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레아의 유산 (1)
“허허. 그래. 이만하면 됐나?”
연우와 일행들이 모두 떠난 자리.
우마왕은 여전히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있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옆집 할아버지처럼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일제히 흠칫했다.
‘흐이익……!’
‘큰형님 심기가 적잖게 상하신 것 같은데 어쩌우?’
‘어쩌긴 뭘 어째. 다들 오늘 하루 종일 입 닥치고 조용히 큰형님 눈에 띄지 말아야지. 안 그랬다간 우리 전부가 다 갈려 나간다고!’
‘하아…… 따지고 보면 저놈도 막내 놈의 또 다른 모습이잖아? 하여간 막내‘들’은 죄다 저 모양인가?’
동주칠마왕은 저마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우마왕의 심기를 건드린 작자는 이블케였다.
천마의 또 다른 얼굴.
즉, 막내 제천대성의 다른 환생체란 뜻이었으니.
과거에 천마에게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기도 했던 그들로서는 끝없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저 얼굴이란 것들이 참 짜증 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우마왕의 결정이 이미 이렇게 난 이상, 자신들은 거기에 따라가는 수밖에.
“오효효! 이거 아무래도 제가 여러분들을 많이 난처하게 만든 모양입니다.”
쩌걱 하고 갈라진 공간의 틈 사이로 이블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고맙다며 머리에 쓰고 있던 중절모를 가슴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깍듯하기만 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가늘게 좁혀진 우마왕의 눈은 도저히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흥! 고작 그 정도 따위로 끝냈으면서 뭘 그만하면 되었단 거지? 시건방진 놈이었으니, 그걸로는 부족해! 응당 그 목을 부러뜨렸어야지!』
그때, 통천교주가 마땅치 않는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젖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좀 전 연우에게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에 이어, 지금도 여전히 연우를 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녀와 비마질다라 간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굳이 거기에 대해 지적하는 이들은 없었다.
통천교주가 아직 어리던 시절,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고 다닐 무렵에 비마질다라가 거두어 손녀처럼 돌본 일화는 천계에서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통천교주가 공석이 된 이후, 비마질다라가 반쯤 은거를 하다가 연우에게 자극을 받고 나서 별 미련 없이 절교를 박차고 나온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꿈’을 유영하고 있던 통천교주는 비마질다라의 죽음을 듣고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었으니…….
사실 연우가 우마왕 때문에 경계심을 놓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그가 빈틈을 보였다면 통천교주는 진즉에 그를 기습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우마왕은 비마질다라와는 전혀 달랐다.
“미안하게도, 우리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려의 무덤을 올바르게 잡는 것뿐이라네. 쓸데없는 데 전력을 빼놓을 생각 따윈 없다네.”
『휘하에 천마의 신도들을 거둬들였다면서? 그들의 신앙은 칠흑왕의 자아를 죽이는 것에 있지 않나?』
탑이 무너지기 전, 끝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던 천마를 등지고, 다른 동주칠마왕을 받들어 떠났던 ‘마군’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대주교 휼과 함께 복마전의 식구로 들어간 상태. 우마왕이 다스리는 ‘마경’이란 이름의 낙원에서 터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한평생 마(魔)를 외치며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평화롭기만 한 일상은 갈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복수를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들을 그런 꼴로 만든 천마는 물론, 탑에서 내쫓기게 만든 연우에게까지도.
“그건 나와 그들이 결정지어야 할 문제라네. 자네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우마왕은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고, 통천교주도 가볍게 코웃음만 칠 뿐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효효! 다들 하실 대화도 전부 나눈 것 같으니, 이만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세. 각자 하려는 목적을 빨리 수행하고 흩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옳은 생각이십니다. 다만, ‘문’을 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더 이상 노선이 꼬이면 안 되니까요. 각자가 갖기로 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제가 갖고자 하는 것은 ‘려의 조각’입니다.”
“유해일세.”
『탐욕의 돌.』
이블케의 웃음이 커졌다. 활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유달리 송곳니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다들 들어가도록 하시죠.”
짜악!
이블케가 크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 손끝에서부터 빛무리가 터졌다.
화아악!
[최초 관리자의 자격을 검사합니다.]
[관문이 통과되었습니다.]
[장벽이 해제되었습니다.]
……
[무너진 이면 세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빛무리가 가신 자리.
이리저리 갈라진 공간 너머로 비치는 광경에, 자리에 있던 절교의 악마들과 동주칠마왕 모두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이곳은 ‘탑 외 지역’입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주의! 현재 탑(오벨리스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운영이 정지 된 상황입니다. 입장 시에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주의! 이곳은 개인 사유지입니다. 버려진 지 오래되었지만, 소유주가 따로 있어 무단 침입 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
탑 외 지역!
무너지는 세계와 탑 속에서 그들 모두가 도망치듯이 빠져나와야만 했으니.
칠흑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였던 위용은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잊고자 애쓰고, 시간이 지나면서 겨우 떨칠 수 있었던 것인데.
그게 다시 드러나고 말았으니.
언제나 많은 인파들로 북적대던 탑 외 지역의 마을과 상가 구역은 모두 망가져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하늘 높이 우뚝 서 있던 탑도 당연히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곳곳에 파편으로 보이는 것들은 남아 있었으니.
이블케는 박수를 다시 한번 더 세게 쳤다.
그러자 마치 카메라가 줌 인(Zoom-In)을 당긴 것처럼 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이 원래 탑이 있던 자리를 비췄다. 돌무덤이 나타나고, 화면이 그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더니,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시커먼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이 보이고, 뒤이어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석문이 나타났다.
[숨겨져 있던 탑(오벨리스크)의 지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에 악마들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지하!
언제나 지상으로 나 있는 탑의 위쪽 층계만 생각하고, 좀 더 시야를 확장하더라도 우회로까지 보는 게 전부였던 그들로서는 설마 지하에도 공간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간 알아채지 못했던 지하야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탑 아래에서부터 칠흑왕이 올라왔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로서는 당연히 저기에 칠흑왕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걱정 마십시오. 저곳은 원래 엄연히 탑의 히든 스테이지 중 한 곳이었으니까요. 정확하게는 천마가 칠흑왕을 좀 더 확실하게 잠재우기 위해 설치해 둔 잠금장치 같은 것이랍니다.”
이블케는 그런 악마와 마왕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구에서 좀 더 생력을 끌어들여서 열어야만 했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우선 있는 대로 여는 수밖에요.”
아, 그리고 지금은 여의봉이 칠흑왕의 자아에게로 가 있다고 해도, 이곳은 엄연히 천마의 영역이니 그에게 들킬 우려도 아주 적답니다.
이블케는 그렇게 뒷말을 덧붙이면서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열쇠를 석문에다 꽂아 돌렸다.
철컥-
쿠쿠쿠!
[최고 관리자의 열쇠(子)가 사용되었습니다!]
[칠흑이 일부 투영됩니다.]
[지구의 생력이 투입됩니다.]
……
[석문이 열립니다!]
[경고! 이곳은 천마의 성역입니다! 허락받지 않은 무단 침입은 막대한 피해를 야기할…… %$#^%@[email protected]#$!]
[표기 불가.]
[표기 불가.]
……
[최고 관리자의 권한으로, 모든 안내 메시지가 강제 종료됩니다!]
치이이익!
경고 메시지가 연신 쏟아졌지만, 이블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허공에다 가볍게 휘젓자 모든 메시지창이 꺼졌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이블케는 활짝 열린 석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교의 악마들과 동주칠마왕들은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감에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이내 모두 천천히 이블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연우가 입장한 곳은 금고라기보다는 보고(寶庫)라는 단어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한때, 우주 전역을 떨쳐 울렸던 퀴리날레의 유산이 담겨 있어서 그런 걸까?
거기엔 수많은 무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연우는 이곳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디 올림포스의 보고를 보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그런 말을 했다.
언젠가 연우가 10층을 통과하고 나서, 12대신의 열쇠를 모두 모아 열었던 올림포스의 보고와 똑같은 모습.
거기서 헤르메스를 만나기도 했으니…… 당시 받았던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올림포스의 보고가 이곳을 따라 한 것이겠죠?”
『당연하지. 올림포스의 보고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어 낸 게, 사실 네 엄마였다.』
“그랬습니까?”
연우로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기에 눈이 저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당시 올림포스는 워낙에 정벌이 활발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받아 오는 공물이며 보물들이 너무 많았거든. 그것을 소속 신에게 나눠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서 아예 금고를 열어야 했지.』
연우는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 봤던 올림포스의 보고에는 단순히 올림포스의 신들이 쓴다고 하기엔 말이 안 되는 독특한 형태를 갖춘 무기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그보다…… 이런 것들에 네 엄마가 남긴 뭔가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여기일 겁니다.”
『음?』
연우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던 크로노스를 지나쳐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성화와 성물로 빼곡하게 찬 홀이 나타났다.
그곳은 궁이었다.
중앙에 난 단상에 놓인 두 개의 옥좌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하들이 도열해 있는 궁.
하나하나가 전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이었지만, 너무 생생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연우에게도 낯익은 광경이기도 했다.
크로노스의 신화 속에 있을 무렵에 봤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으니까.
크로노스와 레아가 모든 내전을 종식시키고, 처음으로 공동왕이 되어 올림포스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아직까지 어수선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싸웠던 대상과 같은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떨떠름해하는 심정이 전부 나타나 있었다.
크로노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레아의 얼굴에는 온화함이 어려 있기도 했고.
연우는 슬쩍 크로노스를 돌아봤다.
크로노스의 두 눈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크로노스는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뒤쪽에도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연우는 크로노스를 데리고 계속 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넓은 홀이 아니었다. 조금 작은 방. 두 사람의 침실이었다. 레아는 갓 태어난 헤스티아를 품에 안고 있었고, 크로노스는 그런 자신의 첫 번째 자식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당혹해하고 있었다.
“…….”
『…….』
그다음에는 둘째와 셋째인 데메테르와 헤라가 태어나 가족이 같이 행복한 피크닉을 떠난 광경이.
또 그다음에는 세 살 정도쯤 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목말 태운 채로, 역시나 아이들에 둘러싸여 안절부절못하는 크로노스와 그것을 보며 웃고 있는 레아의 모습이 있었다.
제우스와 가볍게 장난을 치는 크로노스도 있었고, 세 딸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는 레아도 있었다. 다투다가 크로노스와 레아에게 걸려 호되게 야단맞는 아이들의 모습도 있었다.
레아가 직접 빚었을 게 분명한 석상과 성화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크로노스와의 추억이 담긴 것들이었다.
혹은 그와 함께 이루고 싶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던 광경들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
연우는 아주 잠깐 동안 레아가 이곳을 만들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아 가슴이 저절로 먹먹해졌다.
이곳은 레아가 지구로 건너오기 전에 만들었던 곳. 즉, 크로노스가 마성에 완전히 젖어 폭군으로 활약하다 내쫓겼던 때에 만들어졌단 뜻이었다.
당시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공허에다 유폐시키는 등 악랄한 짓을 많이 했으니, 그에 대한 원망이 아주 컸을 텐데도 불구하고.
레아는 여전히 마음 한쪽 구석에 크로노스에 대한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을 지우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크로노스를 찾아 지구로 넘어온 것일 테지.
털썩.
크로노스도 그런 레아의 마음을 알아차렸기에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연우는 그런 아버지를 달래 드릴까 싶었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그를 남기고 보고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우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한 탁상에 한 여인이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잠들어 있었으니까.
비록 입고 있는 옷은 올림포스 신들의 그것처럼 화려했지만, 얼굴만큼은 근심의 세월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머니……!”
숨소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레아가 타천을 하기 전에 남긴 육체이리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연우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주름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파아아!
그 순간, 레아의 육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
연우는 안타까움에 어머니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입자들은 그의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뚝.
뚝.
크로노스처럼 그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떨어질 무렵.
연우는 뒤늦게 방금 전까지 레아가 앉아 있던 탁상에 쌓인 편지들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체로 정성스럽게 쓰인 편지들.
떨리는 손길로 첫 번째 편지지를 붙잡았다.
이곳을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건, 다행히 내가 무사히 그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단 뜻이겠지.
그것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미래의 자식에게 그녀가 보내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