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36화 (736/862)

11화. 다른 꿈 (8)

돌원숭이. 필마온. 미후왕. 제천대성. 손행자. 투전승불…….

다양한 별칭만큼이나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고, 그만큼 수많은 업적과 신화를 쌓았던 존재.

천마의 얼굴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손오공’이란 이름은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그는 유명 인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널리 알려진 만큼 신앙도 막대해서 격도 아주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동주칠마왕 중에서도 막내로 시작하였으나, 우마왕이 아니면 제지하는 게 아주 힘들다고 할 정도로.

다만, 그렇게 사고뭉치였던 손오공도 언제부턴가 종적이 홀연히 사라진 상태였으니.

혹자는 그가 모종의 이유로 원 뿌리인 천마와 합일을 이루어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천마가 끝내 영혼의 파편들-흔히 ‘려의 조각’이라 알려진-을 모아 초월의 초월을 거듭해 ‘황’에 다다를 수 있었노라고.

하지만 거기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천마도 굳이 거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헛소문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손오공이 또 다른 즐거움을 쫓아 정체를 숨기고 하계나 천계 어디쯤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푸하하! 그거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거지?』

미후왕의 허물이 그렇게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연우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말이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어. 정확하게는 천마가 옛 영혼의 조각들을 전부 모아서 ‘황’을 이룬 거라……. 손오공이라는 또 다른 조각을 회수한 것일 뿐이지만.』

“그럼……!”

『하지만 본체는 살아 있어.』

“……?”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굴레는 여러 차례 구르고, 거기에 따라 수많은 ‘꿈’이 있다 사라졌지. 거기선 지금 이곳 ‘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한 ‘꿈’도 있었지만, 또 전혀 생각하기 힘든 모습을 한 ‘꿈’도 있었다. 그럼 그중에 손오공이 살았을 가능성을 품은 ‘꿈’도 있지 않겠어?』

“그럼?”

『본체는 천마에게 있어 전생이기도 하지만, 스승이기도 했거든. 그러다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그대로 가져와 탑에 다 꽂은 거지. 굴레 때문에 갈수록 영지가 약해지니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하여간 이런 저런 복잡한 이유로 있게 되었다.』

“그럼 아까 그 말씀은?”

본체가 려의 무덤에 있게 된 경위를 묻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건데…… 본체는 천마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회수되지 않았던 려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거고…… 그런데 그곳을 통천 교주뿐만 아니라, 우마왕이 노리고 있다 하니! 흠!』

미후왕의 허물은 볼을 긁적였다.

『우마왕, 그 양반이나 다른 의형제들이 전부 본체의 그런 사연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거기에 붙어 있는 건지 좀 이상하단 말이지.』

연우의 두 눈이 빛났다.

“그 점을 알아낼 수 있으면 저들을 갈라놓을 수도 있겠군요.”

미후왕의 허물이 어이없다는 듯이 연우를 바라봤다.

『거기서 바로 어떻게 이간질할지부터 계획 잡는 거냐?』

“내분만큼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연우는 말을 하다가 도중에 삼켰다.

여러 짐승들과의 격전으로 인해 인과율을 대량으로 소모해야만 했으니.

이제 남은 인과율이라고 해 봤자 끽해야 2할이 전부.

짐승들을 몇 마리 삼키면서 인과율을 보충해 보려 했지만, ‘꿈’에서 낙오된 부류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보충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나마 남은 녀석들도 이블케가 전부 데려가 버렸으니.

이대로 우마왕 등과 겨뤄서야 정말 인과율이 한계점에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자중해야만 했다.

최대한 인과율을 덜 소모하는 쪽으로 저들을 도모해야 한다……. 연우는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미후왕의 허물도 그런 연우의 사정을 잘 알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을 굳이 이랑진군 등이 있는 앞에서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흠……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제천대성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이랑진군은 미후왕의 허물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손오공의 신화 중에는 천교와 다퉜던 내용도 있다. 그와 이랑진군은 사이가 나쁜 것 같으면서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묘한 관계였다.

『네가 아는 본체가, 어디 한 군데 묶여 있으라고 한다 해서 묶여 있을 존재였나?』

“하긴……. 그도 그렇군.”

그제야 이랑진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괜히 ‘돌원숭이’라는 말이 나왔겠나.

손오공은 절대 종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연우는 과거에 미후왕의 허물을 처음 만났을 때,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던 말을 떠 올렸다.

그때는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여겼었는데.

아무래도 절반 정도는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없었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딘가에서 실컷 놀고 있겠지. 그동안 좁기만 했던 탑도 부서지고 했으니 돌아다녀야지, 안 그래?』

“그럼 문제가 생길……!”

『그리고 놀고 있는 곳은 그 근방이겠지.』

“……그렇군. 확실히 그라면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에 항상 날카롭게 계산이 숨어 있었으니까.”

“오히려 뒤로 빠져서 감시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단 말씀이시군요.”

『그래.』

연우의 말에 미후왕의 허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손오공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연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 *

연우는 율과 프레지아가 있는 바이 더 테이블의 본진으로 돌아왔다.

손오공을 찾으러 가기에 앞서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퀴리날레의 유산. 어머니 레아가 바이 더 테이블에 남겼다는 금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블케 일당이 가지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어머니가 타천을 하시기 전에 남겨 두었다는 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왜?』

“요즘 들어 드는 생각입니다만…… 어머니는 어쩌면 우리가 알던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크로노스는 침묵했다.

그 역시 연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밖으로 말만 꺼내지 못했을 뿐.

“제가…… 아니, 저나 정우 중에 누군가가 언젠가 바이 더 테이블을 방문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글쎄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구나.』

크로노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동안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을 조금씩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나도 네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주 많았단다. 그때는 그렇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던 것들 중에 짚이는 게 적잖게 있구나.』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깊게 착 가라앉았다.

『내가 지구로 떨어진 것.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었다. 네 엄마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주 오랫동안 나를 찾았었구나…… 그렇게만 여기고 있었어.』

하지만 너도 이젠 알겠지만, 세상에는 우연이란 건 없더구나.

크로노스는 그렇게 뒷말을 붙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내가 지구에 왔던 건 우연이 아니었지. 칠흑이 묻었던 태엽이 그저 자석처럼 지구로 빨려 들어간 것뿐이었으니까.』

지구는 칠흑왕의 육체, 르’뤼에가 잠든 봉인지(封印地)였다. 그리고 이면의 차원에는 탑이 놓인 장소이기도 했다.

크로노스의 태엽이 지구로 떨어진 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곳에 르’뤼에가 있으니까. 칠흑왕의 사도가 갈 만한 곳이 거기밖에 더 있겠나.

『네 엄마는 그것을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연우는 언뜻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공간의 퀴리날레.”

『이 멍청한 아버지와 다르게, 네 엄마는 가문의 권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정도쯤은 충분히 유추했겠지. 그러니……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추측을 더 할 수밖에 없어.』

“……?”

『칠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도 진즉에 파악하지 않았을까?』

“……!”

『칠흑은 끈질기다. 한번 점지한 대상은 절대 놓치지 않아. 나에게서 너에게로…… 대를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

『그렇다면 방주가 탑에 있었던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연우는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의 짐작대로,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흔히 천계에서는 크로노스만이 신왕인 줄 알고, 올림포스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만 높이 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로노스의 포악한 성정이 외부로 많이 비쳤기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일 뿐.

사실 올림포스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건, 내정을 담당했던 왕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아는 왕비가 아닌 여왕이었다.

단순한 말장난 같아도, 이 차이는 아주 컸다.

부부왕(夫婦王)이었단 뜻이었고, 레아도 똑같이 실권을 쥐고 있었단 의미였다. 비록 크로노스에는 미치지 못해도 레아 역시 격이 지고했다. ‘낮’의 출신인 퀴리날레의 힘을 그만큼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현명한 그녀이니만큼, 크로노스를 미치게 만들었던 원흉인 칠흑왕에 대해 깊게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크로노스를 구제하고 난 뒤에도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미약하게나마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정확한 내용은 모를지라도, 칠흑왕의 그림자가 어떻게든 저주처럼 그들 부부를 따라다닐 거라는…….

그리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탑에 방주를 남기고, 프레지아에게 따로 퀴리날레의 유산을 맡긴 것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여태껏 어머니 레아에게 가졌던 의문들이 전부 풀렸다.

다만, 연우가 그런 내막들을 짐작하면서도 크로노스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던 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자신들을 위해 희생만 하시다가 눈을 감으셨던 어머니가 아니었나.

증오심에 불타고 있을 남편을 달래고자 스스로 격도 내다 버렸고, 또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를 칠흑의 저주를 아시고 계시면서도 내색 한번 없이 남편을 껴안고 새롭게 생긴 자식들을 보듬어 주셨다.

그동안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리고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그러면서도 어디서 맘 편하게 말 한마디 못 하셨을 그 마음이 떠오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눈을 감으시기 전에는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걸까? 조금이라도 털어놓으셨다면……!’

연우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예전에.”

연우는 말을 하다가 도중에 삼켰다.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감정 따윈 ‘꿈’들을 숱하게 헤쳐 나오면서 거의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떨림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뒤에야 겨우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예전에 물으셨잖습니까? 어머니를 왜 소환할 생각하지 않았었냐고.”

『그래.』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화아아!

“형……!”

율은 연우가 공간을 열며 불쑥 뒤에서 나타나자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환한 얼굴이 되었다가, 곧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단 것을 깨닫고 웃음을 그쳐야만 했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옆에 있던 프레지아만이 말없이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츠츠츠-

연우의 뒤편으로, 스퀴테가 해체되었다가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페페야.』

“예. 크로노스 님.”

프레지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가 남긴 것들이 있다고 했었지?』

“자식이든, 후손이든, 언젠가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열어 달라고 부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역시…….』

크로노스는 자신과 아들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

“예. 이곳으로 오십시오.”

프레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우와 크로노스를 금고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율은 떨리는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아 남았지만. 그래도 앞서 금고를 열어 본 적이 있었기에, 곧 벌어질 일들이 두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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