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33화 (733/862)

8화. 다른 꿈 (5)

『……뭐라고?』

연우가 처음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크로노스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멀찍이 떨어진 다른 짐승들도 처음 듣는 말이었는지, 그들로부터 혼란 가득한 사념이 잔뜩 풍겨 왔다.

천마의 얼굴이라니!

사실 연우가 그동안 만난 천마의 얼굴이라고 해 봤자, 미후왕의 허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미후왕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짐작하기 힘들어했다.

단순한 사념체만 해도 당시에 깊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본체라면 오죽할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천마의 얼굴이라고 해서 전부 다 뛰어난 건 아닐 것이다.

려라는 미지의 존재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러 전생(前生)들을 뭉뚱그려 ‘얼굴’이라고 표현할 뿐이니, 개중에는 농부나 어부처럼 평범한 삶도 있었을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영혼의 격이나 잠재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어떻게든 두 각을 드러냈을 게 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따지자면.

이블케가 천마의 얼굴이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오홍홍! 만약에 그렇다면 그동안 이블케에게 가졌던 수수께끼들도 꽤 많이 풀리는데용? 탑의 최초 관리자였던 것도 그렇고,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도 그렇고…… ‘황’ 급의 낙오자들을 저렇게 줍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말이죵!」

라플라스는 이블케를 구속하려다 튕겨 나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죵? 천마의 얼굴이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지금은 저렇게 멋대로 하고 다닐 수 있는 거죵?」

알려지기로, 천마의 얼굴들은 대개 자유분방한 성격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우가 보았던 천마나 미후왕의 허물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그들 모두 어딘가에 얽매일 만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가지고 있으며, 그만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병적인 집착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운명 혹은 숙명(宿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최초의 불꽃지기였던 려에서부터 내려온 일종의 굴레였다. 천마의 영혼을 타고난 존재라면, 절대 이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블케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 보였으니.

만약 그가 정말 천마의 얼굴이라면, 이렇게 천마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출신이라는 거지,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저고 천마는 천마일 뿐이지요. 그 차이는 아주 크니 착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오효효!”

이블케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가 유달리 짙었다.

저 말은 더 이상 천마의 영혼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걸까?

아니면 미후왕의 허물처럼 원래 ‘이블케’라는 존재가 있었고, 그가 남긴 사념체라는 뜻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콰르르릉!

이블케는 제천류 오행공 중 뇌벽세를 크게 터뜨렸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수많은 빛줄기가 감옥처럼 촘촘하게 좁혀 오자, 연우는 재빨리 스퀴테를 허공에다 크게 흔들어야만 했다.

따다다당!

콰릉, 콰릉, 콰르르-

수도 없이 빚어지는 충격파 속에서 인지 영역이 복잡하게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여간 인사는 이만하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여러분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랍니다.”

“누구 맘대로!”

연우는 이블케 뒤편으로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친 짐승들에게로 그림자가 촉수를 뻗고 있었다.

저건 다른 ‘꿈’의 조각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 몸을 숨기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놓칠 연우가 아니었지만.

“오효효효! 당연히 제 맘대로지요.”

이블케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

삐이이이-

연우는 녀석에게로 축지를 펼치려다 말고, 한순간 시야가 뱅그르르 돌아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사라진 꿈의 편린이 증식을 시도합니다!]

[침식이 이뤄집니다!]

[‘꿈’이 내려옵니다!]

……

[경고! 세계 인지가 흩뜨려지고 있습니다! 저장된 데이터들이 혼선을 겪습니다. 백업된 클라우드와의 연결이 불안정해집니다.]

[원인을 찾아 제거하세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길게 이어질 시, 세계를 유지하는 데 커다란 부담이 미칠 수 있습니다!]

[경고! 다른 ‘꿈’과의 혼용으로 인해 법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데아에 노이즈가 찾아왔습니다!]

……

[천안통이 흐트러집니다!]

[천이통이 불발됩니다!]

노이즈가 꼈다. 시야뿐만 아니라, 정신이 통째로 흔들렸다. 우주 곳곳으로 뿌려 뒀던 인지 영역이 이리저리 흩뜨려지면서 모든 정보들이 가공되지 않고 들쑥날쑥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디인가.

연우는 한순간 자아까지 놓칠 정도였다. 분명히 지옥 같던 ‘꿈’에서 벗어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 속에 갇힌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멀미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잠에서 덜 깬 것만 같았다.

비몽사몽(非夢似夢).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특성, ‘열광’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연우야? 연우야!』

칠흑왕의 주된 자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느낀 것이기에 연우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냉혈 특성이 진화하면서 만들어진 열광 특성을 이용해, 재빨리 의식을 되찾아 자아를 온전히 수습할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을 뻔한 순간도 끽해야 단 0.1초도 안 되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블케 등은 이미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남을 정도였다.

‘방금 그건……!’

연우는 많은 게 혼란스러웠다.

방금 전에 자신이 겪었던 건 분명히 칠흑왕의 세계, ‘꿈의 본질’에서 수시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천마의 얼굴이 어떻게 칠흑왕의 힘을 사용하는 거지?’

더군다나 더더욱 혼란스러운 건.

[칠흑왕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자아를 바라봅니다.]

계속 깊은 잠에 들어 있었어야 할 칠흑왕이 모종의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주 자아에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저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역시 놈에게는 뭔가가 있어. 반드시 잡아야 해.’

연우는 이를 악물면서 축지를 다시 밟으려 했다.

『어딜 가려고!』

그러던 그때, 크로노스는 연우를 당장 붙잡았다. 이상하게 연우의 체온이 싸늘하게 떨어져 있었다. 비늘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쫓아야죠!”

『이런 몸으로 대체 어딜 가겠다고!』

“그러니 더 쫓아야 합니다, 아버지. 그놈들이 계속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두면 단단히 꼬일 게 분명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젠장!』

크로노스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연우의 ‘감’이라는 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인상을 팍 찡그려야만 했다.

『놈이 어디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사라진 꿈의 조각으로 기워 놓아서 읽을 수도 없지 않느냐!』

“녀석이 놓친 게 있습니다.”

연우는 주먹을 활짝 펼쳤다.

끼아아-

고통에 찬 망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주선석!』

제우스의 사도, 김범승은 두 개의 주선석을 가지고 이블케에게로 되돌아갔다. 연우는 이블케가 꿈의 조각을 여는 동안, 정신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 좌표를 정확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예. 방금 전에 얼핏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정말이지…… 한시도 마음 편히 쉬는 날이 없구나.』

연우가 잠에서 깨어난 뒤로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크로노스로서는 계속 강행군을 거듭하는 아들이 걱정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더 이상 지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절교’의 본영, ‘금오도’에 입장하였습니다!]

『뭐? 절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의 메시지.

연우는 재빨리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았다.

[‘절교’의 악마들이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를 인식합니다!]

[궁기가 당신을 인식하고 당혹해 합니다!]

[도올이 더 큰 전쟁을 벌이려는 것인지 당신의 저의를 의심합니다!]

[거라건타가 새로운 침입자의 출현에 등골을 바짝 세웁니다!]

……

[혼돈이 반갑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

[‘절교’의 수장, 통천교주가 눈을 좁히면서 당신을 응시합니다!]

수많은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 * *

[신의 사회, ‘데바’가 항복 의사를 밝혔습니다!]

[아그니가 쥐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오열에 잠깁니다.]

[바루나가 참담한 심정에 두 눈을 질끈 감습니다.]

[쿠베라가 더 싸울 수 있노라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

[바유가 드디어 자신의 설득이 통했다며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쉽니다.]

[정벌이 완료되었습니다!]

『우리를…… 이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데바의 수장, 크리슈나는 무릎을 꿇은 채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레스를 바라봐야만 했다.

연우가 전면전을 개시한 직후.

아레스를 포함한 제1군단은 서전도 없이 곧장 데바를 들이쳤다. 연우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잘 알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전면 전을 치렀던 것이다.

물론, 그들을 정벌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데바 역시 올림포스와 함께 천계 내에서 손꼽히는 세력에 속했으니까.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신들의 숫자도 상당하며, 각각의 격도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세력 구도가 연우가 집권을 하기 전에나 통했다는 점이었다.

연우는 이미 ‘황’ 급에 다다랐을 정도로 뛰어난 격을 지녔고, 자연스레 그가 다스리는 올림포스의 전력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연우로부터 직접 힘을 전달받는 사도들의 힘은 기존 대세력의 주신들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커졌으니.

더구나 올림포스는 지난 십 년 동안 ‘밤’과의 최전선에서 싸운 전력이 있었다.

그깟 십 년쯤이야 신들에게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할지 모르나, 정작 올림포스 신들은 그 시간 동안 죽을 위기를 숱하게 넘겨야만 했다. 그만큼 ‘밤’과의 싸움은 아주 치열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올림포스 신들은 뛰어난 신화를 쌓을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개개인이 일당백이라 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전부 상향 조정되었으니.

탑에서 겨우 몸만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데바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데바는 압도적인 전력 차 앞에서 끝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정벌군의 군단장을 맡고 있던 아레스는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면 절대 받아 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으면서, 데바는 결국 굴욕적인 백기 투항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 대한 생사 여탈권은 물론, 사회의 존폐 여부조차 전부 아레스 손에 들어간 것이다.

“글쎄. 거기까지 생각해 본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냥 막내 삼촌께서 까라고 하시니, 조카된 입장에서 그냥 까는 수밖에 더 있었겠나?”

아레스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원래부터 타고난 호전광이었던 그니, 탑에서만 해도 올림포스와 줄곧 비교가 되곤 하던 데바를 이렇게 꺾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

크리슈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패전한 입장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비아냥밖에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당신들을 본격적으로 재판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지. 막내 삼촌이 이건 꼭 물어보라고 해서.”

『뭐…… 냐?』

칠흑왕의 자아가 물으라고 했다고? 크리슈나는 무슨 질문이 나올까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아레스의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브라함. 아니, 브라흐마가 과거에 이곳을 박차고 나간 이유가 뭐야?”

『그, 그건 자신의 발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크리슈나는 허를 찔린 듯 말을 더듬었다.

아레스는 그 모습에서 뭔가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허리를 크게 잘랐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도 브라흐마가 제 발로 나온 거긴 해. 하지만 우리 막내 삼촌의 추측으로는 분명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시거든. 그런데 그걸 알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건……!』

“물론, 거짓말하다 걸리면 줄줄이 초상나는 거 알지?”

『……!』

크리슈나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럴수록 아레스의 압박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뭔데?”

『그……!』

크리슈나가 결국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신의 사회, ‘멤피스’가 투항 의사를 밝혔습니다!]

[신의 사회, ‘아베스타’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

데바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들의 항복 메시지가 줄줄 떠오르는데.

유독 다른 한 줄의 메시지가 아레스의 눈에 크게 들어왔다.

“으음?”

[제8군단이 토벌에 실패하였습니다!]

[동맹군, ‘천교’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절교’가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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