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른 꿈 (1)
“어, 어떻게 이곳을……? 크아악!”
“사실대로 말해 주겠소. 그러니 목숨만큼은!”
“사, 사왕! 당신이 어떻게? 이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컥!”
연우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족족 마주치는 이들을 전부 죽음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죽음이 집행됩니다!]
[죽음이 집행됩니다!]
……
[‘죽음’의 개념이 전 우주에 만연합니다!]
개중에는 초월의 격을 갖춘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여도 이미 ‘황’ 급에 다다른 연우에 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연우는 그들의 영혼을 통째로 잡아 뜯으면서 정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중에 거치적대는 이들은 전부 지웠다. 무릎을 꿇고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애당초 연우는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자신에게 대적하는 쪽에 선 이들을 전부 지우고자 했다.
끄나풀은 남기지 않는다.
마음을 먹은 이상,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리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항성계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그냥 조직을 통째로 지워 버리는 것이다.
『대충 어림잡아도 헤아리기가 어렵군. 문명 서너 개는 그냥 깨졌겠는데? 흐흐.』
크로노스는 그런 연우를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학살에 가까운 이런 짓을 말리거나 할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원래는 신왕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
아무리 필멸자로서 살아온 삶이 있다고 해도, 보는 시야가 일반적인 필멸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자신보다도 더 높은 곳에 우뚝 올라선 연우의 시선은 아마 자신으로서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높을 것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 싶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크로노스는 이번 기회에 질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탑이란 세계가 사라진 이때.
균형점을 잃은 사회들은 다시 옛날처럼 서로 반목하려 들고, 다시 세를 뻗칠 기회만을 노린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그것이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밤’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내부 기강은 확실하게 잡아 놔야 대적하기도 편하겠지. 변수는 확실하게 통제를 해 둬야 하니까. 이럴 때는 힘을 앞 세우는 게 최고고.』
그렇기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탑에 있을 때는 올포원, 그가 왜 그런 무리를 했나 싶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구만.』
크로노스는 그렇게 증오하던 올포원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물론, 소중한 가족 같았던 페페-프레지아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전 우주가 ‘죽음’에 잘게 떨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종말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종말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파고 들어갔을 때.
화아악!
연우는 우주의 어느 끄트머리에 위치한 한 행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지? 이런 곳이 있었나?』
크로노스는 한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작게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미처 인지 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구석에 위치한 행성이었지만.
어쩐지 거기서 풍기는 냄새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불길한 건 아니었다.
그냥 달랐다.
분명 이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지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마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 위 에다가 전혀 다른 가죽을 가져와 ‘덧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런 건 크로노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안’도 ‘밖’도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것을 강제로 주입하기라도 한 건지.
연우가 여태껏 이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그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치 피라도 잔뜩 흘린 것처럼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한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높다란 요새가 들어선 섬이 하나 있는 게 보였으니까.
“찾았군.”
연우는 그런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스퀴테를 거칠게 아래로 내리쳤다.
* * *
“…….”
“언제까지 침묵만 할 것이오?”
“…….”
“계속 그렇게 버티겠다는 건가? 벌써 십 년이오. 당신이 이곳에 갇히게 된 지가. 그만하면 충분히 그녀와의 의리는 지켰다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
검은 창살로 둘러싸인 곳.
겉보기엔 죄수를 감금한 옥실이었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보기엔 수십 명은 족히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크기에 침대나 책장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프레지아는 그런 것에 일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양팔과 양발에는 각각 마치 팔찌나 발찌처럼 보이는 검은 사슬이 달려 있었다.
신진철로 만들어진 구속구.
그녀의 모든 신력을 봉인하기 위해 설치한 것들이었다.
“아니면 사왕, 그가 언젠가 구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오?”
창살 너머에는 한 사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앉아 있었다. 그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프레지아의 간수를 자처해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칠흑에 저물었소. 아시지 않소? ‘꿈’이라는 게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거기에 사로잡힌 이상,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하오. ‘이번’에 이렇게 우주를 지키고 종말을 막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고, 인과율을 낭비하고 있을 거요.”
사내는 강제로 프레지아를 이곳에 가둬 두었을지언정, 그녀를 핍박하거나 고문을 가하는 등 신체적 위해를 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하루에 몇 시간씩 프레지아를 설득하는 데 몰두했다.
자신의 소망을, 아니, 그가 몸담고 있는 ‘우리’들의 목표를 납득 시키기 위해서였다.
달리 말해서, 그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이라고 봐도 되었다.
문제는 프레지아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만.
“천마와 칠흑왕으로 대변되는 창세와 종말…… 몇 번씩이나 반복되었고,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반복될지도 모를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어떻게든 벗어나야지 않겠소? 그러기 위해서는 ‘씨앗’이 필요하오.”
“…….”
“그들을 전부 배제한, 전혀 새로운 가능성만을 품은 세계를 잉태할 씨앗.”
사내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당신만이 알고 있다는 레아의 금고가 필요한 것이고. 이 빌어먹을 ‘굴레’가 끝나길 바라는 건, 당신도 똑같지 않았소?”
그 순간, 프레지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무면탈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고, 고요하기만 한 눈이었지만.
사내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건, 여태 굳건하던 프레지아의 생각에 변화가 있다는 뜻이니까.
“바이 더 테이블을 만든 목적이, 실은 다가올 종말에 대비한 비축을 위한 것임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소? 방주가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지.”
신화 속의 방주는 흔히 대홍수로 모든 것이 쓸려 나가는 상황에서, 후대를 위해 동식물의 각 한 쌍씩을 실은 큰 배로 그려진
레아의 방주도 그러했다.
종말이라는 대홍수에 대비해 필요한 것들을 비축하고, 새롭게 열릴 세상으로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탑이 무너질 당시에 쓰인 건, 방주가 가진 가능성의 일부를 내비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방주조차도 ‘한 가지’에 불과하게 만드는 게 레아의 유산, 아니, 퀴리날레의 유산이었으니.
사내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바이 더 테이블은 퀴리날레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남은 금 고지기이며, 그들의 뜻을 집행하고자 만들어지지 않았냐고.
그리고 자신들도 당신들과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말이다.
“당신, 다른 ‘굴레’에서 넘어온 분이신 거군요.”
그때, 프레지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에 낸 탓인지, 목소리가 많이 갈라지고 있었다.
사내는 쓰게 웃었다.
“넘어온 게 아니오. 버려진 거지. 돌아갈 고향 따윈 이제 남아 있지 않고, 이곳에서 죽어도 윤회 따윈 꿈도 꾸지 못하는 방랑자 신세라고나 할까?”
그의 두 눈은 분명 프레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프레지아는 어쩐지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희생자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소. 정녕 뜻을 함께할 생각은 없는 거요?”
프레지아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다리듯, 사내도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를 주시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당신들의 목적이 저와 같다는 것도 알겠고. 평소보다 더 진솔하게 말해서 일순 흔들린 것도 사실이에요.”
“그럼……!”
“하지만 당신은 실수를 하였어요.”
사내는 기뻐하다가 순간 인상을 굳혔다.
“그게 무슨?”
“이러한 변화는 아무래도 그만큼 당신들이 급박해졌단 뜻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
프레지아의 말에 사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칠흑왕의 자아가 강림합니다!]
콰아앙!
밖에서부터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강풍이 요새를 강타했다.
와장창창. 그동안 요새를 지키고 있던 결계들이 모조리 유리창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요새가 전면에 드러나자마자, 검은 벼락이 연달아 그 위로 내리꽂히면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사내는 당장 신력을 끌어 올리면서 프레지아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검뢰가 떨어지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르르릉!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사내를 그대로 밀어냈다. 그는 부서지는 요새 더미 사이로 튕겨나 붉은 바다 위를 한참이나 미끄러져야만 했고.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연우가 화안금정을 활짝 열어젖힌 채로 우뚝 서 있었다.
“이런……!”
사내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면서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시시각각 연우가 프레지아가 있는 쪽으로 쫓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우가 움직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던 모양이었다.
쿠우우우-
“연…… 우 님.”
프레지아가 떨리는 눈으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프레지아?”
『페페야. 나도 있는데 어찌 저놈만 찾는 거냐?』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크로노스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프레지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제가 해야죠. 제 사람들을 구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고마웠습니다.”
연우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면서 저만치 멀리서 이쪽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저놈 말이다.』
전혀 처음 보는 얼굴.
풍기는 기세도 여태껏 연우가 알고 있던 신이나 악마들의 것과 전혀 달랐다.
『대체 어디 놈인 거지? 저런 기질을 가진 녀석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데?』
크로노스는 연우처럼 녀석을 노려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정체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속 사회 없이 홀로 다니는 떠돌이인가 싶었지만…… 그런 이들은 보통 비마질다라나 케르눈노스처럼 격이 지고한 것들이 대부분이니 그가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내는 격이 아주 높아 보였다.
연우가 전력을 다해 내려친 검뢰를 튕겨 내고도 그을음만 살짝 남아 있을 뿐, 다친 구석은 전혀 없어 보였으니.
‘황’ 급에 다다른 존재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품고 있는 신화도 대단할 것인데, 왜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는 걸까?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이 공간과 마찬가지로, 저자도 너무나 이질적이다.’
신력의 기질도, 작동 방식도 전혀 다른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그가 알고 있는 법칙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 홀로 유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전 알 것 같습니다만.”
연우의 말에 크로노스의 고개가 그쪽으로 쏠렸다.
『음? 네가?』
연우는 이룬 경지는 대단해도, 초월자로서의 삶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신과 악마에 대해서는 무지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지만, 연우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토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토르는 분명히 죽었는데? 영혼도 네가 죄다 갈아서 사도들한테 나눠 줬었고』
토르와 아스가르드는 과거에 티탄과 손을 잡았다가 전멸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크로노스가 알고 있는 토르는 저렇게 유려한 생김새를 하고 있지 않았고, 성격도 폭급한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토르와는 다른 토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
크로노스는 말을 하다 말고, 순간 떠오른 생각에 경악하고 말았다.
『설마 다른 ‘꿈’에서 넘어온 자란 뜻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