‘폭군’처럼 통한다더군요.”
“…….”
『하하! 그러니까 그 아이가 그런 성격을 보이는 게 전부 우리 아들내미의 영향 때문이란 거군?』
“아닐까요?”
『아니긴. 맞겠지.』
연우는 서로 죽이 맞아 떠들어 대는 아난케와 크로노스의 대화에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에 헤어졌던 율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오기만 남았지, 눈물 많은 아이일 뿐이었는데. 그만큼이나 달라졌다니.’
역시 시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평하게 녀석에게도 똑같이 흐른 모양이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한데, 왜 이렇게.
바이 더 테이블을 둘러싼 여러 의문들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아난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일단 연락부터 넣어 보겠어요.”
아난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도 확실하게 답변을 드리지는 못해요. 아무리 율 님이 집권을 하고 난 뒤로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비밀스러운 점은 많아서요. 숨기는 게 많다면 그냥 숨을 수도…….”
어딜 가더라도 바이 더 테이블은 항상 갑의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만큼 전 우주에 구축한 그들의 입지는 탄탄했다.
하지만.
“아뇨. 저들은 나올 겁니다.”
연우는 아주 단순하게 일축했고, 아난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연락을 넣으실 때 덧붙여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연우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 불타고 있을 다른 사회들과 결탁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 * *
“……이걸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경고라 받아들여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이건 우리 바이 더 테이블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딴 망발을 꺼낼 수 있단 말입니까!”
따스한 햇볕이 드는 자리.
거대한 원탁을 따라 가지각색의 다양한 복장을 한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다만, 차림새와 다르게 모두 나무를 깎아 만든 똑같은 탈을 얼굴에 쓰고 있었으니.
차이점이 있다면 탈에 저마다 다른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원탁회의.
바이 더 테이블을 이끄는 33인의 간부들이 주요 의제를 논의할 때마다 가지는 회의였다.
다만, 평상시에는 거의 만석이거나, 비더라도 한두 석이 전부였던 좌석은 상당수가 비어 있었다.
최고 상석에는 몇 달째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있는 프레지아 대신에 한 건장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다른 간부들과 다르게 탈을 쓰지 않은 그는 여태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간부들의 토론을 지켜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아티초크’?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요?”
“무슨……!”
“상대는 사왕(死王)입니다! 탑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칠흑왕의 자아가 되고, 이제는 혼자서 천계를 불사르고 있는 그 사왕이요! 그런데 그런 자의 경고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 이 말씀이십니까?”
연우를 가리키는 칭호였던 ‘사왕’은 이제 초월자들을 비롯해 전 우주를 바탕으로 활약하고 있는 여러 거대 단체와 조직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처럼 각인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하데스로부터 명계의 왕좌를 물려받아 받게 된 칭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죽음’, 그 자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회, ‘아베스타’가 크게 불타고 있습니다!]
[주신 아후라 마즈다가 그만하라며 절절하게 호소합니다!]
……
[신의 사회, ‘데바’가 치열한 접전에 모든 총력을 기울입니다. 전세가 위태롭게 벌어집니다.]
[죽음이 집행됩니다!]
[죽음이 집행됩니다!]
……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메시지를 접해야 할 정도로.
현재 천계는 엉망진창이었다.
보통 천계 내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에는 철천지원수가 아니고서야 총력전을 펼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개 세력이 비등한 경우가 많고, 어떻게 이긴다고 해도 주변에 워낙 많은 세력들이 난립하다 보니 어부지리를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림포스는 전혀 그런 걸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연우의 명령을 하루라도 빨리 수행해야겠다며 전격전을 실행하고 있었으니.
문제는 그런 전력들이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각 군단의 수장들은 연우로부터 사도직을 수여받은 이들.
무려 칠흑왕의 힘을 받은 것이다.
쉽게 거스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거기다 망자 거인과 사룡들이 섞여 있는 것도 문제였으며.
무엇보다.
“죽음의 신과 악마들도 완전히 사왕을 주인으로 떠받들고 각 사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지? 자, 다시 묻겠소. 그런 사왕이 우리 바이 더 테이블을 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어디 쉽게 막을 수 있겠냔 말이외다!”
각 사회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던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이상, 사실상 현재 연우를 거스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면 아티초크께서 직접 세력을 이끌고, 우리를 대신해 그들을 막아 보시겠소? 듣자 하니 아티초크께서 옆에 두고 있는 이들도, 그 어디였나. 바하라타 성(星)이었나? 거기서 꽤나 활약을 벌인다고 들었는데. 이참에 큰 명성을 얻으실 수 있겠군!”
“꼬, 꼭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험험!”
“그럼 현실성 없는 말을 꺼낼 바엔 그냥 닥치고 있으시오! 이러니 내 처음부터 저들 천계의 계약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고 떠들어 댔던 게 아니오!”
여태 연우의 폭압에 맞서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티초크’는 결국 여러 시선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단 것을 깨닫고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지구의 생력을 흡수하기 위해 놓였던 마경은 원래 바이 더 테이블에서 설치한 것.
‘그들’과 손을 잡았던 천계의 여러 사회들이 바이 더 테이블에 압박을 넣은 결과였다.
내부에서 동조도 있었고.
여태 싸우자고 떠들어 대던 아티초크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아티초크의 옆에 있던 ‘라플레시아’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숨는 건 어떻소? 사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야, 제아무리 칠흑왕의 자아라 한들 우리를 완전히 ‘인지’하긴 힘들 텐데.”
“물론, 그것도 방법이긴 할 테지. 목숨은 구제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중에 나오고 나면 기반도 다 박살 나 있을 테고…… 뭐, 그래도 상관없다면 말리지 않겠소.”
“…….”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중에라도 눈에 띄었다간 그냥 쉽게 죽진 못할 거요.”
곳곳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가 각 세계와 행성에서는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라지만.
연우와 비교했을 때는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재촉하기라도 하듯이.
[악마의 사회, ‘절교’가 ‘바이 더 테이블’에게 구호물자를 요청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기존에 제시한 값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바이 더 테이블’에 기존 영토 중 상당수를 할양할 의견까지 피력합니다!]
……
[악마의 사회, ‘절교’가 ‘바이 더 테이블’에게 새로운 제안을…….]
……
[‘절교’에 죽음이 활발하게 집행되고 있습니다!]
“…….”
“…….”
“하아! 보다시피 상황이 이 모양인데, 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그를 거스를 수 있냐 묻고 싶은 거요.”
절교는 악마의 사회 중에서도 니플헤임과 더불어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한 곳이다.
한때는 비마질다라도 몸을 담갔을 정도로 강력한 성세를 구가했지만.
지금은 언제 무너질지 몰라 위태롭게 있는 곳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던 그때.
“그럼 ‘군자란’께서는 어떻게 하시길 바라십니까?”
최고 상석에서 여태껏 말이 없던 젊은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간부들의 시선이 최고 상석으로 향했다가, 다시 군자란에게로 쏠렸다.
여태 연우에게 협조하자는 의견을 피력하던 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선 저들은 우리와 그동안 사이가 좋았던 아난케를 통해 접촉을 시도해 왔소. ‘전쟁이 길어질 것 같으니 부족한 물자를 공급받고 싶다’는 게 저들의 설명이 아니오? 그렇다는 건 당장 마경에 대해서 따져 묻지 않겠다는 말이라 봐도 되지 않겠소?”
“아직 우리에 대해서 눈치를 못 챈 것일 수도 있지.”
“사왕이 그렇게 바보는 아닐 거라 보오만!”
노인은 콧방귀를 뀌면서 강하게 성토했다.
“그러니!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라 보오.”
“너무 속 편한 의견이신 듯합니다만.”
최고 상석의 사내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군자란을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
하지만 군자란은 알고 있었다.
저 젊은 사내가 저런 눈빛을 할 때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가 집권했던 초창기, 세력의 추구 노선을 바꾸겠다던 선언에 저항하거나 거부하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하지만 군자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왕은 과거 수장께서 개인적으로 후원을 시작하셨고, 이후 큰 성과를 거두었던 분 중 하나였소. 그리고 ‘방주’를 그의 사람들에게 빌려주면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비밀에 가려진 수장의 과거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말도 있었고.”
“…….”
“그러니 일단 만나 보고,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말은 저렇게 험악하게 했어도, 그전까지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이야기는 들어 보겠단 뜻이 아니겠소?”
최고 상석의 사내는 여전히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군자란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문을 따지는 상인이 아니오? 이렇게 큰 판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남는 게 아주 많지. 그리고 한 곳에다 줄을 대야 한다면 이기는 쪽으로 대야 하지 않겠소?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 수 있으면 틀어야지!”
“군자란께서는 사왕이 이기는 쪽이라 보시는 거군요.”
“그럼 아니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계의 다른 사회들을 모른 척하고서야 뒷감당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지……!”
“일단 군자란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 의견대로, 일단은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군자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하시었소.”
최고 상석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왕 쪽으로 추를 완전히 기울인 것은 아닙니다. 군자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상인은 상인답게 이문을 크게 남기는 게 최고라고. 그러니 저는 그런 쪽을 선택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