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32화 (732/862)

7화. 다른 꿈 (4)

-오효효효. ‘짐승’이 무엇인지 물었나요?

언제였던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토르가 무너진 ‘꿈’에서 겨우 살아남아 공허를 한참 떠돌다, 동료들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수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체 공허 속에서 자신에게 빚어진 이 현상은 무엇이냐고.

당신이 누누이 말하는 종말의 짐승이란 게 무엇이냐고 말이다.

이에 수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틀어진’ 것입니다.

-틀어진……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수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그렇노라고 말했다.

-예.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으나, 결국 상황이, 환경이, 과정이, 도저히 올바르게 따라주질 않아 아쉽게도 비뚠 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들이요.

-……?

-당신이, 옆에 계신 오케아노스를 보면 감이 잡히지 않으시나요?

-……!

-올바르게 신화를 쌓고 쌓아 ‘황’이 되고자 했고, 그것으로 ‘꿈’으로부터 탈피해 칠흑왕과 완전히 갈라서고 싶었지만…… ‘꿈’이 무너지면서 그러지 못하고 결국 낙오자가 된 당신들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

-원래대로라면 무너진 ‘꿈’과 함께 없던 것으로 화했어야 하지만, 쌓은 업이 워낙에 두텁기에 독립성은 일단 얻은 상태라 사라지진 않고, 승화(昇華) 대신에 변이(變異)를 이루고 만 것. 그것이 바로 짐승이지요.

흔히들 신과 악마가 되고 나면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필멸자가 봤을 때, 흔히 신과 악마로 통칭되는 초월자들은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에 가까운 힘을 지녔을 테니까.

하지만 정작 초월을 이룬 이들은 곧 참담한 현실에 마주하고 만다.

그것이 절대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초월자들은 수도 없이 경쟁을 치러야만 한다. 격을 올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신화를 완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띌 만한 업적을 계속 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초월자의 신화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신화를 완성한 존재들은 언제부턴가 천마와 칠흑왕이라는 아득한 존재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굴리는 ‘굴레’에 대해서도.

이때부터는 단순히 격을 쌓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 경쟁이 되고 만다.

굴레에서 완전히 탈출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니까. 고유성과 독립성을 쟁취하고 ‘꿈’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황’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존재들이 ‘황’이라는 경지가 주는 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겪어야만 했으니.

개중에 운이 좋은 몇몇만이 무너지는 ‘꿈’ 속에서도 간신히 정체성만 유지한 채 공허를 떠돌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으로 이어졌어야 할 승화가 이뤄지지 않고, 변이가 일어나 전혀 이질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 타계(他界, 밤)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베헤모스가 되어 버린 토르가 그러했고, 레비아탄이 된 오케아노스가 그러했다.

더 이상 ‘낮’에 속하지도 ‘밤’에 들지도 못한 떠돌이들.

수장은 바로 그것을 두고 ‘짐승’이라 일컬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우마왕을 꼽을 수 있지요.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그런 모습이 되고 회한의 나날을 보냈으나, 언제부턴가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고서 깊은 침묵에 잠긴 존재. 최초의 짐승…….

-……우마왕의 존재는 이 ‘꿈’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보오.

-그분은 어느 ‘꿈’에서나 똑같이 존재하는 분이니까요. 짐승이면서 황이기도 하고…….

짐승이면서 황이라고?

그것이 가능한가 묻고 싶었지만, 수장은 굳이 거기에 대해 더 깊게 설명하지 않았다.

-최초의 짐승이라면, 최후의 짐승도 있는 거요?

-있지요.

-무엇이오?

-오효효. 오늘 이거 제가 너무 많은 걸 털어놓는군요. 이러다 밑천이 다 털릴 것 같은데……. 글쎄요. 그걸 두고 대체 뭐라고 해야 할는지. 끔찍한 혼종이니, 복합체니 하는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걸 이리 부른답니다.

-……?

-묵시룡.

-묵시룡?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요.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나 서술되는 존재인 것을요.

-계시록의……?

계시록은 토르도 익히 들은 적이 있지만, 여태 단 한 번도 정확한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던 미지의 서책.

이 우주의 시원과 태초의 비밀이 담겨 있고, 마지막 종말까지 서술되어 있다는 예언서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수록된 존재라니.

토르는 언젠가 나타날 거란 최후의 짐승이 어떤 존재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여하튼. 토르 님도, 이 자리에 계신 다른 분들도 모두 같은 짐승이니…… 같은 버려진 짐승들끼리 어떻게든 피안을 찾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럼…… 당신은 어떻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를 공허의 늪에서 구제해 준 당신도, 같은 짐승인지 묻는 거요.

-오효효효. 글쎄요?

-그럼 그대는 짐승이 아니라는 거요?

그 질문에.

수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라고도 한 적은 없습니다만?

* * *

『그렇군. 역시 짐작한 대로 너희들은 이블케의 수족들이었나?』

파아아-

산산이 부서지는 영혼의 조각들 틈 사이로.

최후의 짐승이 거대한 금색 눈을 번들거리면서 냉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내, 내가 읽히고 있다……!’

토르는 상대가 자신의 신화를 송두리째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 봐야만 했다.

‘말도…… 안 돼……!’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아 올렸던 것들이 이토록 쉽게 통째로 으스러지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해 내는 건 더더욱 납득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비록 칠흑왕의 자아-집행자(執行者)를 막아 내진 못했어도 ‘꿈’에서 독립해 이만큼 성장하면서, 연우가 잠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그를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오만에 불과했다.

이미 상대는 자신의 본질마저 전부 꿰뚫어 보고 있음이니.

이것을 대체 떨쳐 내야만 하는 건지.

토르로서는 도저히 길이 보이질 않았다.

도주를 하려 해도 일단 이 물린 것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네놈부터 먹어 치우고 나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 네놈들이 뭘 바라는지,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말이야.』

그 순간.

토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활발하게 작동합니다!]

[사라진 ‘꿈113,223,188,489’의 대적자가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해당 대상의 신화가 적정치 수준을 훨씬 초과하였습니다.]

[현자의 돌(오만·식탐·색욕)이 ‘오만’의 성질을 드러내며 강제로 저항을 분쇄하고자 합니다! 적정 범위를 강제로 확장합니다!]

[‘오만’이 기승을 부립니다!]

[‘오만’이 기승을 부립니다!]

……

[현자의 돌(오만·식탐·색욕)이 ‘식탐’의 성질을 드러내며 포악하게 활동합니다!]

[현자의 돌(오만·식탐 색욕)이 ‘색욕’의 성질을 드러내며 해당 대상의 저항심을 무력화시키고자 합니다!]

꾸우우우!

토르의 목덜미가 절반 이상 물어 뜯겼다. 구슬픈 비명 소리가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근방에 있던 은하가 통째로 흔들렸지만, 연우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투였다.

본체 현신은 그로서도 상당한 부담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바. 막대하게 소모된 인과율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토르를 이 자리에서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토르의 몸뚱이 위를 잠식해 나갔다. 까맣게 변한 녀석의 신체 위로 균열이 퍼지면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던 그때.

『왔군.』

콰르르릉!

무언가를 감지한 연우의 금색 동공이 위쪽으로 향했다.

[사라진 ‘꿈9,191,563,025,412’의 대적자가 출현했습니다!]

[이번 ‘꿈’에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업데이트된 사항을 반영하여 해당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갱신합니다.]

새로운 벼락이 떨어지면서 베헤모스와 똑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새로운 짐승이 떨어졌다.

지즈.

베헤모스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나타난다는 세 짐승 중 하나. 거대한 날개를 갖춘 괴조(怪鳥)의 형상이었다. 단, 풍기는 위격은 토르보다도 훨씬 더 컸다.

콰아앙!

지즈는 토르를 도와주려는 건지 연우의 목덜미 쪽으로 매섭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부리가 단숨에 두꺼운 비늘을 뚫을 듯했다. 누가 봐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하!』

연우는 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일단 물고 있던 목덜미를 송두리째 뜯으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아가리가 젖혀졌다. 공허가 수북하게 담긴 식도가 훤히 드러나면서 검붉은 숨결이 토해졌다. 역시나 종말에나 나타난다는 겁화(劫火)가 가득 담긴 숨결.

지즈는 황급히 날갯짓을 하면서 높이 떠올랐다. 아슬아슬하게 숨결이 그의 발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지즈는 속으로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일단 토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낸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속도라면, 아무리 묵시룡이라고 해도 절대 쫓아오지 못할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연우가 이쪽을 주시한다 싶더니 크게 날갯짓을 하면서 단숨에 이쪽까지 쫓아왔던 것이다. 도망쳐 보려 했지만, 상승하는 겁풍(劫風)을 타고 따라붙는 연우는 그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결국 지즈의 날개 한쪽이 연우의 아가리에 물려 뜯겼고, 고통에 찬 괴성이 우주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놓으라면서 뾰족한 부리로 연우의 안면을 연거푸 찔러댔다.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도 어떻게든 연우를 떨쳐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 토르가 연우의 뒷다리 쪽으로 달라붙었다.

묵시룡과 두 짐승이 한데 뒤엉키면서 광란을 부렸다. 떠밀려 난 암흑물질이 행성들과 뒤엉키면서 자전 궤도가 흐트러지고, 항성들이 잇달아 폭발하면서 빛무리가 번졌다.

[사라진 ‘꿈127,394,564,081’의 대적자가……!]

[사라진 꿈의……!]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

[업데이트된 사항의 반영이 자꾸 늦춰지고 있습니다.]

[현재 출현한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이뤄지질 않아 세계의 법칙이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경고! 법칙의 붕괴 위험도가 커지고 있습니다. 인지되지 않은 대상들을 서둘러 제거하십시오!]

[경고! 세계에 가중되는 영압(靈壓)이 허용치를 훨씬 초과하고 있습니다. 엔트로피 붕괴가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변수를 빨리 제거하십시오!]

[경고! 해당 대상을…….]

……

[종말이 일부 벌어집니다!]

[종말이 일부 벌어집니다!]

지즈 말고도 여러 짐승들 두세 마리가 잇달아 출현하면서 연우에게 다닥다닥 붙었다.

그만큼 우주도 금방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크오오오!

연우의 포효도 우주 전역으로 퍼지던 그때.

[정보를 읽어 들일 수 없는 존재가 출현합니다!]

여태껏 출현하던 짐승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압이 위쪽에서부터 떨어졌다.

목표는 연우의 정수리 위였다.

콰아아앙!

은하를 통째로 지울 만큼의 폭 발이 일어났다. 막대한 충격과 함께 블랙홀이 생성되면서 모든 먼지들을 송두리째 빨아들였다. 폭발을 미처 피하지 못해 부서진 짐승의 조각들이 그 속에 섞여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를 마친 연우가 누군가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오효효효! 딱히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요.”

이블케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연우도 그를 보며 똑같이 웃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블케는 진심으로 반가움에서 비롯된 웃음인 데 반해 연우는 냉소에 가깝다는 점이었지만.

“나는 만나고 싶었다만.”

“그런가요? 이런! 제가 차연우 님께 그렇게 가까운 존재인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자주 찾아서 인사를 드릴 걸 그랬나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오늘은 저와 제 사람들이 따로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하고, 나중에 따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연우의 냉소가 짙어졌다.

“앞으로 계속 내 그림자 속에 처박혀서 보게 될 텐데.”

[권능, ‘그림자 영역’이 확장을 시도합니다!]

[권능, ‘연옥로’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릅니다! 겁풍이 뒤섞인 겁화가 맹렬하게 불탑니다!]

「꺄호-!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용, 이블켕!」

라플라스의 의지에 따라 불길을 머금은 그림자가 뱅글뱅글 맴돌며 이블케를 잡아 가는 한편.

스퀴테는 다시 태극혜 반고검에 따라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블케를 난도질하기 위해서였다.

콰릉, 콰릉, 콰르르르-

콰콰콰콰!

토르를 비롯한 짐승들 따위는 여럿 찢어발길 정도로 강한 화력이었고, 막대한 인과율이 담긴 공격이었지만.

이블케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한쪽 팔만 움직이면서 그런 공격들을 죄다 튕겨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폭발로 상처를 입은 다른 짐승들을 거둬들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미 무술 실력만 따져도 무왕과 가까운 반열에 오른 연우를 상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크게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까지 뒤섞여 있었으니.

쿠릉, 쿠르르르-

그렇게 한참을 접전을 벌이다, 연우는 이블케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너…… 대체 어떻게 제천류를 쓰는 거지?”

제천류.

제천대성 미후왕이 탄생시키고, 천마의 손에 완성되었다던 기예. 연우도 미후왕의 허물로부터 익힌 적이 있었기에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블케가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자신의 시그니처 스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 제가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가요?”

이블케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히죽 웃었다.

“저 역시 원래 천마의 얼굴들 중에 하나였단 것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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