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율 (3)
연우가 처음부터 율의 사정을 깨달은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실시간으로 그에게 쏟아지는 신앙의 양은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개중에는 대신격이 보내는 것도 있어서, 일반적인 필멸자들이 보내는 신앙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절대 감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그동안 자신에게로 쏠리던 신앙 중에 율의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율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의지를 감지하게 되면서, 비로소 쏟아지던 신앙 중에서도 유독 환하게 빛나던 게 율의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연우가 탈각을 이루고, 신격을 쟁취하면서 얼마 있지 않아 얻게 된 신앙이었다.
아주 작지만, 연우로서는 소중할 수밖에 없는 신앙.
그렇기에 그 속에 담긴 소망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고.
율이 현재 처한 위기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아티초크부터 포박한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형.”
율은 연우의 말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구원.
처음 탑의 튜토리얼에서 그가 얻었던 것을, 연우가 또다시 내어 주려 하고 있었다.
“기다려.”
연우는 그 말만 툭 던지고 앞으로 나섰다.
딱히 포탈을 쓰거나 블링크를 이용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간이 접히면서 그는 어느새 아티초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축지.
올포원-비바스바트를 흡수하고 난 뒤에 얻은 그의 시그니처 스킬 중 하나였다.
“그래. 프레지아를 네가 데리고 있다고?”
“그, 그렇다……! 어서, 어서 나를 풀어 줘! 그러지 않으면 프, 프레지아가 죽는다고!”
아티초크는 그림자의 늪에서 허우적대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여태껏 연우의 악명을 많이 들었다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나니 위압감에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였다.
그래도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는 그런 공포를 어떻게든 이기게 해 주었지만.
“거짓말이군.”
“무, 뭐……?”
연우는 그를 보면서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순간, 아티초크의 눈이 거칠게 요동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이래 봬도 올라 있는 위치가 꽤 괜찮아서. 너의 업을 태우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거든.”
“……!”
“역시 뒤에 흑막이 있었나? 뭐, 그 정도는 얼추 예상했으니까.”
“사, 살려……!”
“너무 많이 듣던 대사라 지루하군. 너희 같은 것들은 똑같은 말밖에 할 줄 모르나?”
연우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뻗어 아티초크의 안면을 잡아 그대로 그림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끼아아악!
영혼이 찢기는 구슬픈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참, 내 아들이지만 대화만 들으면 누가 악당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크로노스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말거나.
연우는 갈가리 찢기는 아티초크의 영혼을 가만히 바라보다, 영력을 끄집어 올렸다.
츠츠츠-
몸을 타고 그림자가 올라오면서 신체 구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여우처럼 길게 쭉 찢어진 중년인의 얼굴. 그 위로 아티초크의 나무탈이 씌워지더니, 옷차림도 한순간 확 바뀌었다. 분명 방금 전에 죽은 아티초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과거 레온하르트 등을 구하러 가면서 보였던 것과 똑같이 모습을 변화한 것이다.
“형, 맞죠……?”
율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여태 벌어진 광경을 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연우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피식 웃었다.
“왜, 아닌 것 같나?”
“말투는 형이 맞는 것 같은데…….”
“이놈, 영혼에 금제가 걸려 있더군. 그것이 끊어져서야 놈들에게 내가 알아챘다는 정보만 주게 되는 꼴이니, 그것도 살려 둘 겸 해서 이렇게 변해 봤다.”
“아.”
율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제법 흘렀으니 많이 의젓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눈물이 많구나.”
그러다 율은 연우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또르르.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한순간도 풀리지 않았던 긴장이 확 풀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울었던 모양이었다.
“왜 이러지. 나 원래 안 이러는데. 헤헤…….”
* * *
“그러니까 프레지아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이 말이지?”
“예. 몰래 사람들을 움직이고 해 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밖에 놀러 나갔다가 해코지를 당한 동생이 형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것처럼 보여, 아난케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사실 아주 진지한 이야기 중이기 때문에 웃을 분위기가 아니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율의 저런 모습이 귀여웠던 것이다.
여태껏 그녀가 보았던 율이 아닌 것 같은 모습.
그러다 아난케는 크로노스를 돌아보면서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크로노스는 어쩐지 저 미소가 영 찝찝하게 느껴져 눈살을 좁혔
『갑자기 왜?』
“어쩐지 크로노스 님과 오케아노스 님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요.”
『오케아노스와? 우리가 그렇게 사이좋았던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크로노스 님 생각이시구요.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었답니다.”
『……그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형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사고를 치는 말썽꾸러기 같았죠.”
『그건 아니거든!』
“그게 아니면 왜 매번 우라노스 님께 혼이 날 것 같을 때마다 오케아노스 님을 찾아가신 걸까요?”
『그거야 아버지가 큰형의 말이라면 일단 귀담아들어 주긴 하니까 그런 거고……!』
크로노스가 얼굴이 뻘게진 채로 이런저런 말을 해 댔지만, 아난케는 여전히 자애로운 얼굴로 가만히 끄덕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내 말 전혀 안 듣고 있는 거지, 유모!』
“호호. 그럴 리가요. 다 듣고 있답니다.”
『하아.』
크로노스는 어쩐지 아난케에게 놀림을 받는 것 같아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가장 의지하면서도, 상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은 아난케였다.
『그런데.』
그러다 크로노스는 슬쩍 얼굴을 굳히면서 운을 띄웠다.
『아까 전부터 도저히 틈이 나질 않아서 묻지 못했던 게 있는데.』
“아틀라스에 대해서 묻고 싶으신 거죠?”
『어.』
크로노스는 시선을 여전히 율과 이야기 중인 연우에게 고정시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유모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아틀라스.
거인과 신의 혼혈 출신으로, 노예로 잡혀 왔던 것을 크로노스가 직접 구해 줬던 게 인연이 되어 그의 옆을 지켰던 존재.
크로노스가 마성에 젖으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는 와중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크로노스를 믿고 따랐던 충신이었다.
하지만 아난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 몰라요. 저 역시 모든 직위에서 은퇴하면서 아틀라스와 연락이 끊어졌었으니까요.”
『뭐? 나는 여태 녀석이 타르타로스에도 없기에 유모랑 같이 있는 줄 알았었는데?』
“당시에 아틀라스의 저항이 워낙에 거셌던 나머지 제우스들 사이에서도 그의 처벌 수위를 두고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제우스 등이 크로노스 님의 육체를 건드릴 수 없도록 지켰던 게 그였거든요.”
『……!』
“하지만 그런 논의들은 오케아노스 님이 직접 아틀라스를 거두시겠다고 나서면서 없어졌어요.”
『그게 무슨?』
크로노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케아노스의 이름이 여기서 왜 또 갑자기 나타나는 거지?
“아틀라스도 오케아노스 님이 직접 설득에 나서자 저항을 포기했었었구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
크로노스는 충격에 젖은 얼굴로 아난케를 가만히 바라봐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나중에 전해 듣기만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틀라스가 오케아노스 님을 따라간 것만은 확실해요.”
『이 양반은 대체 뭘 꾸미고 다니는 거야? 하아…….』
크로노스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러야 했다.
대체 오케아노스의 목적은 무엇일까? 분명히 자신들의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건 알겠는데, 그 저의를 알 수 없으니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아틀라스는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설득’이 통하기가 어렵다. 크로노스도 그를 다룰 때면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명령을 내릴 때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마지막까지 자신의 유해를 지키려 했던 아틀라스가 아무 말 없이 오케아노스를 따랐다면, 자신과 관련된 그럴듯한 무언가를 제시했다는 것일 텐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망할 형님을 어떻게든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그렇게 크로노스가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릴 무렵.
“찾으러 갑시다.”
『음? 큰형님을?』
연우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다음 놈이죠.”
크로노스는 그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 * *
율의 설명과 아티초크로부터 뽑아낸 정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현재 흑막의 끄나풀은 대표적으로 둘. 아티초크와 라플레시아다. 이 중 라플레시아는 흑막과의 연락책으로 알고 있다.
-흑막은 바이 더 테이블을 장기 말로 이용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대신 수행하게 하는 한편, 바이 더 테이블 안을 뒤져서 숨겨진 무언가를 찾고자 한다.
『숨겨진 무언가? 그게 뭔데?』
“‘초대의 유산’이랍니다.”
『초대의 유산? 음……? 초대는 페페가 아니었나?』
페페. 프레지아의 본명.
프레지아는 분명히 말한 적이 있었다.
바이 더 테이블은 원래 레아가 두고 간 유산들을 바탕으로 만든 곳이라고.
그런데 프레지아보다 선대가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
『설마?』
크로노스는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무래도 어머니의 유산, 정확하게는 그중 뭔가를 노렸던 모양입니다.”
『……!』
“다만, 율은 아직까지 프레지아로부터 유산이 보관된 금고의 위치나 여는 방법에 대해 들은 게 없었고, 저들에게 억류된 프레지아도 거기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았는지 여태 무사하답니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어머니께서 남기셨다는 유산과 르’뤼에 간의 연관성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크로노스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크로노스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주란 것도 네 엄마가 남긴 것이었다며? 하지만 난 처음 보는 것이었지. 애당초 네 엄마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만들곤 했었다. 아니, 정확하게 퀴리날레부터가 비밀에 가려진 곳이었어.』
“흠.”
『역시 정확한 건 놈들을 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예. 그래야죠.”
그 말과 동시에 연우는 크로노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크로노스가 다시 검형(劍形)으로 돌아와 손에 잡히자 그것으로 허공을 길게 쭉 찢었다.
공허가 열리고, 그 너머에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수정구를 보고 있던 노인이 나타났다. 아티초크의 기억 속에 라플레시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티초크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녀석은 순간 섬뜩한 느낌에 이쪽을 돌아봤다가 경악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공간이 열리며 다른 이들이 나타난 것이니까.
라플레시아는 연우가 아티초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직감적으로 뭔가를 깨달았는지 바로 몸을 뒤로 빼고자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가 손을 뻗어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리찍고 있었다.
“날 죽……!”
라플레시아는 숨이 턱 막히는 와중에도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그 대사는 아티초크로부터 들었던 것이라 연우는 그냥 무시했다.
츠츠츠-
영혼이 갈리고, 녀석이 가진 정보가 머릿속에 담겼다.
비상시에 흑막과 접촉하려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가 보이자, 연우는 쉬지 않고 곧장 그쪽으로 움직였다.
공허가 열렸다.
이름 모를 새로운 녀석이 나타나고, 그놈을 삼키면서 다음번 장소로 이동했다.
이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흑막이 있을 곳이 나타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