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레아의 유산 (2)
그 순간.
파아아!
고운 입자들이 연우를 중심으로 돌개바람을 크게 그리더니, 곧 그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빛나는 빛무리.
파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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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딩 중…….]
[영상을 재생합니다.]
* * *
‘여기는……?’
연우는 갑자기 바뀐 주변을 둘러보았다.
올림포스의 대신전, 주신의 방이었다.
익숙한 장소였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세월에 큰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 엄마가 신력을 뭉쳐다가 곳곳에다 사념을 남긴 모양이구나. 대략 7, 8천 년 전쯤의 올림포스인 것 같다. 내가 타르타로스에 갇히고…… 올림포스가 탑에 유폐된 시기쯤인 것 같은데.』
그 순간, 크로노스가 옆에서 불쑥 나타나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연우는 움찔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냐? 뭔 그런 얼굴로 쳐다봐?』
크로노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투로 콧대를 높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나 울어 댄 건지, 눈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콧물 나오셨는데요?’
『뭐라? 큼큼!』
‘거짓말입니다. 합체 로봇한테 콧물이 어디서 납니까?’
『이 새끼가? 근데 뭐? 합체 로봇?』
‘툭하면 분리됐다가 합체되지 않습니까. 변신도 자유자재고. 애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
크로노스는 한순간 이 얄밉기 짝이 없는 막내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칠까 말까 갈등했다.
분명히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려는 목적인 건 알겠는데, 어째 기분이 찝찝했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하는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연우를 보고 있노라니 기가 찰 뿐이었다.
요즘 들어 아버지로서의 위신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참에 한마디 따끔하게 해 봐?
한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크로노스는 짧은 고민 끝에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봤자 본전도 못 찾게 될 게 분명했으니까.
막말로 저번처럼 합일을 이루고 나서 이상한 데(?)다 집어넣기라도 하면 자신만 손해지 않은가.
‘아버지.’
『왜?』
‘저길 보십시오.’
크로노스는 연우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심통 어린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눈이 되고 말았다.
모퉁이를 돌아 방으로 이어지는 곳. 연우가 가리킨 방향에 레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우가 흡수했던 레아의 유해와 똑같은 모습.
주신 시절의 레아였다.
그녀는 커다란 캔버스에다 붓으로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
『…….』
그 그림을 보는 동안, 연우와 크로노스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퀴리날레의 보고에서 봤던 여러 성화 중 하나였으니까.
크로노스와 레아가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
톤은 전체적으로 밝았고, 인물들의 표정에도 전부 미소가 맺혀 있었다. 행복감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화가인 레아의 표정은 그림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연우는 그 속에 깊숙하게 내재된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방에는 그 그림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다른 그림들과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부 퀴리날레의 보고에 있던 것들.
평화와 행복이 가득 담긴 작품들이었다.
레아는 이 그림을 완성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듯, 캔버스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붓질에는 힘이 가득했고, 손끝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붓 터치가 계속될수록 크로노스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레아…… 당신은 대체…….』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벙긋거리는 입술은 몇 번이나 레아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 저장되어 있던 사념이자, 환영. 레아는 자 신들을 보지 못한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봤자 닿지 못할 아우성에 지나지 않으리라.
‘누가 옵니다.’
『누가?』
‘아무래도…….’
연우가 고개를 돌린 곳. 방문이 신경질적으로 쾅 하고 열렸다.
제우스가 잔뜩 성난 얼굴로 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니!”
아들이 허락 없이 작업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레아는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숫제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어머니!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우스는 그런 레아의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먹으로 벽면을 거세게 후려쳤다.
콰르릉, 쿠르르-
그 때문에 주먹 끝에서 튀어 오른 뇌전이 작업실 내부를 잇달아 휘갈기면서 멀쩡하던 그림들이며 조각상들을 모조리 부서뜨렸다.
『저놈이……!』
크로노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그만하라며 제우스에게 달려들었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손끝은 제우스를 통과하고 말았다. 크로노스는 이를 악다물고 말았다.
반대로 연우는 언제부턴가 제우스를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것이 아무리 재생되는 과거의 사건이라고 해도, 가슴 안쪽에서부터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사념은 끝까지 봐야 한다는 생각에 화를 억지로 삭이는 중이었다.
다만, 정작 레아는 이런 광경이 너무나 익숙한 듯, 담담하게 부서지는 작품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뿌연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고.
레아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다 제우스에게로 닿았다.
그것이, 제우스를 더 발끈하게 만들었다.
“제 말이! 새로운 왕인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 짓거리들을 당장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나지막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울림이 있었다.
연우는 어쩐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따스함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목소리에는 그런 것이 일체 없었다.
담백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한데, 왜 어리석게도 이런 짓을 계속 저지르시는 것입니까! 이미 모두 끝난 일입니다!”
“그래. 끝났지.”
“한데……!”
“끝난 일이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더냐?”
“뭐라구요?”
제우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당장이라도 신벌을 내릴 듯한 모습이었지만.
레아는 여전히 담담한 투였다.
“나는 너를 살렸다.”
“무슨……!”
“하지만 그것이 네 아버지를 죽이란 뜻은 절대 아니었다.”
“……!”
제우스가 이를 악다물었다.
아버지를 권좌에서 강제로 끄집어 내리고, 그 자리에 앉은 새로운 왕.
비록 크로노스가 폭군이었기에 명분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자질을 의심하는 시선은 아주 많았다.
“그를 죽이지 않았으면요? 내쫓지 않았으면 질서가 알아서 바로 잡히기라도 했을 것 같습니까?”
“안다. 그러니 나 역시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내려온 것이 아니었더냐.”
“이이……!”
“내가 바랐던 것은 그저……!”
레아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위엄이 잔뜩 배어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한순간 수십 년의 세월이라도 맞은 것처럼 입가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아니다. 이 모든 게 다 아픈 남편을 잘 보살피지 못하고, 자식들을 보듬지 못했던 내 잘못일 뿐이지. 그래도 제우스야. 내 사랑하는 막내아들아. 부디 내 마지막 남은 소망만큼은 들어주지 않겠느냐? 너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조용히 살겠노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더냐. 한데, 이것까지 방해를 해야겠더냐?”
“…….”
제우스는 레아의 간절한 부탁에 이를 악다물어야만 했다.
사실 그는 여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레아가 크로노스를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는 건지.
제 자식들을 공허에 처박고, 분란만 일삼으며, 결국 자신의 가슴에다 대못까지 박은 사람이 아니던가!
누군가는 신왕이니 뭐니 하면서 위대했다고 표현한다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지도 않았던 행복한 일상을 억지로 떠올리며 환상에 갇혀 살기만 하는 어머니가…… 너무나 밉기만 할 뿐이었다.
제우스는 한평생 부모의 따스함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렇기에 항상 그것을 갈구하며 살았고, 어머니를 ‘위기’에서 구해 내고 난 뒤엔 드디어 따뜻한 손길과 정겨운 응원이 자신에게로 쏟아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꺾이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건 자신인데, 정작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기에 화가 났고, 서운했고,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제우스는 언제나 굴곡진 삶만 살아왔기에 그런 속내를 털어놓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떼를 쓰듯이 화를 내는 게 할 줄 아는 전부였기에 그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쾅!
그렇게 제우스가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떠난 뒤.
“나이를 먹고도 어찌 저리 아이 같기만 한지……. 하아! 어머니,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소란을 듣고 찾아온 건지, 하데스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레아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 말거라.”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뿐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더군다나 최근에는…… 천마에게도 패하지 않았습니까?”
하데스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렸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이래저래 시끄러웠던 차에, 이곳 탑인지 뭔지 하는 곳에 유폐되기까지 하니 폭발하기 직전인 듯합니다. 제우스도 상당히 민감해진 상태라…….”
“이제 바깥일은 너희들의 것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정하려무나.”
“……예. 어머니.”
하데스는 차마 뒷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지금 당신의 막내아들이 많이 아프단 사실을.
천마증인지 뭔지 하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이고, 그 때문에 가뜩이나 위태롭던 지지기반이 더 크게 흔들리는 중이라고.
그나마 포세이돈과 자신이 있어 버티고는 있다지만, 당장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어머니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레아에게 해 봤자, 그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들린다 해도 금방 잊을 것이고.
그만큼 그리움에 사무친 사람은 스스로 깨어나지 않는 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다.
『……하아.』
그리고.
크로노스는 그런 광경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지켜보니, 레아를 비롯해 자식들까지 저마다 얼마나 아픈 상처를 입고 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보다 부탁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하데스는 조용히 품에서 양피지 더미를 꺼내 레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꼼꼼하게 살피는 내내.
레아의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에서 에레보스까지, 전부 꼼꼼하게 돌아다니면서 분석한 것들입니다. 어머니의 예상대로, 탑이 박힌 자리는 원래 칠흑의 늪이 있던 자리…… 였습니다.”
“그럼 역시 이곳은…….”
“예. 천마와 칠흑왕이 서로 굴리던 ‘굴레’를 멈추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칠흑의 늪이 튀어오를 수 없도록 여의봉의 무게를 더하기 위해 우리 올림포스를 비롯해 여러 신과 악마들을 전부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레아는 그동안 이곳에서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소일거리를 하면서, 뒤로는 하데스를 통해 탑의 근원에 대해 몰래 조사를 하고 있었다.
하데스의 성역인 타르타로스와 에레보스는 천계가 아닌 하계에 있었으니, 비교적 이곳보다 조사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올포원이 본격적으로 절지천통을 이루기도 전이라,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께서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데스는 양피지를 살피기에 여념 없는 레아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아는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네 아버지는 죽었다고?”
“……티탄들도 그것을 알고 저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정지’지.”
“다릅니까?”
“다르단다.”
레아는 딱 잘라 말했다.
“칠흑은 칠흑을 잡아당긴다.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계속 끌어당기지. 네 아버지는 지금 어딘가 우주 한쪽을 돌고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어. 그게 정확하게 언젠지, 어딘지를 찾아야만 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준비를 해 둬야 하고.”
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단단한 눈빛이었지만.
하데스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가 위태롭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계속 굴러가기만 하는 우리 가족의 불운(不運)을, 앞으로 더 크게 다가올 불행(不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