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혼세팔신 (2)
『갑자기 엄마라니?』
정우의 사념체는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갑자기 웬 생뚱맞은 말을 하냐는 투로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기이한 광망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되찾았으나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태껏 그의 마음 한편에 낙인처럼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반쪽도 거기 있고.”
『……그 표현은 좀 이상한데? 아난타가 들으면 오해한다고! 하여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명 좀 해봐!』
정우의 사념체는 그동안 ‘낮’의 후계자로서 십 년이 넘도록 ‘밤’과 전쟁을 치르면서 영혼의 부재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존재(存在)라는 것은 본디 뼈대인 혼(魂)과 거죽인 백(魄)으로 이뤄진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반쪽에 불과하니, 그 존재도 반쪽 짜리에 불과하다.
비록 정우의 사념체가 지난 시간 동안 쌓은 업을 바탕으로 탈각을 이루긴 했다지만, 완전한 초월까지는 닿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주체가 될 만한 영혼이 없어 격의 상승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우의 권속인 레베카의 경우에는 진즉에 신위를 얻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우에게 존재를 기생하고 있고 원래 모시는 신이던 케르눈노스가 여전히 축복을 내려 주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 뿐.
독립된 존재인 정우의 사념체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재 골격 없이 쌓아 올린 모래성과 같은 상태라, 자칫 잘못했다간 통째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뼈대가 어디에 있는지 드디어 찾았다고 한다. 그를 되찾고 나면 차정우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로 완성될 수 있으리라.
더 이상 ‘낮’의 후계자가 아닌, 온전한 지배자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어머니까지 모시러 갈 수 있다고?
당연히 정우의 사념체로서는 눈에 불이 붙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연우는 차분하게 자신과 크로노스가 봤던 레아의 사념 기억에 대해 말해 주기 시작했고.
『…….』
정우의 사념체는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찾으러 왔단 사실에, 그는 끝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형.』
“왜.”
『대체 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걸까?』
“…….”
『형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러시고…… 이제는 어머니까지. 왜 다들 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정우 사념체의 목소리에서는 슬픔이 자꾸 묻어났다.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었더라면 오열을 터뜨렸으리라.
크로노스도 그런 정우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리면서 울적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다.
하지만.
연우만큼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아니, 어딘지 모르게 싸늘했다.
“야.”
『……?』
“말 돌리지 마라.”
움찔!
“패드립. 그거 원래 네가 게임할 때 썼던 거잖아. 근데 나한테 뒤집어씌워? 뒈지고 싶냐?”
『…….』
아주 잠깐의 적막.
그리고.
파앗!
정우의 사념체가 한순간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팟!
뒤따라 연우도 똑같이 사라졌다.
『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크로노스가 당혹과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고.
저 멀리, 하늘 날개까지 펼치면서 도망치는 정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축지를 밟으면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연우의 모습도.
『스, 스토오옵! 난 억울하다고!』
“뭐가?”
『그건 내가 아니라 영혼 새끼가 한 거잖아! 왜 나한테……!』
“그놈도 너잖아.”
정우의 사념체가 억울하다고 항변을 해 봤지만, 연우의 주먹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퍽!
* * *
“난 귀찮게 패드립 안 해. 그냥 현피 뜨자고 그러지.”
탈탈탈.
연우는 손을 가볍게 털면서 차갑게 말했다.
크로노스는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저런 걸 형이라고.』
반면에 한쪽 눈에 시퍼런 멍을 달고 만 정우의 사념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툴툴거렸다.
“억울하냐?”
『당연하지!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면 그놈한테 가서 따져.”
『…….』
정우의 사념체는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겨우 삭여야만 했다.
“아쉽단 말이지.”
『또, 뭐!』
“난 좀 더 네가 저항하기를 바랐거든. 그래도 그동안 좀 많이 세진 줄 알았는데. 깡은 많이 사라졌어.”
『씨이! 저항하면 저항했다고 더 때릴 거잖아!』
“그러니까 아쉽다고.”
『…….』
부들부들.
정우 사념체의 주먹이 크게 떨렸다.
때리고 싶다.
아무리 형이지만,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어 죽겠다!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래서야 자신만 다칠 터였다. ‘낮’의 후계자로서 전쟁을 계속 치러 왔다지만, 어디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사투를 벌였던 형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까.
아마 여기서 그가 욱하고 덤비는 것도 형이 의도한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안 넘어오나? 쳇.”
『……아빠! 형이 자꾸 저 괴롭혀요!』
결국 정우의 사념체는 크로노스를 찾아야만 했다.
크로노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째서 너희들은 나이를 먹어도 허구한 날……!』
사실 지구에 있었을 때에도 쌍둥이 아들들은 저런 식으로 많이 티격태격하는 편이었다. 한두 살 차이 나는 형제도 많이 싸우는데,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는 오죽하랴.
미스터리인 점은 저렇게 싸워 대도 우애가 좋다는 것이었지만.
그러던 그때.
멍!
『차정우의 영혼을 찾았다고?』
아가레스가 펜리르와 함께 그들 형제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해맑은 펜리르와 다르게, 아가레스의 두 눈은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몸을 데려가야지!』
정우의 사념체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넌 왜?』
『내 것을 찾으러 가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 영혼 내 거거든?』
『네놈도, 그것도 전부 내 것이니라!』
『……하아.』
멍! 멍멍!
정우의 사념체와 아가레스가 말싸움을 하는 동안, 펜리르는 연우에게 꼬리를 귀엽게 흔들면서 헥헥거렸다. 어떻게든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의미.
연우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더 좋다면서 크게 짖어 댔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나도! 나도 데려가란 말이다!』
하는 행동도 모습도 딱 떼쓰는 어린아이 같아서, 그를 뒤따라왔던 르 인페르날의 마왕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간의 경험상 이럴 때는 그냥 못 본 척하는 게 최고였다.
한편.
미카엘을 포함한 말라흐의 대천사들은 신중한 얼굴이 된 채로 빠르게 채널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말라흐에 소속된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
『미카엘, 만약 정말 저대로 헤븐윙이 영혼까지 찾게 되면 존재가 완성될 텐데. 그때는 ‘낮’의 종주권이……!』
『맞아. 지금이야 서기장의 유지가 있고, ‘밤’이라는 공동의 적이 확실하지만 만약 칠흑왕의 자아가 ‘밤’마저 종속시키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떻게 든 대비를 해 둬야 해.』
『…….』
라파엘과 우리엘의 우려에도 미카엘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피식.
연우가 이쪽을 보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라파엘과 우리엘은 허리를 쭈뼛 세워야만 했다. 분명히 그들이 나눈 사담을 연우가 알아차렸을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혼이 꿰뚫는 듯한 불안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런 시선에 미카엘만이 마주 웃을 뿐이었다.
* * *
“아테나, 여길 지키고 있어. 만약 내 쪽에서 채널링이 잠시 끊어져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이곳에서 정우의 사념체를 대신해 ‘낮’의 군영을 책임지라는 명령.
내심 오랜만에 만난 연우에게 이런저런 보고도 하고, 수고했다며 칭찬도 듣고 싶었던 아테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도 같이 따라가는 것이 보호에 집중할……!”
『미카엘을 주시하고 있어.』
하지만 곧 이어진 연우의 채널 메시지에 아테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동공이 깊게 착 가라앉았다.
『그 말씀은?』
『정우, 말라흐, 르 인페르날…… 사실 따지고 보면 공유하는 이익이나 사상 따윈 전혀 없이, 선대의 유훈 때문에 느슨한 연합을 이루고 있지. 이것도 그나마 공통된 적이 있어서 유지되고 있는 거고. 하지만 ‘밤’이 더 이상 위기가 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지 몰라.』
『……!』
『그런다면 말라흐에서 가장 먼저 움직일 거다. 르 인페르날은 그래도 아가레스에 대해 공포심은 갖고 있을지언정 충성심은 확실하니까. 하지만 놈들은 그렇지 않고. 무엇보다 애당초 절대선과 절대악이 손을 잡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그림이잖아?』
『만약에 섣부른 짓을 한다거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지체하지 않고 바로 손쓰겠습니다.』
연우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는 미카엘이 어떤 꿍꿍이가 있어도,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별다른 확신도 없이 섣불리 움직일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감시를 해 두는 건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렇게 아테나에게 뒤를 부탁하고.
연우 일행은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 선상으로 한쪽 발을 밀어 넣었다. 오래전, 스퀴테를 만들기 위해 크로노스의 신화에 들어갔을 때에 칠흑을 유영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아마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원래 우라노스 치하 시절의 올림포스가 다스리던 영역이기도 했으니까. ‘낮’과 ‘밤’이 한창 전쟁을 벌이던 우주 창생 초창기의 장소…….
[‘밤(녹스)’에 입장하였습니다!]
[법칙이 전부 어그러집니다.]
[천안통과 천이통이 발동됩니다. 흔들리는 감각을 바로잡습니다.]
[올바른 인지가 이뤄집니다.]
……
[세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아……! 이 빌어먹을 곳은 들어올 때마다 너무 엿 같은데.』
정우의 사념체는 피부를 파고드는 감각에 신경질적으로 손을 세게 털었다.
전쟁을 벌이면서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다지만, 평생 익숙해질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존재를 탐식하고, 법칙을 어그러뜨리는 힘만큼 신격에게 불쾌한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아가레스나 펜리르도 마찬가지였는지, 하나같이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차하면 곧장 마기를 개방할 준비도 마쳐 있었다.
그들의 경계 어린 눈초리는 ‘밤’의 영역 곳곳에 산재한 여러 시선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꾸우우우-
웅, 우우웅!
[‘오염된 근원’이 위대한 아버지의 등장에 고개를 조아립니다!]
[‘태어나지 못한 존재’가 저것은 아직 아버지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외부 세계의 대기자’가 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버지와 비슷하니 동일 존재로 봐야 하지 않겠냐며 의문을 던집니다!]
[‘유치한 영혼의 눈’이 번잡한 논란에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눈만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핍니다!]
……
[‘밤(녹스)’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에 대한 대응책을 완전히 수립하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합니다!]
[‘춤추는 녹색의 불길’이 우선 대화를 해 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세웁니다!]
[‘별에서 온 어둠’이 타당한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피에 젖은 신’이 ‘춤추는 녹색의 불길’에게 긍정을 표합니다!]
……
[‘밤(녹스)’에 존재하는 모든 시선이 갑자기 출현한 칠흑왕의 자아에게로 쏠립니다!]
원래대로라면 사방에서 정제되지 않은 사념의 파도가 물밀 듯이 쏟아졌을 테지만.
이미 연우가 이룬 격은 그들보다도 훨씬 높고, 무엇보다 ‘밤’의 근간에 가까워졌으니 저들의 의사를 쉽게 이해할 정도는 되었다.
여전히 정우의 사념체 등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밤’을 지배한다는 외신들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다는 혼세팔신이 나서니 혼란이 많이 잦아드는 모양새였다.
다만, 연우의 머리 위로 녹색의 불길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마치 ‘나 잘했죠?’하는 느낌을 풍기는 건 그만의 생각인 걸까.
그러던 그때.
[‘경계의 거주자’가 눈을 뜹니다!]
혼세팔신의 최고 서열이자, ‘밤’의 우두머리인 존재가 나타났다.
마치 문이 열리듯이, 거대한 동공이 ‘밤’의 암흑을 밀어내면서 연우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정우의 사념체와 아가레스 등이 화들짝 놀라면서 경계 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가 손을 뻗어 그들을 제재했다.
경계의 거주자도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들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듯. 연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 셨. 습.
“말했을 텐데. 곧 찾아올 거라고.”
연우는 숨기지 않고 자신의 격을 완전히 개방했다. 지금부터는 이들에게 칠흑왕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우르르!
‘밤’을 이루는 모든 공간이 흔들렸다. 옆에 있던 정우의 사념체 등도 긴장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밤(녹스)’의 모든 존재들이 칠흑왕의 자아를 경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눈을 크게 뜨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 리. 는. 아. 직.
당. 신. 에. 대. 한. 선. 택.
못. 내. 렸.
연우를 아직까지 인정하지 못한다는 내용.
팔짱을 낀 연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지?”
당. 신. 은. 완. 전. 못. 하.
종. 말. 을. 막. 고. 있.
자. 격. 부. 족.
연우가 아직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되지 못했고, ‘꿈’을 닫는 것 마저 미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날 인정 못 하겠다는 건가?”
연우는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바짝 날을 세웠다.
자칫 잘못해 여기서 녀석들과 싸워서야, 얼마 남지 않은 인과율을 송두리째 날릴 수도 있었지만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자. 격. 증. 명. 필. 요.
“증명?”
아. 버. 지. 맞. 다. 는. 증. 거.
이를테면, 자신들의 인정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연우는 코웃음을 치면서 오만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좋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하지.”
[‘춤추는 녹색 불길’이 묵시(默視)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응시(凝視)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이 주시(注視)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구시(久視)합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세시(細視)합니다.]
모든 혼세팔신의 시선이 쏟아지고.
연우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었다.