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27화 (727/862)

2화. 율 (2)

원탁회의가 끝난 뒤.

“자신의 스승이 그 모양 그 꼴인데도, 여전히 딱딱하군.”

아티초크는 문을 나서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탈에 가려져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현 상황을 못 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따라 나오던 라플레시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카시아’께서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시면 그럴 수도 있지. 듣자 하니 아카시아가 바이 더 테이블에 들어오게 된 계기 자체가 사왕의 소개였다지 않소? 그래서 그를 따르기도 많이 따랐다는 건, 시종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한 이야기고.”

아카시아.

최고 상석에 앉은 사내, 율을 가리키는 코드 네임이었다.

바이 더 테이블의 간부진은 대부분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꽃의 이름으로 된 코드 네임을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우리들에 대해서 언급했다가 프레지아가 다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다. 계속 저렇게 뻗대는 것부터가 애당초 우리에게 겁을 먹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라플레시아가 차갑게 웃으면서 한 말에 아티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자면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지. 바이 더 테이블과 사왕이 맞부딪치고 난다면, 혼란은 더 커질 테니까. 우리는 그때 우리가 바라는 것만 가져가면 되는 것이오.”

바이 더 테이블이 아무리 노선을 바꾸고 있다지만, 애당초 그들은 연합체로 시작한 곳.

당연히 이권과 입장에 따라 분열과 반목이 거듭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프레지아와 반대되는 위치에 섰을 뿐이었다.

바이 더 테이블에 올라탔던 것도 어디까지나 이것이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지, 더 이상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거나 갈아탈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환승할 수 있는 다른 곳이 있었다.

다만, 그러기 전에 이곳에서 얻을 것은 반드시 얻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이 내걸었던 조건이었으니까.

“그러니 일단은 우리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태클이나 거는 눈엣가시부터 치웁시다.”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차갑게 웃었다.

직접 말로 하지 않아도, 눈엣가시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군자란.

툭하면 그들의 의결에 퇴짜를 놓기 바쁜 노인부터 치워야 했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이제 뒷방으로 물러나 손자들의 재롱이나 보면서 살 때가 됐지.”

* * *

“누가 내 뒷담화라도 하는 모양이군. 왜 이리 귀가 간지럽누?”

모든 간부들이 떠난 자리.

원탁에는 단 두 사람, 율과 군자란만이 남아 있었다.

군자란은 연신 투덜거리면서 약지로 귀를 긁어 댔다.

그 모습이 세상사에 불만 많은 동네 영감님처럼 보여, 율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처음 보인 감정 변화였다.

“아니. 늙은이가 이렇게 귀나 벅벅 긁어 대는 게 그렇게 이상하오? 에잉.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웃기나 하고.”

군자란은 그런 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더 크게 투덜거렸지만.

그게 그만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율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렸다.

“고맙습니다. 매번.”

“이거 귀지가 너무 깊게 박혔나. 왜 이렇게 계속 간지러워?”

군자란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괜히 귀에다 신경질을 내다가, 곧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율에게 말했다.

“하여간 이제 어떡할 거요? 지금이야 사왕의 위세를 빌려 의견을 뒤로 물리긴 했다지만, 어쨌거나 저들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계속 나설 게 분명한데.”

“그러게요. 일단 시간은 벌었고, 사왕도 이쪽을 눈치채면서 한시름 덜긴 했습니다만…… 사실 저로서는 한 치의 앞도 보이질 않아 갑갑하기만 할 뿐입니다.”

율은 쓰게 웃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답답한 건 그였으니까.

외부에서는 그가 ‘폭군’이라 불리며 바이 더 테이블의 노선을 멋대로 바꾸고, 세력을 사유화하여 권력을 추구한다고 수군대곤 하지만.

사실 그는 누군가가 전면에 내세운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흑막이 하라는 대로 하고,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스승님은…… 괜찮으실까?’

프레지아가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우 일행의 탈주를 도와주고 돌아온 직후.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이 더 테이블 내에서는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를 비롯한 간부 몇몇이 대기하고 있다가 귀환하던 프레지아를 급습한 것이다.

정체불명의 적들을 대동한 채로.

이 과정에서 아나스타샤는 크게 다친 채로 도주했고, 프레지아는 저들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순순히 당할 분들이 절대 아니었지만.

방주를 가동시키면서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 지쳐 있었던 데다가, 거처로 귀환하면서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율에게는 지옥이 시작되고 말았다.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 등은 절대 자신들의 ‘반란’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무리 프레지아를 생포했어도, 바이 더 테이블이 지닌 덩치는 그들만으로 완전히 접수하기엔 너무 비대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들은 프레지아가 부상을 입어 칩거를 한다고 발표하고, 율을 전면에 내세워 대리 통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입맛대로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의견이 맞지 않는 이들을 쳐 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분쟁이 뒤따랐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십 년.

이따금 프레지아의 영상이나 음성 등을 통해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던 것도, 최근에 들어서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상태.

그럴수록 율은 점점 초조해졌다.

프레지아가 혹시 잘못되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스승 프레지아는 연우와 함께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저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아 내신 바가 없지요?”

군자란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놓고 사왕께 도와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군요.”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라면 분명히 연우를 만나러 가는 장소에 자신들의 사람을 붙일 테니까.

섣불리 이상한 말을 했다간 큰일 나기 십상이었다.

“사왕은 속에 능구렁이 수십 마리는 품고 있을 정도로 눈치가 아주 빠르고 암계(暗計)에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혹 그가 미리 눈치를 챌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들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이상에는…… 뭔가 시도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어렵군요.”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율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름에 젖어 있던 두 눈이 다시 빛났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서 후계자 자리에 앉았을 때 보이던 것과 같은 눈빛.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어쩌면……!”

“뭐가 있는 거요?”

군자란이 조금 기대를 갖고 율을 바라봤지만.

율은 도중에 아차 싶었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자리에 도로 앉았다.

하지만.

말투와 다르게 그의 눈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을 때, 내게 손길을 내밀어 줬던 것처럼. 카인 형이라면, 지금도 어쩌면…….’

해낼 수도 있을지 몰라.

율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율을 수장으로 한 대표단이 연우와 접촉한다는 의제가 통과된 직후.

이야기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회담 장소가 결정되었다.

카나란 성(星).

지구에서 400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행성이었다.

안드로메다은하 내에서도 손꼽히는 문명과 생력을 가진 곳.

덕분에 많은 사회들이 군침을 흘렸지만, 그동안 바이 더 테이블이 세력하에 두었던 곳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는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 일당의 세력권이었다.

“쓸데없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이곳은 ‘정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꽃의 정원’은 오랫동안 바이 더 테이블의 본부가 웅거하고 있던 외우주를 뜻하니.

이곳에는 당신을 보호해 줄 사람들이 없으니 말조심하라는 경고였다.

대표단에는 아티초크가 따라와 있었다.

사람을 붙일 거란 생각과 다르게, 그들 파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가 직접 참여한 것이다.

그만큼 연우와 엮인다는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뒤에 있는 흑막의 지시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던 율로서는 절대 좋은 징조는 아닌 셈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소.”

하지만 율은 절대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을 고수했다.

프레지아가 저들에게 인질로 잡힌 이후로, 그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질문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아티초크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던 꽃의 정원에서와 다르게, 다른 간부들의 눈이 없는 이곳에서는 그가 왕이었다.

“스승님은, 무사하시오?”

“설마 우리를 의심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소? 그저 제자로서 스승님의 안부가 궁금할 뿐이오. 어찌 지내고 계시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지.”

“흥! 알아서 다 잘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사왕을 상대하는 데에만 집중하십시오.”

“하지만…….”

“아니면 저번처럼 프레지아의 손가락이라도 하나 갖다 드리리까? 아니면 팔 한쪽이면 족하시려나?”

“……아니오. 내가 잘못하였소.”

율은 이를 꽉 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아티초크는 그런 율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속으로 혀를 차야만 했다.

‘젠장! 그년이 뒈졌는지 아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십 년 전에 반란을 일으킨 게 자신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지시에 따라 수행한 것일 뿐.

프레지아의 신병도 그들에게 넘긴 지 오래이니, 아티초크가 프레지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전혀 없었다.

듣기로는 그녀로부터 알아낼 것이 있어 손을 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뒤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나는 내 이문만 챙기고 알아서 뜨면 그만이다. 신경 쓸 거 없어.’

이곳에 직접 나서서 연우를 살피라는 것도 그들의 지시였으니. 위험한 곳에 내몰리는 게 영 탐탁지 않으면서도, 그가 나서야 했던 게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화아아!

아티초크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 앞으로 시푸른 빛무리가 번져 나오더니 누군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아티초크에게도 익숙한 아난케가 가장 먼저 얼굴을 내비쳤다.

율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난케.”

“못 본 사이에 더 의젓해지셨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아카시아께서 직접 왕림하시겠다고 말씀하실 줄은 생각도 못 하였어요. 보통 외부로 잘 안 나오시지 않으셨던가요?”

“자리가 자리니 고집을 피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한데, 그분은……?”

율이 포탈 쪽을 힐끔 훔쳐보면서 연우가 언제 나오는지 물었다.

그 순간.

아난케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곧 나오실 겁니다.”

“……?”

어쩐지 그 미소가 묘하게 느껴 져 율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티초크는 이상하게 등골을 따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현상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 어어어? 이게 무슨……!”

아티초크는 빳빳하게 전신이 굳고 말았다.

그리고 한순간 연우에 대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현재 초월자들 사이에서 사왕으로 통하지만, 한때 필멸자들 사이에서는 영왕이란 칭호로 더 유명했으니.

그 이유가, 죽음이 담긴 그림자를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이라고…….

화아아악!

그림자가 촉수처럼 단숨에 위로 뻗쳐 올라왔다.

팔다리가 단숨에 묶였다. 몸통이 제어권을 빼앗겨 빳빳해졌다. 전신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촤르륵, 촤륵!

그림자 곳곳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이 그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 버리고 말았으니.

아티초크 역시 초월자의 격을 지니고 있다지만, 지금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으, 으아아아!”

몸이 조금씩 그림자 안쪽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

탈 아래, 아티초크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카시아! 어서 멈추라고 하시오! 당장! 그렇지 않으면 프레지아의 목숨은 위험할 거요……! 멈추라고, 당장!”

율이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아난케를 돌아봤다.

하지만 아난케는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말하라고오오!”

아티초크의 비명이 구슬프게 울리던 그때.

“역시 그런 거였군.”

포탈이 부서지면서 천천히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갑게 미소를 지으면서.

“아!”

율은 그가 단번에 연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한나절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아주 짧았고, 그마저도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몰랐지만.

율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당시를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그날의 일은 율에게 아주 큰 인상을 남겼다.

또한,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자신도 저렇게 되리라.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되리라고, 좌절하고 싶은 순간마다 몇 번이나 되뇌게 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율은 절대 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가면을 벗었다고 해도.

설사 다른 가면을 썼다 하여도, 저 눈빛을 본다면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율은 십여 년간 가슴에 묵혔던 말을.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었던 말을, 처음으로 꺼낼 수 있었다.

“형……!”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지, 목소리가 잘게 떨릴 정도였다.

그 때문일까?

여태 아티초크를 노려보던 연우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너, 그거 알고 있나?”

연우의 눈동자에, 흔들리는 눈을 한 율이 잡혔다.

“내겐 사도들도 많고,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이며 동료들도 많다지만. 그중 ‘첫 번째’ 신도는 바로 너였다는 거.”

“……!”

“비록 내가 못나 여태 그런 첫 번째 신도의 소망을 놓치고 있었다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저벅!

연우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 기다려라. 구원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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