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34화 (734/862)

9화. 다른 꿈 (6)

여러 메시지들 속에서.

연우는 의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천교주?

‘공석이…… 아니었나?’

오래전. 연우가 영귀로부터 려의 조각을 받아 창공 도서관을 찾았을 당시, 절교는 계시록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연우에게 통천교주직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원래는 희발이라는 걸출한 여장부가 있어 수많은 요신(妖神)과 마왕(魔王)들을 한데 휘어잡았다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그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다시 찼을 줄이야!

자신이 없는 십 년 동안 새롭게 권력을 휘어잡은 자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연우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인지 영역에 걸려드는 건 절교의 악마들이 보내는 시선만이 아니었다.

금오도의 영역 바깥.

무언가가 있었다.

팟!

재빨리 그쪽으로 축지를 밟아 이동하니 황량하게 변한 들판이 드러났다.

원래는 산들바람이 살살 부는 낙원이었을 그곳은 여러 격전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으니.

곳곳에 부러진 병장기들과 신력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수많은 신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천교’의 이랑진군이 칠흑왕의 자아를 발견하고 안색이 어두워집니다.]

[나타태자가 칠흑왕의 자아가 강림한 것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쉽니다.]

[벽력자가 저자가 칠흑왕의 자아냐고 이랑진군에게 묻습니다.]

[이랑진군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

[‘천교’의 모든 신들이 칠흑왕의 자아를 차마 제대로 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천교.

한때, 올림포스와 동맹을 맺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

다른 사회들이 르’뤼에에 관심을 표시했을 때, 니플헤임과 더불어 유이하게 그쪽으로는 관여를 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우가 천계와 전쟁을 치르겠다고 마음을 먹자, 곧장 동맹 관계를 복구하고 정벌군에 합류해서 절교로 침입을 시작했었을 텐데.

설마 그들이 패배를 할 줄이야.

거기다 주변에 남은 흔적들을 보면 거의 완패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다.

절교의 전력이 악마의 사회에서도 단연 우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였던가?

게다가 천마가 지금의 자리에 앉기 전에 한창 다투었던 곳이 천교였을 정도로, 그들의 전력도 올림포스를 제외하면 거의 최고로 꼽힐 만할 텐데…….

분명 전쟁을 개시할 때까지만 해도, 절교가 계속 협상을 원한다는 둥 약한 소리를 해 대기에 이쪽이 유리한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일종의 함정이었던 모양이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갔어. 여기도 짐승…… 이 있나?’

분명히 처음에는 전력 차가 비슷했던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존재가 등장하면서 균형추가 절교 쪽으로 확 기운 것 같았으니. 곳곳에 남아 있는 파괴의 흔적과 달린 흔적 따위가, 거대한 무언가가 전장을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짐승.

이블케 등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비슷한 종이 나타난 게 분명했다. 연우는 그것을 이블케 일당과 절교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숨은 건지, 여기서 흔적은 완전히 끊어져 있는데. 절교를 미끼로 던져두고 뒤로 내빼겠단 건가?’

연우는 다시 축지를 밟았다. 천교 쪽이 아닌 그 옆에서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이들 쪽으로.

이블케 일당을 쫓고 싶었지만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춘 데다가, 아무래도 지금은 이쪽을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제8군단. 헤르메스를 포함한 올림포스의 신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못 보일 꼴을 보인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면목 없다는 듯한 말투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테나와 마찬가지로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신력을 허락받은 그가 아니던가.

이제는 주신들 중에서도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헤르메스는 꽤나 많이 다친 것처럼 보였다.

전신이 생채기로 가득한 데다가, 한쪽 팔이…… 날아가고 없었으니까.

물론, 신력이 따르는 한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보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큰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래서 연우는 거두절미하고 이유부터 물었다.

오히려 이런 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해 주는 게 좋았다.

헤르메스도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아주 잠깐 희미하게 웃다가 곧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통천교주…… 가 돌아왔습니다.”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돌아와? 생긴 게 아니고?”

“예.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원래의 통천교주가 돌아왔습니다. 있는 줄 알았더라면 이리 쉽게 달려들지 않았을 텐데……. 삼신장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당해 내질 못하더군요.”

“그 정도였나?”

연우는 여기서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랑진군, 나타태자, 벽력자.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무신이었던 그들 셋의 합공을 막아 내는 건, 아마 비마질다라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건가?’

비마질다라가 연우에게 자극을 받아 독립을 하긴 했어도, 원래는 절교의 소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세 아수라왕들과 마찬가지로 ‘사왕(四王)’이라는 직함에 묶여 있었고.

절교에는 사흉(四凶)이니 십천군(十天君)이니 하는 강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만큼 성격도 제멋대로인 그들을 제압하고, 별다른 분란 없이 통솔하는 건 그만큼 뛰어난 위격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연우가 알기로, 여러 차례 진통을 겪었던 천교와 다르게, 절교는 그동안 이렇다 할 커다란 내홍이 없었다.

그만큼 통천교주의 입지가 단단하단 뜻일 테지.

그리고 그만한 업적을 세웠던 원주인이 되돌아왔다면…… 절대 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너까지 가세한 공격을 막을 정도는 아닐 텐데?”

그래도 연우가 걸리는 점은, 어쨌거나 그런 통천교주도 ‘황’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감지되는 것으로도 격이 약했다. 근접했을지는 모르지만, 된 것과 되지 못한 것에는 차이는 아주 컸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세하고 나서는 그래도 조금씩 승기를 이쪽으로 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

헤르메스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쿠쿠쿠쿠!

갑자기 대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연우와 헤르메스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쏠렸다. 올림포스 신들과 천교의 군사들도 똑같이 저마다 병장기를 쥐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의 얼굴에는 비장함이나, 공포가 어려 있기도 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을 가늘게 좁히는데.

[‘삼왕’이 집단 강림합니다!]

[‘사흉’이 집단 강림합니다!]

[‘십천군’이 집단 강림합니다!]

……

[통천교주가 강림합니다!]

[‘절교’에 소속된 모든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벼락이 튀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검은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절교의 전력들이 나타났다.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좌측.

딱 보기에도 막대한 투기를 흘려대는 세 명의 마왕들이 있었다.

해와 달을 가리는 나후.

해일을 일으킨다는 거라건타.

싸움을 사랑한다는 바치.

비마질다라와 함께 아수라라는 투귀(鬪鬼, 싸움 귀신)들을 하나로 묶고, 그중에서도 단연 제일 앞자리에 선 이들.

그리고 우측에도 그들에 못지않은 이들이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 아수라왕이 살벌하다면, 이들은 흉포했다.

도철 삼묘.

궁기 공공.

도올 곤.

그리고 혼돈 환두.

현재 우주가 탄생하고, ‘굴레’가 구르기 직전. 수미산이라는 태초의 씨앗이 아직 꽃을 피우기 전에 수많은 왕들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패배를 하여 결국 도주를 해야만 했던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네 가지 죄, 사죄(四罪)로부터 힘을 얻어 마침내 초월을 이뤘으니.

[혼돈이 오랜만에 만난 칠흑왕의 자아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냅니다.]

그중 연우와 어느 정도 인연이 있었던 혼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연우가 골랐던 네 개의 권능 중 하나였던 〈무면목 법서〉.

부-파우스트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던 그 권능의 주인이 녀석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뒤로 간간이 메시지만 보낼 뿐, 언제부턴가 그런 메시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터라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었나 싶었는데. 보아하니 큰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헤르메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자입니다. 통천교주에게 직접 휴전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구요.]

헤르메스는 직접 육성으로 말을 해서는 안 좋을 거라 여겼는지, 시스템을 이용해 의사를 전달해 왔다.

연우는 의외라는 얼굴로 혼돈을 보았다.

[혼돈이 칠흑왕의 자아의 인사를 기다립니다.]

[혼돈이 칠흑왕의 자아가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자 시무룩해합니다.]

“……?”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반응.

연우는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무슨 말을 하려는데.

『혼돈. 장난은 거기까지 해라. 더 이상 사기를 흐려지게 만들면 용납지 않아.』

삼왕과 사흉의 사이에서, 한 존재가 손을 조용히 들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대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토록 강한 존재들이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녀의 존재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백색 동공과 검은자위를 한 독특한 눈에 넝마처럼 헤진 날개를 달고 있는 여인.

통천교주 발.

『전에도 분명히 말했을 텐데? 칠흑과는 인연을 맺어서 그리 좋을 게 없다고. 실제로 지금처럼 이런 일이나 벌어지고 있잖느냐.』

[혼돈이 통천교주의 질책에 어깨를 아래로 축 떨어뜨립니다.]

연우는 자신을 한껏 노려보고 있는 통천교주를 마주 본 후에야, 그동안 어째서 혼돈이 자주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통천교주는 자신에게 강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주신이자, 칠흑왕의 여러 자아 중 하나여. 이곳은 그대의 대지가 아니노라. 그대 휘하의 군을 데리고 떠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통천교주가 칠흑왕의 자아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새롭게 벌어질지 모르는 전투에 전의를 불태웁니다.]

연우는 어이가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신들이면서도, 일방적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한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한 뻔뻔한 말투가 짜증 나기만 할 뿐이었다.

“……주군.”

하지만 헤르메스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연우는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자신만 있다면 모를까, 여기는 올림포스 신과 천교의 신들도 수두룩하게 많았다.

또다시 전쟁이 벌어져서야 이미 패색이 짙은 이쪽의 피해만 더 커질 뿐이었다.

거기다 혼돈이 직접 나서서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일단 여기서 물러났다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난 뒤에 뒷일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굽힐 수는 없는 노릇.

“물러나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럼……!』

“하지만 그보다 너희들이 숨기고 있는 이블케 일당의 신병을 받고 싶은데.”

『이블케?』

그런데 이상하게 반문을 던지는 통천교주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투.

혹시 기만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사흉, 도올이 그녀의 귓가에다 뭐라고 입술을 달싹였다.

통천교주는 묵묵히 그걸 듣고 있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일전에 찾아왔던 짐승 놈들을 말하는 것인가? 하! 그 떨거지들과 무슨 충돌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그들만 넘긴다면 조용히 물러나지. 이 뒤로 절교의 죄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통천교주는 팔짱을 끼면서 오만한 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군.』

“뭐?”

『우리네 쪽의 손님들이 아니라서. 그쪽으로 가서 찾아라.』

연우가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소리치려는데.

별안간 통천교주가 허공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우마왕! 내가 분명히 귀찮은 꼬리들은 달고 오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런다면 협력 따윈 더 이상 없다고!』

‘우마왕?’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가 왜 지금 갑자기 언급되는 거지?

[‘절교’의 요청에 협력 관계인 ‘마군(魔軍)’이 응답합니다!]

‘마군이라고……?’

그 순간.

“푸하하하! 이거이거 아무래도 여왕님이 뿔이 단단히 나신 모양이로군. 흐흐흐.”

연우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했다.

[헤르메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들입니다. 저희를 패배케 만든 존재가.]

먼지구름이 거칠게 휩쓸고 지난 자리.

특색 있는 모습을 한 여섯 명의 남녀가 도도하게 서 있었다. 특히 그중 중심에 있는 존재는 일찍이 연우가 만났다가 놓친 자였으니.

이름도, 생김새도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저런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사람이 어디 또 어디 있으랴!

붉은 머리칼을 마치 사자 갈기처럼 흩뜨린 사내.

“사타왕!”

동주칠마왕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리고.

『……뭐야, 저 노인네가 왜 저기 있어?』

그림자 속에서.

여태껏 깨어난 뒤로 한 번도 의지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미후왕의 허물이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은 동주칠마왕 중에서도 가장 뒤쪽에 있는 한 노인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연우도 그의 격을 읽고 인상을 굳혔다.

‘설마, 저 사람이?’

『어. 우마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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